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스가 콕 짚어 "반갑습니다"..참모진 당황케한 文 외교센스

윤성민 입력 2020. 11. 22. 10:01 수정 2020. 11. 22.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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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H리포트]
문재인 대통령이 14일 청와대 본관에서 화상으로 개최된 제23차 아세안+3 정상회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어?”
지난 14일 화상으로 열린 아세안(ASEAN)+3(한·중·일) 정상회의. 배석했던 참모들이 연설을 보다가 당황해 고개를 들어 문 대통령을 쳐다본 순간이 있었다고 한다. 문 대통령이 모두발언에서 “특히 일본의 스가 총리님 반갑습니다”라고 말할 때였다. 미리 작성된 연설문에 담기지 않았던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정상회의에서 연설문에 없는 내용을 말하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다. 다자 정상회의에서 특정 국가 정상을 지칭해 인사를 건넨 것도 이례적이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를 향한 문 대통령의 환영 인사 뒤 다른 나라 정상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스가 총리에게 “반갑다”고 인사를 했다고 한다. 문 대통령의 인사가 아세안+3 정상회의에 처음 참석한 스가 총리에게 각국 정상의 관심이 집중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또 첫번째 발언자였던 문 대통령이 스가 총리에게 인사를 안 하고 넘어갔는데 다른 정상이 인사를 했을 경우 냉각된 한·일 관계 때문이라는 오해를 살 수 있는 상황도 피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문 대통령이 연설문에 없던 인사로 경색된 한·일 관계를 풀려는 노력을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왔다. 청와대 관계자는 “외교에 대한 문 대통령의 순발력이 발휘된 것으로 봤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6월 30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공동 언론발표를 마친 뒤 박수를 치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악수를 청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트럼프가 압박하자 “민주주의, 미국에게 배운 것”
문 대통령은 정상회의에서 상대국을 치켜세우는 말로 분위기를 풀곤 했다. 2017년 6월 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첫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그랬다고 한다. 비공개로 진행된 확대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무역 불균형 문제를 거론하며 한국 대표단을 압박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발효 이후 미국의 대(對) 한국적자가 2배 이상 늘어났다며 자동차와 철강을 예로 들었다.

특히 당시엔 알려지지 않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거친 표현까지 써가며 불만을 표출했다고 한다. 그때 문 대통령은 “한국의 경제 발전과, 특히 민주주의는 미국으로부터 배운 것”이라며 미국이 한국에게 우방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그러자 트럼프 대통령의 격앙은 다소 누그러졌다고 한다.

문 대통령은 또 확대 정상회담에 배석한 장하성 당시 정책실장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소개하며 “장 실장은 당신과 같은 와튼스쿨(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학원) 출신”이라고 설명했다. 장 전 실장은 당시 회담에서 미국 측 주장을 방어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둘이 동문임을 강조하며 협상을 부드럽게 풀기 위해서다. 회담이 치열한 설전으로 달아오를 때 장 전 실장이 “이제 영어로 이야기하겠다”고 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오, 와튼스쿨! 똑똑한 분”이라고 농담을 던져 회담장에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왼쪽)과 리커창 중국 총리(오른쪽)가 2017년 11월 13일 오후 '제31차 ASEAN 정상회의'가 열리는 필리핀 마닐라 소피텔 호텔에서 회담하고 있다. [연합뉴스]



시진핑의 문장 인용하며 리커창과 대화 풀어가
문 대통령은 2017년 11월 한·중 양자회담에서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자주 인용했던 문장을 언급하며 리커창(李克强) 총리와 대화를 풀어갔다. 문 대통령은 당시 “중국 고전에 ‘꽃이 한 송이만 핀 것으로는 아직 봄이 아니다. 온갖 꽃이 함께 펴야 진정한 봄이다’라는 글을 봤다”며 “리 총리와의 회담이 다양한 실질 협의의 다양한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비옥한 토양을 만들어나가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이 인용한 문장은 명나라 때 편집된 격언집 ‘증광현문(增廣賢文)’에 나온다. 원문은 ‘일화독방불시춘 백화제방춘만원(一花獨放不是春 百花齊放春滿園)’이다. 시 주석은 2013년 중국판 다보스포럼으로 불리는 보아오포럼에서 세계 경제협력을 강조하면 이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2014년 7월3일자 중앙일보에는 시 주석의 특별 기고문이 실렸는데, 그때에도 시 주석은 이 문장을 다시 사용했다.

2014년 7월3일자에 실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특별 기고문. 13일 문 대통령은 리커창 중국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해당 기고문에서 시 주석이 사용했던 문구를 인용했다.

“‘꽃 한 송이 피었다고 봄이 온 것이 아니라, 온갖 꽃이 만발해야 비로소 봄이 왔다’는 말이 있습니다. 국제금융위기의 깊은 영향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중·한 양국은 한 배에 타고 강을 건너가고 있습니다. 함께 손잡고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지역의 발전을 이끌고, 아시아의 번영과 진흥을 위해 기여해야 합니다.”(2014년 7월 3일자 2면)

문 대통령과 리 총리의 회담에 배석한 중국 참모들은 문 대통령을 처음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배석자들의 표정은 차가웠고, 문 대통령이 어떤 사람인지는 시험해보자는 표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시 주석이 자주 언급하는 문장을 인용하자,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12월 9일 청와대를 방문한 아일랜드 출신 록밴드 ‘U2’의 보컬이자 사회운동가인 보노와 인사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평화의 길에 음악을 비롯한 문화·예술의 역할이 크다“고 말했다. 보노는 ’음악은 힘이 세다“며 남북 음악인들이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답했다. [연합뉴스]



아일랜드 후손 바이든에겐 아일랜드 시로
문 대통령은 지난 12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 통화를 하면서는 과거에 선물받은 시집의 시구(詩句)를 떠올렸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문 대통령은 바이든 당선인과 통화에서) 셰이머스 히니의 시구를 인용했다. ‘역사는 말한다’라는 대목으로 시작되는 시인데, 이 부분을 대통령이 인용하면서 축하를 했다”고 말했다.

히니의 ‘트로이의 치유(The Cure at Troy)’라는 제목의 시다. ‘일생에 단 한 번, 간절히 기다리던 정의의 파도가 솟구칠 수 있다면, 역사와 희망은 함께 노래하리’라는 구절로 유명하다. 바이든 당선인은 2008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부통령 제의를 수락하면서 “젊은 오바마는 희망이고 연륜이 많은 나는 역사”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바이든 당선인과 통화에서 “이제 당신은 희망이자 역사가 됐다”라며 축하했다고 한다.

록밴드 U2의 리더 보노는 지난해 12월 방한해 문 대통령에게 ‘셰이머스 히니’의 시집을 선물했다. 보노와 히니는 모두 아일랜드인이다. 바이든은 아일랜드 이민자의 후손으로 히니의 시를 외울 정도로 좋아한다고 한다. 바이든 당선인이 문 대통령의 축하에 귀기울인 이유다.

윤성민 기자 yoon.sung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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