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 두갑 5000원 영수증..'성추행 혐의' 교수 살렸다

김준희 2020. 11. 11.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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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공연계 주름 잡던 60대 교수
제자·동료 추행 혐의 1심서 실형
항소심 "피해자들 진술 사실과 모순,
피고인 주장 자연스러워" 무죄 선고
성폭력예방치료센터 등 전북 여성·시민단체가 지난달 15일 전북 모 사립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제자와 동료 교수를 성추행한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교수를 파면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북 공연계를 주름 잡던 60대의 A교수는 여제자와 동료 여교수의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폭로로 한순간에 성추행범으로 몰렸다. 본인은 "그런 적 없다"고 억울함을 호소하며 극단적 선택까지 시도했지만, 1심에서 유죄가 인정돼 법정 구속됐다.

하지만 반전이 일어났다. 2심에서 무죄가 나왔다. 항소심 재판부는 성추행 당시 상황과 시점·장소 등에 대한 피해자들의 진술이 객관적 사실과 모순된 점을 들어 교수 손을 들어줬다. 여성·시민단체들은 "판사의 성인지 감수성이 문제"라며 재판부를 공격했다.

법원이 무죄라고 판단한 근거는 뭘까. 담배 두 갑을 산 영수증과 이른바 '안티 제자'의 증언이 결정적이었다. 논란이 된 항소심 판결문을 입수해 사건을 재구성해 봤다.

전주지법 형사1부(부장판사 강동원)는 지난달 28일 강제추행 등 혐의로 기소된 전북 지역 한 사립대 A교수에게 징역 1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A교수는 2015년 12월 21일 자신이 근무하는 대학 강당에서 정기공연 리허설을 준비하던 중 B씨 등 제자 2명을 불러 자신의 허벅지를 주무르게 한 혐의로 기소됐다. A교수는 2014년 2월 1일 오후 10시와 11시 사이 김제의 한 길가에 자신의 승용차를 세운 뒤 차 안에서 동료 C교수에게 강제로 키스하고 신체 일부를 만진 혐의도 받았다.

A교수는 "추행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1심에서는 "피해자들이 한 진술 내용의 일관성, 구체성, 법정 진술 태도 등을 종합해 보면 신빙성이 인정된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항소심의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직접 증거로는 피해자들의 진술이 사실상 유일하다"며 제자와 동료 교수 진술의 신빙성을 조목조목 따졌다.

A교수 측은 항소심에서 "피해자(제자) 진술 중 (A교수의) 허벅지를 주물렀다는 스태프 후배와 당시 사건 현장에 나타났다는 분장 크루(담당자)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다"며 공연 당시 스태프 2명과 분장 담당자 1명을 증인으로 신청했다. 이들 중 연락이 닿은 스태프 1명만 법정에 출석했다.

A교수 제자이기도 한 스태프는 "당시 A교수가 나를 불러 안마해 달라고 요구한 사실이 없고, 피해자 또는 다른 학생이 A교수의 허벅지를 주무르는 것을 본 사실도 없다"고 진술했다.

재판부는 B씨가 1심에서 한 핵심 진술을 항소심에서 바꾼 점을 문제삼았다. ▶추행 시각(리허설 시작 전→리허설 도중 쉬는 시간) ▶함께 허벅지를 주무른 사람(스태프 맡았던 후배→배우 맡았던 후배) ▶추행 장소(객석 중앙→객석 사이 복도) 등이다.

리허설 당시 배우들이 분장을 하지 않았고 B씨가 말한 분장 담당자가 리허설에 오지 않았다는 진술도 B씨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재판부는 "추행 행위는 약 2분간 지속됐고 당시 리허설에 참여한 인원이 최소 20명 이상 있었는데도 피해자 외에 이를 직접 목격했다는 사람의 진술과 같은 증거가 제출되지 않은 점, 오히려 당시 객석에 있던 스태프가 피고인에게 호의적이지 않은데도 피해자가 주장하는 추행 장면을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던 점 등에 비춰 보면 피해자 진술을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고 했다.

성폭력예방치료센터 등 전북 여성·시민단체가 지난달 15일 오전 전북 모 사립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제자와 동료 교수를 성추행한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교수를 파면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동료 여교수 사건에서는 추행 직전 상황에 대한 두 사람의 진술이 엇갈리는 게 쟁점이 됐다. C교수는 "피고인과 함께 커피숍을 나와 곧바로 피고인의 차량으로 중간에 아무 곳도 들르지 않은 채 김제 방향 도로변(추행 장소)으로 갔다"고 진술한 반면 A교수는 "커피숍을 나와 각자 헤어졌고, 혼자 근처 편의점에 가서 담배 2갑을 구입해 집으로 갔다"고 맞섰다.

재판부는 A교수가 사건 당일 사용한 카드 결제 내용에 주목했다. A교수는 2014년 2월 1일 오후 9시58분쯤 커피숍에서 4200원, 10시28분쯤 편의점에서 담배 2갑 값으로 5000원을 결제했다(※사건 당시 한 갑에 2500원이던 담뱃값은 2015년 1월부터 2000원이 올라 4500원이 됐다).

재판부는 이를 근거로 ①A교수가 C교수와 함께 커피숍 앞에 주차된 A교수 차를 타고 가던 도중 편의점에 간 경우 ②A교수가 C교수와 함께 편의점까지 걸어간 경우 ③A교수가 커피숍에 C교수를 둔 채 혼자서 편의점에 다녀온 경우를 살펴봤지만, 세 가지 가정 모두 가능성이 낮다고 봤다. 커피숍에서 편의점까지 거리가 290m인 점을 감안하면 차를 탔든 걸어서 갔든 C교수가 이 경험만을 잊어버렸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취지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진술대로라면 편의점에서 그날 5000원을 결제한 사실과 피해자가 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설명될 수 있다"며 A교수 주장을 받아들였다.

검찰은 지난 3일 상고장을 냈다. A교수의 최종 유무죄는 대법원에서 다투게 됐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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