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살인법 본뜬 중대재해법, 실효성은 있을까

오종탁 기자 입력 2020. 11. 25.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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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체크] 팩트체크 영국 현지 취재를 바탕으로 풀어본 3문3답

(시사저널=오종탁 기자)

이것은 상식과 비상식에 관한 이야기다. 대한민국에선 매일 6명의 노동자가 산업 현장에서 집으로 온전히 돌아오지 못한다. "잘 다녀올게"라는 그 말을 매년 2000여 명이 지키지 못한다. 한국의 산재 사망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에는 과연 어떨까. 

노동시장도 비상식적이다. 우리 노동시장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구분돼 있다. 정규직이 비정규직이 될 수 있어도, 반대는 여간해서 쉽지 않다. 받는 돈이 다르고 일하는 시간도, 방식도, 보상도, 안정성도 다 다르다. 더 큰 문제는 위험성이 더 높다는 점이다. 이른바 '위험의 외주화'는 빠르게 진행돼 왔다. 한국에선 이게 상식이다. 그런데 다른 선진국 노동시장에선 위험을 감수할수록 더 많은 보상이 이뤄진다.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환경도 당연히 제공된다. 

강은미 원내대표 등 정의당 의원들이 11월19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 앞에서 중대재해법 제정을 촉구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시사저널 박은숙

국내에서 '중대재해에 대한 기업 및 책임자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하 중대재해법)' 도입 요구가 빗발치는 데는 이런 맥락이 있다. 중대재해법은 안전관리 주체를 기업과 경영책임자로 명확히 하고 해당 범죄를 기업범죄로 처벌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사회적 재난과 산업재해에 대해 사업주와 경영책임자에게 유해 위험 방지 의무를 규정한다. 위반에 대해선 형사책임을 묻는다. 도급·위탁 등 형식을 불문하고 실질적 의사 결정권자에게 책임을 지운다. 징벌적 손해배상도 가능하다. 중대재해법은 19대·20대 국회 때 발의됐다가 무관심 속에 폐기됐다. 모델은 영국이 2008년 도입한 '기업과실치사 및 기업살인법(Corporate Manslaughter and Corporate Homicide Act·이하 기업살인법)'이다. 기업 입장에서 이 법은 당혹스럽고 비상식적이다. 

한국에는 이미 그 취지가 비슷한 법률이 있다. 바로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이다. 하지만 부족했다. 한국서부발전 사내하청 노동자 김용균씨의 비극적인 사망 사고 이후 재발을 막기 위해 산안법은 다시 한번 개정됐다. 그래서 '김용균법'으로도 불린다. 하지만 여전히 많이 부족한 법이라는 지적이 있다. 산안법은 행정법규로서 근로기준법상 근로관계에 있는 사람에 대한 의무 위반이 전제된 경우에만 처벌이 가능하다. 무엇보다 산업재해라는 결과의 책임을 경영책임자에게 묻기 어렵다. 적용 범위에도 한계가 있어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이란 비판도 많다. 노동계와 진보정당 등은 비상식적인 이 법을 개선할 새로운 대안(중대재해법)을 원하고 있다. 노동자 입장에서 산안법은 불만이고 비상식적이다. 

최근 정의당과 제1야당 국민의힘이 중대재해법 처리에 힘을 합치기로 하면서 중대재해법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산안법 개정에 무게를 두고 있던 집권여당 더불어민주당은 좌우로부터 포위된 모양새다. 노동계와 시민사회 등으로부터는 비난의 화살을 한몸에 받고 있다. 비상식적인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비상한 법안이 필요하다는 게 중대재해법 제정론자들의 주장이다. 산안법은 추가로 개정되더라도 중대재해법보다 처벌 범위가 좁고 강도도 약해 지금의 비상식적인 상황을 제대로 바꿀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무엇이 옳은 주장일까. 정작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데 소외된 질문이 있다. '중대재해법은 정말 산업재해를 줄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영국의 기업살인법은 정말 산업재해를 줄이는 데 큰 도움이 됐을까. 만약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속 시원하지 않다면 지금의 공방은 허수아비 논쟁이 되어 버린다. 시사저널은 지난해 영국을 찾아 기업살인법의 실태를 심층 취재한 바 있다. 이를 바탕으로 중대재해법에 대한 핵심 쟁점을 팩트체크 형식으로 풀어봤다. 영국과 우리의 현실은 다를 수 있다. 그래도 논쟁의 질을 끌어올리는 데는 분명 일조할 수 있다고 본다.

한국의 상당수 언론과 노동계, 진보정당들은 영국에서 기업살인법이 시행된 2008년 이후 산재 사망률이 크게 낮아졌다고 소개했다. "우리도 기업살인법을 도입하자"는 목소리는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근거 데이터는 노동자 1만 명당 사고로 숨지는 비율을 나타내는 '사망 만인율'이다. 영국의 사망 만인율이 2007년 0.7에서 2009년 0.4로 대폭 하락했다는 것이다. 

영국 보건안전청(HSE)에 따르면 영국 내 일터에서 사망한 노동자는 2008~09년 179명에서 2018~19년 147명으로 줄어들었다. 분명히 줄어들었지만 획기적 감소라고 말하기 부족한 게 사실이다. 노동자 10만 명당 사망자 수를 나타낸 비율(10만인율)도 1988년에서 1994년 사이 가장 크게 떨어졌다. 이후 2019년까지는 완만한 하향 추세를 나타내 왔다. 

