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재산 지키려던' 인천 아파트 소장 참변, 왜 못 막았나

심석용 2020. 11. 8. 15:2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슈추적]
지난달 30일. 인천 서구의 한 아파트에서 입주자 대표에게 살해당한 관리소장을 기리기 위한 추모제가 열렸다. [대한주택관리사협회]


“터질 게 터진 거예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지난달 28일
인천의 한 아파트에서 관리사무소장 이모(53)씨가 입주자 대표에게 살해된 사건에 관한 채희범 대한주택관리사협회 인천시회장의 지적이다. 이 소장 관련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의 공동위원장을 맡은 그는 8일 "이씨가 지난달 28일 사망한 이후 비대위가 연 추모제에는 주민 200여명이 참석해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며 "하지만 이 소장이 겪은 일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입주자 대표의 도 넘은 간섭 견제 필요
경찰과 대한주택관리사협회 등에 따르면 이씨는 인천 서구 한 아파트에서 6년째 관리사무소장으로 근무했다. 이 아파트는 자치관리가 아닌 위탁관리로 운영했다. 관리회사가 주택관리사 자격증이 있는 이씨를 관리사무소장으로 고용하는 방식이다. 문제가 생긴 건 지난해 초 A씨가 입주자대표로 선정되면서부터다.

공동주택관리법에 따라 의결기구인 입주자 대표회의와 집행기구인 관리사무소의 업무는 분리된다. 상호협력을 하면서도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다. 그러나 A씨는 관리사무소 업무에 사사건건 개입했다. 최근에는 아파트 관리비를 보관하는 은행 계좌 명의를 변경했다. 공동주택관리법 시행령 23조에 따르면 아파트 장기수선 충당금은 별도 계좌로 예치해 관리하되 관리사무소장의 직인을 등록하게 되어 있다. 다만 관리사무소장의 직인 외에 입주자대표회의 회장 인감을 복수로 등록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그러나 A씨는 이씨를 못 믿겠다며 은행 계좌를 자신의 단독 명의로 바꾸고 비밀번호까지 변경했다. 이씨의 제지로 바로잡히긴 했지만 A씨의 간섭은 갈수록 심해졌다.

지난달 30일. 인천 서구의 한 아파트에서 입주자 대표에게 살해당한 관리소장을 기리기 위한 추모제가 열렸다. [대한주택관리사협회]


아파트 관리에 이해가 부족한 A씨는 이씨의 설명을 믿지 않았다. 이씨가 부정행위를 하고 있다는 주장도 펼쳤다. 가족에 고충을 토로하는 등 마음고생을 해온 이씨는 결국 외부기관에 관리비 사용에 관한 감사를 요청했다. 300세대 미만 공동주택인 이 아파트는 외부 회계감사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의혹을 견디지 못한 이씨가 자청한 것이다. 그러나 회계감사가 진행 중이던 지난달 28일 흉기를 들고 관리사무소를 찾은 A씨는 이씨를 찌른 뒤 도주했다. 이씨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했다. 1시간 30분 만에 자수한 A씨는 경찰 조사에서 “위협만 하려 했던 것”이라고 진술했다. 살인 혐의로 구속된 A씨는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됐다.


부당간섭 신고제 있지만 실효성 의문

지난달 30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주택관리사 등 6명 명의로 '관리사무소장을 무참하게 살해한 동대표를 엄벌해 주시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법을 제정해 주십시오'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이씨의 참변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선 관리사무소장을 보호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현행 공동주택관리법에는 입주자대표회의와 관리사무소가 맡은 각자 영역에 부당하게 간섭을 하지 못하게 하는 조항이 있다. 부당간섭 내용을 지자체에 신고하면 사실 조사를 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본인 신고가 있어야 절차가 진행되고 부당간섭이 확인되더라도 직접 과태료가 부과되는 경우는 드물다.

김미란 법무법인 산하 변호사는 “가처분 절차로 입주자대표의 직무 집행을 중지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으나 현실적으로 관리사무소장이 그런 선택을 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부당간섭배제조항이 실효성이 떨어지는 선언적 의미에 그친다는 지적이다. 김 변호사는 “입주자대표가 문제가 있다면 직무를 정지한 상태에서 사실 조사를 하는 등의 보완해야 할 부분이 있다 ”며 “이번 사건 관련해 진상조사를 진행한 뒤 실질적인 제도 개선으로 연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비대위는 10일 국회에서 이씨 유가족과 함께 공동주택 내 동일 사건 재발 방지와 이씨의 이름을 딴 법령 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 예정이다. 비대위 소속 하원선 대한주택관리사협회 서울시회장은 “법적으로는 동등한 위치지만 실질적으로 관리사무소장이 입주자대표회의의 하부조직으로 여겨지는 것이 문제”라면서 “문제가 된 아파트에 공공관리소장을 파견해 정상화하는 서울시의 시범 제도 확대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심석용 기자 shim.seokyong@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