생활방사선 의혹 '골재', 원안위는 왜 조사조차 안할까?

김원진 기자 2020. 11. 7.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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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중요한 사건입니다.”

지난 7월 24일 오전 11시 10분, 서울행정법원 B208호. 판사가 재판 시작과 함께 원고와 피고 양측에 건넨 말이다. 재판장이 처음부터 ‘중요한 사건’으로 규정짓는 건 이례적이었다. 세간의 주목을 받는 사건은 아니었다. 방청석도 군데군데 비었다.

춘천 시민 32명은 지난 3월 23일 원자력안전위원회(이하 원안위)를 상대로 생활주변방사선안전관리법(이하 생활방사선법) 권한 행사 신청 거부처분 취소소송을 제기했다. 이날은 첫 변론기일이었다. 재판은 서울행정법원 행정11부(재판장 박형순)가 맡았다. 춘천 시민들은 2014년 7월 처음으로 생활방사선 문제를 제기했다. 시민들이 직접 전문기관에 의뢰해 생활방사선 수치를 측정하고 지도를 만들었다. 2018년 5월, 225개의 표본을 추렸고 163곳에서 생활방사선을 측정했다. 지난 2019년 12월에는 원안위에 “춘천에 있는 골재 사업장 두 곳의 방사선 수치를 조사해달라”고 요청했다.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지난 10월 30일 전체회의를 열고 ‘원자력안전법 시행규칙’ 및 ‘하위규정’ 일부개정안 등을 심의·의결했다. / 원안위 제공


■춘천 시민 안전검사 요구 거부당해

골재는 콘크리트 등 건설자재의 원료로 쓰인다. 시민들은 학교 주변과 도로에서 최대 시간당 0.700μSv(마이크로시버트) 생활방사선 수치가 측정된다고 했다. 지난 11월 2일 찾은 강원도 춘천의 초등학교, 대학교, 기차역 안팎에서는 시간당 0.500마이크로시버트 생활방사선 수치가 측정됐다. 인체 영향을 고려해 모두 1m 높이에서 측정했다. 이헌석 환경시민단체 에너지정의행동 정책위원은 “방사선은 안 쬘 수 있으면 안 쬐는 게 좋다. 일상의 노출 빈도 등을 따져봐야 해 일률적으로 얘기하긴 어렵지만, 춘천에서 측정된 수치는 다른 지역의 생활방사선보다 높은 수치”라고 말했다.

원안위는 올해 1월 춘천 시민들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답신을 공문으로 보냈다. 관계 법령상 “골재는 관리대상이 아니다”라는 이유였다. 강종윤 춘천 방사능 시민 대책위원회 대표는 “생활방사선 수치가 높은 것 같으니 원안위에 조사해달라고 요청한 것인데, 원안위는 근거 규정이 없다며 거절했다. 원안위에서 조사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해성을 따져볼 기본 조건도 갖춰지지 않은 상황”이라고 했다. 춘천시도 원안위가 조사에 나서지 않으면 취할 조치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강 대표는 “춘천시에서도 민관 협의체 구성 정도만 이야기하는 수준”이라고 했다.

골재에서 나오는 생활방사선은 원안위가 주무 부처지만 국토교통부, 환경부도 연관돼 있다. 국토부는 골재 인허가를 담당하고, 환경부는 건축물 실내 자재 관련 규제를 맡는다. 춘천 시민들의 문제 제기에 모든 부처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정부와 지자체가 움직이지 않자 소송으로 이어졌다. 재판의 주요 쟁점은 춘천지역 생활방사선의 유해성 유무가 아니었다. 재판에서는 시민들이 원안위에 조사를 요청할 권한이 있는지를 우선 다퉜다. 원안위를 대리한 정부법무공단은 1·2차 변론기일에서 “시민들에게 규제 권한 행사에 대한 신청권이 인정된다고 볼 법적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시민들에게 조사를 신청할 권한 자체가 없다는 취지다.

원안위 주장의 근거는 생활방사선법이다. 생활방사선법 제23조와 제24조는 생활주변방사선 안전관리 실태 조사와 분석, 보고·검사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 생활방사선법 제23조는 “원안위는 생활주변방사선의 안전관리 실태를 점검하기 위해 (중략) 조사계획을 수립·시행해야 한다”고 쓰여 있다. 같은 법 제24조는 “원안위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면 (중략) 취급자, 제조업자, 감시기 운영자에게 필요한 보고를 명하거나 자료를 제출하게 할 수 있다”고도 규정한다. 법령에는 원안위가 조사 주체일 뿐, 시민의 신청 권한을 다룬 규정이 없기 때문에 춘천 시민들에게 조사 신청권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소송을 제기한 춘천 시민들의 입장은 다르다. 시민들이 원안위 주장을 반박한 근거도 생활방사선법이다. 원고 측은 생활방사선법 제1조를 예로 들었다. 생활방사선법 제1조는 “국민의 건강과 환경을 보호하여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공공의 안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쓰였다. 원자력안전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도 “원자력의 생산과 이용에 따른 방사선재해에서 국민을 보호하고, 공공의 안전과 환경 보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한다.

