덮지마세요. 패션에 양보하세요. #담요

입력 2020. 11. 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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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에 걸치거나 땅에 끌면서 걷거나 팔 사이에 끼거나. 새로우면서도 낯익은 방식으로 등장한 담요 활용법.

프로엔자 스쿨러와 마이클 코어스 컬렉션에서 모델들이 커다란 블랭킷을 케이프처럼 양 어깨에 두르고 나왔을 땐 덤덤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끌로에 쇼에서 지지 하디드가 두툼한 담요를 한쪽 팔에 걸치고 나왔을 때, 질 샌더와 토즈 런웨이에 등장한 모델들의 어깨에 블랭킷 숄이 둘러져 한쪽 어깨에 고정돼 있는 걸 발견했을 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하이라이트는 마크 제이콥스 컬렉션이었다. 파스텔컬러의 A라인 코트와 미니드레스 등 미니멀한 60년대 스타일이 줄을 이었는데, 모델 대부분은 자신이 입은 옷과 같은 컬러의 블랭킷을 바닥에 끌고 등장했다(블랙 컬러의 브라톱과 팬츠를 입고 카메오로 등장한 마일리 사이러스 역시 바닥에 무언가를 끌고 나타났다!). 드리스 반 노튼은 또 어떤가. 파티 걸 같은 화려한 차림의 모델들이 깃털 장식의 벌키한 숄 머플러를 클러치백과 함께 움켜쥔 채 캣워크를 걸었다.

집 바깥이 아닌 집 안에서 사용하는, 말하자면 옷장이 아니라 이불장에 있어야 할 아이템이 런웨이에 대거 등장한 일이 신기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디자이너들이 ‘이불장’에 주목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사실 런웨이에 블랭킷이 등장한 건 그리 새로운 일이 아니다. 피비 파일로가 셀린을 이끌던 시절 그녀가 자주 사용하던 스타일링 방법이기도 하다. 2017년, 머플러를 ‘뻥’ 튀겨 확대한 것처럼 크고 두툼한 양모 블랭킷을 한쪽 팔에 걸친 모델들이 등장했을 때, 이 세상에 전에 없던 애티튜드가 생겨났다.

피비 파일로 특유의 느슨하고 여유롭고 우아한!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2005년, 빅터 앤 롤프의 ‘베드 타임 스토리’ 컬렉션을 떠올려보라. 토리 에이모스가 연주하며 노래하는 동안 모델들은 머리 뒤에 거대한 베개를 부착하고 등장했다. 마치 누워 있는 모습을 그대로 캡처해서 세운 것처럼 머리를 한 올 한 올 베개에 붙이고 몸에는 솜이불을 둘둘 두르고 말이다. 그보다 앞선 1999년에는 오리털 이불에 소매를 부착한 ‘뒤베(Duvet) 코트’를 선보인 메종 마르탱 마르지엘라(이 코트는 2012년, H&M과의 협업에서 리바이벌되기도 했다)와 침낭에 구멍을 뚫어 침낭 드레스를 선보인 칼 라거펠트가 있었다. 다시 올해의 블랭킷 트렌드로 돌아가보자. 모델들이 블랭킷을 두르거나 바닥에 끌며 등장했을 때, 그러니까 두껍고 커다란 담요와 스톨과 머플러가 트렌드 정중앙에 등장했다는 걸 실감했을 때 나는 자연스럽게 〈피너츠 Peanuts〉를 떠올렸다.

찰스 먼로 슐츠(Charles Monroe Schulz)의 〈피너츠〉는 1950년 10월 2일, 신문에 처음 게재된 이후 50여 년 동안 사랑받은 네 컷 만화다. 주인공 찰리 브라운과 그의 영리한 개 스누피, 그리고 그들의 특별한 친구들 루시·페퍼민트 패티·라이너스·우드스탁 등이 주인공인데, 그중 오늘의 주인공 라이너스 반 펠트는 마을을 대표하는 철학자다. 데카르트를 신봉하는 그는 찰리 브라운의 고민 상담가이기도 한데, 재밌는 건 그가 항상 애착 담요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그의 담요는 마음의 위안을 줄 뿐 아니라 새총이나 연, 비행기로 변신하기도 한다!). 날마다 담요를 끌고 다니며 모두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고, 심지어 자신을 괴롭히는 친누나에게도 친절하게 대하는 그는 온유한 태도로 삶의 지혜를 가르친다. 이를테면 이런 것. “문제가 있을 땐 서로 도와야 해.” “뜨끈뜨끈한 양말로 가득 찬 서랍은 안도감을 주지!”, “어른이 되면 어떻게 되고 싶으냐고? 못 말리게 행복하게(Outrageously Happy)!” 그중 최고는 이 문장이다. “행복하기에도 모자란 하루야!”

눈에 보이지도 않는 왕관 모양의 바이러스에게 봄과 여름을 통째로 도둑맞은 우리는 어떤 맘으로 가을을 맞이해야 할까? 저항할 수 없는 질병의 습격을 받은 뒤,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집 안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즐거운 상태의 마음을 지키는 데 우리는 자주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가을과 겨울을 기대할 수 있는 건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일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포근하게 몸을 감싸는 담요처럼, 친구가 건네는 따뜻한 한 마디 말처럼. 자신의 애착 담요가 그동안 자신에게 베풀어준 것이 고마워 한 달에 한 번 정도 햇볕에 널어주는 라이너스의 친절함처럼 말이다. 올가을엔 라이너스처럼 담요를 들고서 말해 볼까. “행복하기에도 모자란 하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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