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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벌 전투 뒤집어 보기

임기환 입력 2020. 11. 12.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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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110] 지난 회에서 나당연합군에 의한 백제의 멸망을 간략하게 다루었다. 그것도 백제 원정을 통해 당이 장차 고구려 원정을 위해 어떤 경험을 축적하였는지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정작 백제 멸망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황산벌 전투에 대해서는 언급 없이 지나갔다. 백제의 멸망 과정을 보면 600년이 넘는 사직이 무너지는 모습으로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었지만, 그래도 계백의 황산벌 전투가 있어 역사에서 두고두고 운위되는 명장면 하나는 남길 수 있었다.

이런 극적이고 감동적인 장면을 고구려 멸망 과정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백제의 멸망 과정이 무능했다면, 고구려의 멸망 과정은 수치스러웠다. 그러기에 계백의 황산벌 전투와 같은 충절의 한 장면이 고구려 멸망에서는 못내 아쉬운 것이다. 그런 점에서도 황산벌 전투를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면 서운할 듯하다.

그렇다고 여기서 계백의 장엄한 죽음과 의로움을 되새겨보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계백을 영웅으로 부각시킨 김유신의 감추어진 의도와 전략을 드러내고 싶다, 황산벌 전투 하면 으레 계백을 주인공으로 떠올리는데, 오늘 이 글의 주인공은 계백이 아니라 김유신이다. 이 황산벌 전투에는 약소국 신라가 강대국 당과의 군사연합을 어떻게 이끌어가고 있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과 아픔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7월 10일 기벌포에서 회군하기로 약속하고 김유신은 5만 신라군을 이끌고 백제 사비성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5만명이란 군대는 당시 신라가 동원할 수 있는 주력군 대부분으로서, 신라로서도 국가 명운을 걸고 있었다. 남천정(지금의 이천)까지 무열왕을 수행한 김유신은 다시 남하하여 삼년산성(지금의 보은)을 경유하여 지금의 옥천~대전~두마 지역을 거쳐 백제의 심장부로 진격하였을 것이다.

백제의 최후 방어 요충지라 할 수 있는 탄현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당시 신라군의 진격로를 염두에 두면 대략 지금의 대전과 옥천의 경계에 있는 마도령(馬道嶺)으로 비정된다. 그러나 이 요충지를 백제군은 미처 방비하지 못하였다. 다행히 별다른 충돌 없이 탄현을 지난 신라군은 7월 9일 황산벌에 도착하였다. 황산벌의 구체적인 위치에 대해서도 현재 여러 의견이 있지만, 지금의 충남 논산시 연산면 일대 너른 들이 바로 격전 장소로 지목되고 있다.

이 일대의 지리적 조건을 보면 동쪽으로 천호산이 자리 잡고 있고 서쪽으로는 계룡산의 험준한 산세가 길게 뻗어 있어 좁은 구조곡이 남북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다. 이곳을 지나면 사비성까지 너른 벌판이 이어지기 때문에 탄현을 넘은 신라군을 소수의 군대로 맞아 싸우기에 그나마 적절한 요충지라고 할 수 있다.

이곳 황산벌이 전략적 요충지라는 점은 후대에 일어난 또 다른 전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황산벌은 훗날 고려 태조 왕건이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을 격파하여 후삼국 통일의 밑거름을 마련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왕건은 이곳에 사찰을 지었는데, '태평한 시대를 연다'는 뜻으로 '개태(開泰)'라는 사찰 이름을 붙였다. 전란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고려왕조의 번영을 기원하는 뜻이다. 개태사는 왕건의 영정을 모시고 기일마다 제사를 지내며 그의 옷 한 벌과 옥대를 보관하였다는 고려의 호국 대찰로서 화려하기가 그지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번창하던 절이 고려 말에 무너지고 내내 폐허로 남아 있었는데, 개태사 창건 때 모셔진 석조삼존불 입상 3구가 지금까지 남이 있어 왕건이 처음 세운 당시 위용을 전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황산벌 전투 현장으로 돌아가보자. 이곳 황산벌에서 계백은 비록 군사는 적지만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세 군데에 진영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신라군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눠 거듭 네 번을 싸웠으나, 백제군의 결사적인 항전에 오히려 매번 패퇴하고 전세가 불리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김유신 동생으로서 부사령관을 맡고 있던 장군 흠순이 아들 반굴(盤屈)에게 말하였다. "신하된 자로서는 충성만 한 것이 없고 자식으로서는 효도만 한 것이 없다. 위급함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忠)과 효(孝) 두 가지 모두를 갖추게 된다." 이에 반굴은 적진에 뛰어들어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 뒤이어 좌장군 품일의 아들 화랑 관창(官昌) 역시 여러 차례 적진에 돌입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두 젊은이의 희생에 기세를 올린 신라군은 마침내 계백이 이끄는 백제군을 물리치고 전진하였다.

