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프리즘] 따옴표 아닌 '물음표 언론'

유선희 2020. 11. 8.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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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희 ㅣ 문화팀장

예측을 빗나간 ‘경합주 역전극’과 예상을 벗어나지 않은 ‘대선 불복’.

지난 한주, 올림픽 경기보다 더 심장 쫄깃한 볼거리를 선사한 미국 대선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미 대선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우편투표는 사기극”이라며 소송에 나섰고, 이로 인해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는 경합주에서 잇달아 승리했지만 아직 백악관 열쇠를 손에 쥐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이 정리되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다. 한마디로 대혼란이다. 한국은 물론 전세계 언론이 “미국 선거제도의 난맥상”, “삼류로 전락한 미국 민주주의” 등 비아냥 섞인 진단과 분석을 내놓는 이유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분열과 혼돈만이 아니다. 복잡하게 얽힌 개표 과정에서 도드라진 미국 언론의 보도 태도와 공적 책무성 역시 찬찬히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개표 과정 내내 조심스럽고 신중했던 미국 언론의 보도 태도가 가장 빛을 발했던 시점은 5일(현지시각) 저녁 트럼프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우편투표 조작설’ 등 부정 의혹을 제기했을 때다. <에이비시>(ABC), <시비에스>(CBS), <엔비시>(NBC) 등 주요 방송사들은 근거 없는 주장에 일제히 생중계를 중단했다. 이들 방송사는 “대통령이 다수의 허위 주장을 하고 있으므로 여기서 멈추겠다”(엔비시), “팩트 체크를 해 정리해야 할 것이 많다”(에이비시)고 해설했다. 회견을 끝까지 내보낸 <시엔엔>(CNN)과 <폭스 뉴스> 역시 중계 직후 “증거도 없이 개표의 진실성을 부정한다”는 등의 비판을 이어갔다. 설사 당사자가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사실 확인이 되지 않은, 혹은 사실을 왜곡할 우려가 있는 일방적 주장을 국민에게 여과 없이 전달할 수는 없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셈이다.

사실 대선 전에도 미국 언론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기자회견 중 코로나 대응에 관한 자화자찬 영상을 틀거나(지난 4월·시엔엔) 백악관이 브리핑 도중 조지 플로이드 사건 항의 시위대의 폭력성을 부각하는 영상을 틀자(지난 7월·폭스 뉴스) 생중계를 중단한 바 있다.

이러한 미국 언론을 접하니 ‘받아쓰기 저널리즘’, ‘따옴표 저널리즘’이란 비난을 받는 우리 언론의 행태를 곱씹게 된다. 검찰이나 정치인의 말을 진위와 관계없이 받아적고, 유명인의 에스엔에스(SNS) 글을 그대로 긁어 전달하고, ‘객관과 균형’을 운운하며 양쪽의 주장만 나열하는 등의 태도 말이다. 어제오늘이 아닌 이런 ‘맹목적 인용 보도’로 인해 ‘세월호 전원 구조’ 같은 돌이킬 수 없는 오보가 발생하고, 고 노무현 대통령의 ‘논두렁 시계’ 같은 악의적 보도가 넘쳐나며, “진중권 저널리즘”(김준일 <뉴스톱> 대표) 같은 페이스북 중계가 판을 친다.

누군가는 “정치인이나 중요 인사의 발언은 내용의 진실 여부를 떠나 그 자체로 전달할 가치가 있는 것 아니냐”는 반론을 펼 수도 있다. 비슷한 논란이 일 때마다 언론이 꺼내 드는 ‘국민의 알 권리 보장’ 논리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본래 “맹목적 인용 보도의 작동 기준은 권력”이다. 토머스 패터슨 하버드대 교수는 그의 저서 <뉴스 생태학>에서 “정치인의 거짓말을 전달함으로써 기자는 사기에 연루된다. 그 주장은 공론화되고 뉴스에 나옴으로써 신뢰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일갈했다. 기자들이 사실 확인이나 교차 검증, 더 나아가 언론인으로서의 해석과 판단을 회피할 경우, 언론은 그저 권력자의 주장을 확산하는 ‘스피커’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조국 사태, 정의기억연대 사건,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 의혹 사건, 어업지도원 총격 사망 사건, 라임 김봉현 사태 등 주요 사건 때마다 반복된 언론의 무차별적 인용 보도와 그로 인한 후유증이 이를 방증한다. 이제는 한국 언론이 인용 보도를 위한 따옴표 대신 사실 확인을 위한 물음표를 찍어야 할 때다.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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