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민주당의 정체성을 묻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2020. 11. 16.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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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집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국회 의석수는 174석이다. 열린민주당 3석과 우호적인 무소속 의원들까지 합치면, 사실상 집권 여당은 국회 정원의 3분의 2인 180석을 초과한다. 참여정부 시절이나 문재인 정부 전반기처럼 야당의 발목잡기를 더 이상 탓하기 어렵다. 야당의 실수나 야당에 대한 반감에 기대어 반사이득을 보는 소극적 전략도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민주당이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입법으로 구체적인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오히려 무능하다는 비판을 받아야 할 처지이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그러나 45일이나 늦게 개원한 7월 이후 거대 여당인 민주당이 입법으로 보여준 성과는 거의 없다. 구체적인 입법 성과는 고사하고, 부동산정책의 반복적 실패로 경제정책에 대한 불신감만 높이고, 나아가 민주당과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은 도대체 무얼 위해 정치를 하는 것인지, 의구심만 키우고 있다. 특히 노동 및 재벌 문제에선 민주당과 국민의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기나 한 것인지 헷갈린다.

민주당이 집권하고 국회의 절대 다수당이 되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안전사고로 목숨을 잃고 산재사고 OECD 1위라는 비극적 현실을 바로잡을 것으로 믿고 지지했던 국민들은 요즘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 대한 민주당의 입장에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정의당이 발의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 대해 보수야당인 국민의힘이 오히려 협조할 뜻을 보이자, 부랴부랴 정의당 안보다 후퇴한 법안을 내놓고, 이마저도 당론으로 채택하지 못하는 모습에 어이가 없다. 하청 단계나 하청기업의 규모와 무관하게 원청사업자가 궁극적으로 안전사고에 대해 민형사상 엄중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죽음의 외주화와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기업이나 기업주에게 부담을 주는 법안이라고 주장하는 민주당 의원들이 있다면, 민주당은 이들을 출당 조치해야 한다. 아니면 민주당 주류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국민 앞에 솔직히 고백해야 한다.

이른바 공정경제 3법의 입법 추진 과정도 갈수록 가관이다. 그나마 의미가 있는 감사위원 분리선출을 사실상 무력화하려는 시도를 입법을 책임지고 추진해야 할 민주당 의원들이 하고 있다. 사실 이 법안들이 정부 원안대로 입법된다 하더라도, 공정경제의 제도적 기반이 확립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공정경제 3법을 통과시킨 후, 벤처기업 활성화라는 명목을 내세워 지주회사에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털 소유를 허용해주고 벤처기업에 복수의결권 주식 발행을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는 음흉한 복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벤처 활성화라는 명분으로 추진하는 이들 법 개정안이 사실은 벤처기업에 별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재벌의 경제력 집중과 세습에 악용될 소지가 다분하다는 것을 대다수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제대로 알고나 있는지 의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진정 공정경제와 혁신경제를 추구한다면, 기술탈취와 소비자 착취를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민주당 원내지도부는 공정경제의 제도적 기반 확립을 위해 더 절실하게 필요한 징벌배상, 디스커버리, 집단소송 제도를 담고 있는 상법 개정안을 국회에서 입법할 의지가 과연 있는가? 보험가입자의 자산을 지나치게 많이 계열사 주식이나 채권에 투자하는 위험을 규제하는 보험업법 감독규정을 무력화시켜 ‘삼성생명특별법’이 되어버린 보험업법을 정상화할 의도가 있기는 한가?

공정경제 3법보다는 오히려 복수의결권 주식 및 지주회사에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털 소유 허용 여부와 징벌배상·디스커버리·집단소송을 도입하는 상법 개정 및 보험업법 개정 등이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재벌정책에 대한 정체성을 결정할 것이다. 특히 복수의결권 주식을 비상장 벤처기업이 한시적으로 보유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이는 재벌들이 꼼수 세습을 합법화할 수 있는 문을 열어주는 셈이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대한민국을 명실상부한 재벌왕국으로 바꾸는 법제적 초석을 놓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분명 한 번도 경험해보지 나라가 될 것이다.

노동 및 재벌 문제에 대해 민주당의 보수화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학계와 시민사회, 심지어 민주당 지지층 내에서도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대다수 민주당 의원들이 노동 및 경제 관련 법안의 정확한 내용과 함의를 모르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국민이 묻기 전에 민주당 의원들이 민주당의 정체성을 먼저 스스로 물어야 한다. 그래야만 최소한 위선적이라는 비난은 면할 수 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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