영화 `황산벌` 포스터. 황산벌 전투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뒤집은 시각이 돋보인다.

여기까지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어 아마 다들 알고 계시리라. 그런데 황산벌에서 김유신이 5만 군대를 이끌고도 계백의 5천 군사에게 여러 번 패퇴한 것은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김유신은 탁월한 군사전략가이며 지휘관으로서 그동안 백제군과의 많은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유독 황산벌 전투에서만 전력상으로도 비교가 되지 않은 계백에게 여러 차례 패퇴한 것은 이번에는 제대로 임자를 만났기 때문일까. 계백의 전술이 그만큼 탁월했던 것일까. 목숨을 던지는 백제 군사의 항전에는 압도적인 병력도 소용없었던 것일까.

이러한 의문은 이어지는 상황에서 어느 정도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가까스로 계백의 군대를 물리친 신라군은 기일보다 하루 늦은 7월 11일에 기벌포에 도착하였다. 신라군이 지체한 그 하루 사이에 당군은 홀로 백제군과 한바탕 전투를 치렀다. 당군 사령관 소정방은 약속된 기일을 어겼다는 이유로 신라 선봉장 김문영의 목을 베려 하였고, 이에 분노한 김유신이 당군과의 결전도 불사하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 소정방의 기를 꺾었다. 결국 12일 나당연합군이 나란히 사비성 공격에 나섰지만, 11일 소정방과 김유신 사이에서 벌어진 기싸움은 곧 신라와 당의 속마음이 서로 다름을 잘 보여준다.

신라 5만 군대가 황산벌에서 계백의 5천 군사에게 가로막혀 기일을 지체한 데는 김유신의 고도의 전략이 숨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계백군을 물리치고 약속대로 10일 기벌포에 도착했다면 아마도 연합군 총사령관인 소정방은 신라군을 선봉에 내세워 백제의 강력한 저항을 돌파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군의 전력은 온전하지만, 신라군은 황산벌에 이어서 또다시 백제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이게 돼 전력상 적지 않은 손실을 감수하게 될 것이다.

김유신은 자신이 거느린 5만 군사가 신라군의 주전력이고,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이 군사력을 온전하게 보전해야만 했다. 13만명이라는 압도적인 당군의 전력이 백제를 멸망시킨 이후 어떤 향배를 보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고구려가 건재하는 한 당군이 신라를 배신하지는 않겠지만, 결국은 백제 땅을 둘러싸고 당군과의 충돌에도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김유신이 택한 방식은 계백 군의 강력한 저항을 핑계로 하루 늦게 기벌포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신라군의 행군은 이를 염두에 두고 기일 전날인 9일에야 황산벌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리고 계백 군에 비해 압도적인 군세임에도 불구하고 전력을 기울이지 않고 의도적인 패배를 거듭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 대신 황산벌 전투가 '격렬한' 전투였음을 보여줄 증거가 필요했다. 김유신 휘하 두 부사령관의 두 아들, 반굴과 관창의 죽음은 '황산벌 격전'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소정방도 당의 명장인데 이를 눈치채지 못하지는 않았을 게다. 기벌포 전투에서 당군만으로 백제군과 격전을 치른 소정방이 신라군의 지체를 문책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추정이 그럴싸하다면 계백을 5천 군사로 5만 대군을 저지시킨 명장으로 만든 숨은 배후는 김유신인 셈이다. 물론 명장이란 이름이 아니더라도 계백은 충심과 절의만으로도 청사에 한자리를 차지할 만한 이름값을 한 인물이다. 백제의 멸망은 계백이란 이름 덕분에 온전한 수치를 면한 셈이니까.

영화 '황산벌'에서 남편의 칼에 죽음을 맞기 전, 계백의 부인은 싸늘한 눈초리로 쏘아붙인다. "호랑이는 가죽 때문에 죽고, 사람은 이름 때문에 죽는다"고. 전도시킨 말이지만 맞는 말이다. 하도 자기 이름이 욕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지도자랍시고 설치는 세상인지라, 그래도 자기 이름에 자신의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는 세상이 보고 싶어진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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