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들

조중식 부국장 겸 사회부장 2020. 11. 23.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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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 체제는 가정·人倫 파괴… 방역을 절대 가치인 양 휘둘러
격리 위반한 부모 신고하기도… 정치 방역, 끔찍한 세상 만드나

“도둑놈이 아니라 살인자입니다, 살인자. 이 집회 주동자들은!”

광복절인 지난 8월 15일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문재인 정권 규탄' 집회 모습. 국민의힘 박대출 의원이 이날 청와대 국정감사에서 이 사진을 들어보이자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은 "광화문 집회 주동자들은 살인자"라고 했다./연합뉴스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이 눈을 부라리며 고함치는 모습을 TV로 보면서, 소련의 파블릭 모로조프와 중국의 홍위병 장훙빙, 탈북자 신동혁, 그리고 부산의 한 여중생이 떠올랐다. ‘이 어린 소년·소녀들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패륜을 저질렀겠구나.’

1932년 스탈린 시대, 소련 공산당은 농민들의 수확물을 가혹하게 수탈했다. 농민들은 먹고살려고 자기들 먹을 것을 숨겼다. 공산당은 그런 농민을 ‘소비에트의 적’으로 규정해 신고할 것을 독려했다. 모로조프의 아버지는 마을 소비에트 의장 신분이었지만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13세 모로조프는 아버지를 정치경찰(GPU)에 신고했다. 아버지는 노동수용소로 끌려가 처형됐다. 분노한 모로조프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삼촌, 사촌이 그를 살해했다. 정치경찰은 모로조프를 살해한 그들 중 삼촌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조리 총살했다.

1970년 문화혁명의 광풍이 몰아칠 때 16세 홍위병 장훙빙은 어머니 팡중머우를 ‘반혁명죄’로 고발했다. 어머니의 수첩에서 ‘고귀한 자가 가장 우둔하고, 비천한 자가 가장 총명하다’ 글귀를 발견한 것이 발단이었다. 장훙빙은 “위대한 영도자 마오쩌둥 주석을 폄하하는 거냐”며 정색하고 어머니를 비판했고, 말다툼 끝에 어머니를 신고했다. 트럭에 실려 끌려간 팡중머우는 두 달도 안 돼 처형됐다.

신동혁은 북한 정치범 수용소 출신 탈북자이다. 가족들이 갇혀 있었던 곳이 14호 수용소냐 18호 수용소냐 증언이 엇갈리면서 논란이 됐지만, 14세 때 어머니와 형의 탈출 모의를 간수에게 신고했다는 증언만은 바꾸지 않았다. 어머니와 형은 6개월 뒤 공개 처형됐다.

독재국가, 전체주의 체제는 가정과 인륜마저 파괴한다. 위대한 영도자, 소비에트의 영광은 절대 가치이자 불가침의 대상이다. 이를 범하는 부모, 형제자매도 가차 없이 신고와 응징의 대상이 된다. ‘코로나 독재’라는 말이 심심찮게 나온다 했더니 한국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두 달 전 부산의 한 여중생이 말다툼 끝에 자가 격리 명령을 위반하고 집 밖으로 나간 어머니를 경찰에 신고했다. 정부 방역 지침을 위반한 집회를 주동했다고 “살인자”라고 모는 세상이니, 발끈한 10대 여중생에겐 코로나 방역이 어머니보다 더 중한 ‘위대한 영도자’요, ‘소비에트의 영광’이었을지 모른다.

문제는 그 코로나 방역의 기준이 ‘내로남불’임이 갈수록 명확해지고 있는 점이다. 광장은 정치적 우군(友軍)이냐, 비판 세력이냐에 따라 열리고 닫힌다. 그 기준에 따라 개천절 광화문광장은 닫혔고, 민노총 집회가 있었던 여의도공원은 열렸다.

청와대 경제수석은 “8·15 집회가 국내총생산(GDP)을 0.5%포인트 감소시켰다”고 주장했다. 소비 쿠폰 뿌리고 코리아세일페스타를 열면서 집합 활동을 장려한 정부의 정책 잘못은 쏙 빼버리고 대뜸 8·15 집회 핑계를 대며 국민을 편 가르고 비판 세력·정적(政敵)을 악마화한다. 서울시 방역 통제관이란 자는 하루 300명씩 확진자가 쏟아지는 최근 재확산이 석 달 전 광복절 집회 탓이라고 한다. 근거와 인과관계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방역이 과학을 말하지 않고 궤변과 음해를 내뱉는다. 방역이 아니라 정치를 한다.

이대로 가면 조만간 하루 확진자가 600명, 1000명이 될 것이라고 한다. 방역 내로남불을 거침없이 자행하는 이 정부가 또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 방역이 유사 전체주의라는 끔찍한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단단히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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