원고 측 소송 대리를 맡은 진재용 법무법인 강남 변호사는 “시민 건강과 안전을 위한 수단인 법의 입법 취지에 비춰 보면, 시민들에게 조사 신청 권한이 있다고 보는 게 맞다. 심지어 시민들이 전문성 있는 기관에 의뢰해 인체에 유해하다고 의심할 만한 방사선 수치까지 제시한 상황이다. 이 과정을 6년 가까이 거쳤다”고 주장했다. 그는 “조사나 변경 등 신청권이 법령에 명시돼 있지 않더라도 신청권을 인정하는 최근 대법원 판례도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방사선 조사는 원안위 내킬 때만?

원안위 주장대로면 원안위의 자의적인 판단에만 근거해 조사에 나설 우려도 크다. 2018년 라돈 침대 사건이나, 2011년 서울 노원구 방사능 도로 사태처럼 여론의 공분을 사지 않는다면 원안위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박태현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원안위가 조사에 나서지 않는 것을 법원이 합법적으로 인정해주게 되면 행정편의주의적이고 임의적으로 원안위가 조사를 하게 되는 단초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재판의 또 다른 쟁점은 ‘골재’의 성격이다. 춘천 시민들은 춘천지역 골재 채취장 두 곳에서 생활방사선이 인체 유해한 수준으로 나온다고 의심한다.

원안위는 골재가 생활방사선법상 규제 대상이 아니라는 논리를 들고 나왔다. 원안위는 법정과 춘천 시민에게 발송한 공문에서 골재가 생활방사선법이 규정한 생활방사선이 나오는 ‘원료물질’이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원안위는 춘천 시민 측 주장처럼 골재를 원료물질이라고 하면 ‘가공제품’은 건축물인데, 건축물은 생활방사선으로 논란이 됐던 침대나 마스크처럼 사용행태를 일반화하기 어려워 안전기준(연간 1m㏜·밀리시버트)을 평가하는 게 어렵다고도 했다.

춘천 시민들의 입장은 다르다. 생활방사선법에는 특정 품목이나 대상을 제외한다고 명시돼 있지 않다. 골재는 콘크리트 등 건축자재의 원료물질이기도 하다. 원고 측이 법정에 제출한 준비서면을 보면, 시민들은 “골재는 콘크리트 등 건설자재의 원료이므로 건축물·시설물뿐만 아니라 콘크리트도 가공물질이라고 할 수 있다. 원안위가 얼마든지 세부적인 규정과 지침으로 기준을 만들면 된다”고 주장했다. 박태현 교수는 “원안위가 생활방사선법상 폭넓게 주어진 규제권한을 자의적 축소해 선택적으로 행사하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춘천시청과 춘천 시민들이 2018년 6월 춘천지역 한 골재장에서 방사선 수치를 측정하고 있다. / 춘천 방사능 시민대책위원회 제공


■“원안위의 소극행정이 문제”

원고 측은 원안위가 건설자재인 석재는 규제하면서 골재를 외면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도 주장했다. 원안위는 지난 2019년 11월 건축자재 라돈 저감·관리 지침서를 발표했다. 이때 석재 기반 건축 내장재 관리 방안이 담겼다. 당시 원안위, 환경부, 국토부 공동 보도자료를 보면 “천연석 기반의 건축 내장재를 (규제와 관리) 대상으로 하며, 향후 근거자료를 축적해 대상 확대를 검토할 예정”이라고 쓰여 있다.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은 아니지만, 춘천지역 생활방사선 유해성 수치를 둘러싼 원안위의 입장도 모호하다. 원안위는 지난 2019년 9월 대책위 측에 “방사능 농도만을 기준으로 하면 귀 단체가 우리 위원회에 송부한 분석결과는 생활방사선법에 따른 원료물질 정의에 따른 농도 기준을 초과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지난 11월 5일 경향신문에 보낸 서면 답변에선 “(춘천 시민들이 제출한) 측정치를 기술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 “춘천지역 골재 방사능 농도는 안전관리가 불필요한 수준”이라고 했다.

강종윤 대표는 “우리가 측정한 생활방사선 수치는 원자력연구원에 의뢰해 받았다. 백번 양보해 시민들이 측정한 방사선 수치가 정확하지 않다면, 국내에서 가장 권위 있는 원안위가 나서서 방사선을 측정해 시민들의 불안감을 해소해주는 것이 맞지 않나”라고 말했다.

춘천 시민들의 반응은 양가적이다. 일부 춘천지역 재개발지구 조합은 지난 2019년 5월 생활방사선 수치가 높은 것으로 의심되는 골재장의 골재를 사용하지 말 것을 시공사에 요청했다. 생활방사선 불안감을 떨치기 위한 조치였다. 반면 집값 하락 등을 우려하는 분위기도 있다. 강종윤 대표는 “건설업 등 지역 경제나 각 개인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춘천지역에서는 공론화가 잘되지 않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재판은 두 차례 변론기일을 마쳤다. 선고는 오는 11월 27일 이뤄진다. 강종윤 대표는 “다른 것도 아니고 조사 요청이다. 원안위 조사 결과에서 ‘이상 없음’이 나오면 더 이상 불안감에 시달리지 않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원안위는 서면 답변에서 “행정소송이 진행되고 있는 만큼 골재 관련 사항은 향후 판결 결과를 따를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원진 기자 one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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