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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전반은 남성, 후반은 여성으로 살다

임병선 입력 2020.11.23. 06:36 수정 2020.11.23.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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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94년 인생의 전반을 남성으로, 후반을 여성으로 살다 지난 20일(현지시간) 세상을 떠난 영국 여행작가 잔 모리스.AFP 자료사진

트랜스젠더 인권운동을 선도한 영국 기자 겸 여행작가 잔 모리스가 지난 20일(현지시간)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대영제국에 관한 기념비적 3부작 ‘팍스 브리태니카’를 내놓은 것을 비롯해 40권 이상의 책을 펴낸 모리스가 웨일스에서 눈을 감았다고 아들 트윔의 성명을 인용해 BBC가전했다. 병사이며 소설가 등의 다채로운 삶을 살었던 그녀는 남성으로 인생 전반을, 여성으로 인생 후반을 산 것으로도 유명하다. 모리스는 40대이던 1972년 성전환 수술을 받고 여자가 되면서 이름을 잔으로 바꿨다.

트윔은 “오늘 아침 11시 40분에 를린(Llyn)의 이스비티 브린 베릴(Ysbyty Bryn Beryl)에서 작가 겸 여행가인 잔 모리스가 가장 위대한 여정에 올랐다. 그녀는 기슭에 평생의 파트너 엘리자베스를 남겨뒀다”고 밝혔다. 엘리자베스는 성 전환 전 그의 아내였는데 다섯 자녀를 낳은 뒤 성 전환 뒤 동성 결합(civil partnership) 형태로 혼인 관계를 계속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자녀 중 한 명은 어릴적 사망했다.

고인은 2016년 동료 여행작가 마이클 팰린과의 인터뷰를 통해 “난 내 인생을 무척 즐겼다. 해서 존경스러울 정도다. 내 생각에 아주 좋고 재미있는 인생이었다. 그리고 난 이 모든 일을 아주 열심히 해냈다”면서 “내 서명을 크고 길게 가져가기 위해 모든 책을 썼다. 내 인생은 자족감으로 가득한 중심 진자 운동이었다”고 돌아봤다. ‘신유럽기행’을 쓰고 2018년 평양 르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던 팰린은 고인이 넌픽션 작가로도 활약하며 많은 이들의 마음에 머물러 온 장소에 대한 이미지와 느낌을 창조해냈다고 돌아봤다.

‘래비린스(Labyrinth)’를 쓴 작가 케이트 모스는 “각별한 여인이었다”고 애도했으며. 동료 작가인 사스남 상게라는 트위터에다 “대단한 인생, 대단한 작가였다”고 아쉬워했다. 기자 캐서린 오도넬은 “공적으로 알려진 인물이 성 전환을 해 나를 비롯한 다른 이들도 혼자가 아니란 사실을 알게 만들었다”고 애도했다. 카디프 북부의 노동당 의원인 안나 맥모린은 “믿을 수 없는 작가이자 개척자이며 역사학자”라고 애도했다.

잔의 베네치아 가이드북은 워낙 일품이어서 더 나은 책이 나오기 힘들다는 평판을 들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 책이 클래식 반열에 올랐다고 했다. 팰린 역시 “내 인생에 가장 영향을 준 책 가운데 하나”라면서 “베네치아를 묘사한 문장들은 내가 마주친 어떤 관습적인 여행 글을 초월했다. 그녀의 영혼과 가슴은 이 책에 있었다. 일종의 불륜 같은 것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내가 마치 베네치아와 연애하는 느낌으로 읽기 시작해 내 평생 그 느낌이 지속됐다. 작가로서 그녀는 호기심과 관찰이 얼마나 중요한지 내게 가르쳐줬다”고 했다.

1953년 5월 29일(현지시간) 에드먼드 힐러리 경의 에베레스트 초등을 특종 보도했던 영국 여행작가 잔 모리스가 에베레스트 초등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즉위 60주년인 2013년 필립 공과 함께 연회에 참석하고 있다.AFP 자료사진 연합뉴스

그녀의 소설 ‘하브로부터의 마지막 편지’는 여행 문학의 형태로 쓰인 작품이었다. 고인은 또 1953년 5월 29일 인류의 첫 에베레스트 등정 발자취를 단독 취재해 타임스에 실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에드먼드 힐러리 경과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까지 동행하며 정상 도전을 중계하다시피 전했다. 마침 힐러리 경의 정상 등정 일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이 열렸는데 1999년 여왕으로부터 대영제국 훈작사(CBE)를 받았다.

모리스는 1974년 자신의 성전환을 다룬 책 ‘수수께끼(Conundrum)’를 썼는데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카사비앙카의 한 클리닉에서 수술을 받은 과정을 옮겼는데 가디언은 “힘있고 아름답게 쓰인 다큐멘터리”라고 극찬했다. 고인은 2018년 파이낸셜 타임스 인터뷰를 통해 성전환 때문에 집필 생활에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털끝만큼도 아니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영향이 미미했다”고 돌아봤다. 나아가 남자로서 더 많은 성취를 이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덧붙였다.

해외를 여행하지 않으면 웨일스의 그위네드에 있는 집에 머물렀는데 국수주의적인 견해를 강력히 천명했다. 웨일스 음유시인 경연대회인 에이스테드보드(Eisteddfod)는 웨일스의 생활 방식에 대한 그녀의 공헌을 높이 샀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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