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주카포로 北전차 3대 박살..부평 전투 영웅 美 20살 청년

남도현 입력 2020. 11. 21. 10:00 수정 2020. 11. 21.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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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인사이드]
1950년 9월 17일 경인가도에서 월터 모니건 2세 일병이 발사한 로켓탄에 전차 하부를 관통당하면서 파괴된 북한군의 T-34. [wikipedia]


약관 20살의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었던 기간은 단지 6일이었다. 엄밀히 말해 그가 한국을 사랑했는지, 아니 한국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조차 의문스럽다. 그런데도 1965년 9월 27일, 그는 명예 서울 시민으로 추대됐다. 하지만 그가 이런 사실을 알 갈아 없다. 왜냐하면 당시 그는 이미 고인이 된 지 15년이 지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1948년 미 해병대에 입대한 뒤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미국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중국의 칭다오(靑島)에 파견 나갔던 적은 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지는 못했다. 그가 고국에 임신한 아내를 두고 한국에 발을 디딘 것은 1950년 9월 15일 오후였는데, 바로 인천상륙작전이었다. 당시 그는 일병으로 미 해병 1사단 1연대 F중대 소속의 3.5인치 로켓포(이른바 슈퍼바주카포) 사수로 한국에 발을 딛자마자 실전에 투입됐다.

죽미령에서 밀려난 후 평택 인근에서 2.36인치 바주카포로 적 전차 요격을 시도하는 스미스 특임대 병사 [wikipedia]


미 해병 1사단은 경기 부평까지 진격한 후 여기서 부대를 나눴다. 5연대는 김포공항으로, 1연대는 경인가도를 따라 영등포로 진격할 예정이었다. 계획에 따라 9월 16일 저녁에 부평 초입에 도착한 부대는 다음 날 도심으로 진입하기로 예정했다. 가장 앞에 있던 5연대가 원통이 고개 일대에 전초를 설치했다 그리고 후속한 1연대는 500여m 후방인 만월산 서쪽 능선까지 진출했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 6대의 T-34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이 원통이 고개로 다가오는 것이 확인되면서 예상보다 빨리 교전이 시작됐다. 전방에 은폐 중이던 5연대 D중대 2소대가 일부러 적을 통과시킨 뒤 가장 뒤에 있던 적 전차를 격파했고, 동시에 아군의 일제 사격이 개시됐다. 급습에 당황한 적들은 우왕좌왕하다가 뒤에서부터 차례로 격파됐다. 그러자 퇴로를 차단당한 적 선두는 그냥 앞으로 달려갔다.

고국에 임신한 아내를 놔두고 20살의 나이에 한국전쟁에 참전해 낯선 이국에서 생을 마감한 미군 월터 모니건 2세. 경인가도에서 적 전차 3대를 격파한 그의 무공을 기려 기념비를 세우겠다고 했으나 아직까지 건립되지 않았다. [wikipedia]


이들이 5연대의 공격을 피해 1연대 관할 지역으로 다가오는 것을 확인한 그는 바주카포를 꼬나 잡고 45m 앞까지 뛰어나가 적 전차를 격파했고 동시에 후방에서 달려온 M26 전차들이 나머지 적 전차를 처단했다. 이런 일사불란한 대응으로 경인가도 일대가 적 전차의 무덤으로 벼했고, 동시에 200여명의 적군이 사살되거나 포로로 잡혔다. 반면 아군의 피해는 경상 1명에 불과한 쾌승이었다. 전사에서 이를 '부평 전투'라고 한다.

수훈을 세운 그는 1연대의 선두에 서서 영등포로 향했다. 마분리(현 부개동), 송내촌(현 송내동) 일대에서 적의 간헐적인 저항을 격파한 1연대는 9월 19일 저녁 소사리(현 역곡동)와 개봉리(현 개봉동)의 경계인 덕고개(현 오류 IC)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이곳을 지나면 노량진까지는 지형적 제약이 없는 탄탄대로였다. 1연대는 다음날 진격을 결정하고 F중대는 덕고개에 진지를 구축했다.

그러나 아군의 진격을 막으려던 북한군의 대응도 집요했다. 다음날 새벽 4시쯤 5대의 T-34 전차를 앞세운 적의 기습으로 아군 진지가 순식간 피탈됐다. 적 전차들은 연대 본부를 향하여 속도를 높였다. 위기의 순간에 다시 한번 로켓포를 휘어잡은 그가 달려나갔다. 전자 바로 앞에까지 포복해 다가간 그가 발사한 초탄에 선두의 전차가 정확히 피격돼 불타올랐다.

부평아트센터 내에 위치한 부평 전투 전적비. 하지만 실제로 경인가도에서 전투가 벌어진 곳과 700여 미터 떨어진 위치여서 아쉬움이 크다. [부평문화원]


지체 없이 그는 두 번째 탄을 장전한 뒤 다음 전차에 정확히 날려 격파했다. 적들이 당황하며 주춤거리자 그는 일어나 세 번째 전차를 향해 다시 로켓포를 조준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전차에서 발사한 기관총탄에 그는 쓰러졌고 영원히 일어나지 못했다. 부평에서 오류동에 이르는 경인가도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에서 무려 3대의 적 전차를 격파한 그는 그렇게 낯선 이국에서 최후를 맞았다.

그는 처음 발을 디뎠던 인천에 묻혔다가 1951년 미국 버지니아주 알링턴 미 국립묘지으로 이장됐다. 그리고 미군 최고의 영예인 무공훈장인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받았다. 15년 후에야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정부는 처음 언급한 것처럼 그를 명예 서울 시민으로 추서하고 전적지에 기념비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서울 시민이 된 그의 이름은 월터 C. 모니건 주니어(Walter Carleton Monegan, Jr). 그런데 그를 기리는 기념물은 아직도 세워지지 않았다.

군사칼럼니스트 남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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