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어텍스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남보람 입력 2020. 11. 10.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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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람의 전쟁 그리고 패션-169] 고어텍스의 발명과 전투복_상

1. 정말 추웠던 혹한기 훈련의 기억

오래전 강원도에서 군 생활을 할 때 소대 간부 중 '고어텍스'가 없는 것은 전역 석 달 남은 선임 소대장과 나뿐이었다. 그때 우리는 '신형 미군 야전상의'를 고어텍스라고 불렀다. 고어텍스 기술과 원리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보온이나 방수가 뛰어나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당시 군 간부들은 주로 의정부나 남대문 군용품 가게에서 고어텍스를 사 입었다. 미군이 입던 중고품이 많았다. 병영 생활 중 보급품 아닌 것을 입는 것은 규정 위반이었다. 갓 임관한 나는 규정을 위반해가며 고어텍스를 입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따뜻하고 물에 젖지 않는 전투복이 있다면 다 같이 입어야지 어떻게 간부들만 사서 입는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벌에 27만원 이상 가는 고어텍스를 사 입을 경제적 여유도 없었다.

그러다가 부대 전체가 혹한기 훈련을 나간 어느 새벽. 측정 기온이 영하 26도까지 내려가 모든 계획이 취소된 그 새벽에 나는 규정이고 돈이고 나발이고 고어텍스 하나 사서 입고 나올 걸 하고 마음속으로 수십 번 후회했다.

2. 고어텍스 개발의 역사

고어텍스의 핵심이 되는 물질은 '폴리테트라 플루오로에틸렌(PTFE)'이라는 합성수지다. 160도 고온을 이상 없이 견디고 무독성에 마모계수가 적어 지금도 프라이팬 코팅 등에 사용된다. 원래 의복에 적합한 물질이 아니다.

PTFE는 우연한 사건에 의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고어텍스가 되었다. 1969년의 일이다. 듀폰 엔지니어 출신의 로버트 고어(Robert W Gore)는 PTFE를 전선 피복류에 사용하기 위해 열을 가해 실험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열을 가하여 빠른 속도로 늘리자 이전에 없던 성질이 '늘린 PTFE'에 생겼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너무 뜨거워서 겁에 질린 나머지 확 하고 세게 잡아 늘려 그리 되었다고 한다.

새로 생긴 성질 중 가장 특이한 것은 '방수투습'이었다. 늘린 PTFE에 생긴 미세한 구멍으로 수증기는 통과할 수 있었지만 물방울은 그렇지 못했다(구멍이 수증기보다 700배 크고 물방울보다 2만배 작기 때문이다).

고어-텍스를 어떻게 발견하게 되었는지 시연하는 윌버트 고어 /출처= ⓒ고어-텍스홈페이지
늘린 PTFE를 확대하여 본 모습 /출처= ⓒ고어-텍스홈페이지

로버트 고어는 1970년 '늘린 PTFE'로 특허를 냈다. 1966년 뉴질랜드 화학자 존 크로퍼(John W Cropper)가 매우 유사한 실험 결과를 학술지에 발표한 적이 있으나 특허를 내지 않은 상태였다. 특허를 바탕으로 늘린 PTFE를 대량 생산해 상품화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1976년 방수투습 기능을 갖춘 재킷을 내놓았다. 회사 이름은 가족의 성을 따 '고어텍스'로 했다.

3. 전투복으로서 고어텍스 가능성

고어텍스 제품의 특징은 내화·방수·투습이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집단은 소방대였다. 1979년부터 일선 소방서에 고어텍스 방화복이 지급되었다. 그다음은 군대였다. 고어텍스는 전투복에 딱 맞는 옷이었다.

전투복에 고어텍스 기술을 접목하려고 먼저 시도한 것은 미 해병대였다. 미 해병대는 1970년대 말 기능성 등산복, 고어텍스 의류 등을 입고 전투 실험을 했다.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웠으나 복제에 포함되지는 않았다. 아마도 예산 문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1982년 영국 해병대의 일부가 고어텍스 의류를 구매해 전투 시 착용했다. 당시 영국은 아르헨티나와 포클랜드 전쟁(Falklands War) 중이었는데 상륙작전을 앞둔 영국 해병대 제3코만도 여단의 일부가 고어텍스를 선택한 것이다. 이들이 고어텍스를 선택한 이유는 아마 영국의 공식 구매 허가를 받은, 이를테면 바버 재킷(Barbour jacket) 같은 방한복이 너무나 비쌌기 때문일 것이다.

포클랜드 전쟁 당시 바부어 자켓을 입은 한 장교의 모습(좌)과 그가 입었던 바부어 자켓(우). 바부어 자켓은 이집트 면직물에 바셀린과 동물성 기름으로 방수처리를 한 제품이다. /출처= ⓒputthison.com/barbours-in-the-falklands/

고어텍스 방한복 외에 왁스를 칠한 등산복, 물개 가죽으로 된 것을 선택한 부대도 있었다. 그러나 고어텍스 계열의 복장이 전투에 가장 적합했다. 특히 보온과 방수투습이 동시에 보장되는 고어텍스 특성은 포클랜드 제도의 추위(5월 최저 영하 6도, 최고 영상 14도)를 견디는 데 딱이었다.

[남보람 정치학 박사, 전쟁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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