영국 검찰청(CPS) 소속으로 기업살인법을 일선에서 직접 다뤘던 스티븐 오도허티 전 검사는 "노동자 10만 명당 사망률이 1981년 2.1명에서 점차 내려와 지금은 0.5명 수준(2016년 기준 0.53명, 한국은 9.6명)"이라며 "기업살인법 시행 전후로 뭔가 크게 달라진 게 아니라 30여 년간 지속돼 온 트렌드라고 봐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기업살인법은 (산재 사망사고에 경종을 울리는) 상징적 의미를 준 건 있지만, 실질적으로 산업재해율이나 산업사망률을 낮추는 데 크게 영향을 미친 것 같진 않다"고 말했다. 

현재 여야는 모두 국회에 중대재해법을 발의했다. 핵심 내용은 같다. 노동자가 숨지거나 다수의 피해자를 낸 중대 재해가 발생할 경우 사업주와 경영책임자, 기업을 처벌한다는 것이다. 노동자 사망사고 발생 시 야당안은 3년 이상 징역형을, 여당안은 2년 이상 징역형을 받도록 한다는 내용 정도가 다르다. 중대재해법 처리를 '1호 법안'으로 내건 정의당 김종철 대표는 최근 KBS 라디오에 출연해 "만일 노동자가 사망했는데 (사전에) 안전 책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면 기업도, 대표이사도 처벌받을 수 있다는 내용만 넣어주면 앞으론 이런 일이 안 일어날 것 같다"고 했다. 

영국에서 기업살인법은 어떻게 작동하고 있을까. 시사저널이 영국 현지에서 HSE를 방문하고 관련 법학자, 변호사, 전직 검사 등을 두루 접촉한 결과 영국에서 기업살인법의 효과는 한국 내 중대재해법 제정론자들의 해석 내지 기대와는 거리가 있었다. HSE 측은 "영국의 산재 사망사고 대부분은 살인(범죄)이 아닌 산재의 영역으로 본다. 굉장히 특수한 사안에 대해서만 살인이라 규정하고 경찰 등 사법기관이 이를 (기업살인법 아래서) 조사·수사한다"고 했다. 또 "경찰과 HSE의 초동 공동조사 과정에서 해당 산재 사망이 살인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즉시 조사 권한이 HSE로 넘어간다"고 전했다. 

무엇보다 HSE는 산재 사망사고 발생 시 기업살인법의 적용 비중이 전체의 5%도 채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HSE가 기업살인법이 아니라 1974년 제정된 보건안전법(Health and Safety at Work etc Act·이하 HSWA)으로 산재 책임자를 대부분 처벌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국 킹슬리 네플리 로펌의 산재 전문 변호사인 조너선 그림스는 "산재사고 발생 시 기업살인법이 적용되는 사례는 굉장히 드물다. 그래서 기업살인법이 큰 이슈였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기업살인법은 '기업이 근로자의 목숨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만들어진 법률"이라며 "이것만 바라보고 영국의 산업 안전체계를 따라 하려는 태도는 적절치 않다"고 했다. 

여야가 각각 발의한 중대재해법은 징벌적 손해배상 책임과 관련한 내용도 담고 있다. 야당안은 사망사고 발생 시 사업주와 경영책임자를 '5000만원 이상 10억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여당안은 '5억원 이상의 벌금'이다. 징벌적 손해배상 범위의 경우 야당안은 '손해액의 3배 이상 10배 이하', 여당안은 '최소 5배 이상'이다. 역시 영국 기업살인법에 영향을 받은 조처들이다. 기업살인법에 따르면 위법 요건이 충족되는 기업에 대해 상한 없는 벌금, 구제 명령(remedial orders), 위반 사실의 공표 명령(publicity orders) 등으로 처벌할 수 있다. 상한 없는 벌금이란 말 그대로 일반적인 벌금형과 다르게 구체적인 벌금 상한선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기업살인법에 의해 벌금형을 받은 기업 상당수는 엄청난 액수를 부과받지 않았다. 빅토리아 로퍼 영국 노섬브리아대 로스쿨 부교수는 "2007년 기업살인법 제정 당시에는 일각에서 높은 벌금이 부과될 것이라는 예상도 나왔는데, 도입 이후 실제로 부과된 사례를 되짚어보면 최대 120만 파운드(약 18억원) 정도에 그쳤다"고 했다. 

ⓒ시사저널 오종탁·HSE

2011년 2월 노동자의 근무 중 사망으로 기업살인법 적용을 받은 영국 토목회사 코츠월드 지오테크니컬에는 연매출의 250%에 해당하는 벌금이 부과됐다. 이 회사는 기업살인법에 의한 기업과실치사죄로 유죄를 선고받은 최초의 기업이었다. 벌금형 이후 해체됨으로써 한국에선 기업살인법 벌금의 위력을 상징하는 사례로 받아들여졌다. 

이 회사에 부과된 벌금은 총 38만5000파운드(약 5억8400만원)였다. 연매출이 3억원이 안 되는 작은 기업이었던 것이다. 다른 기업살인법 벌금형 처벌 사례 기업들을 봐도 대부분 중소기업이고, 중견기업 이상으로 분류된 곳은 항공부품업체 CAV에어로스페이스 한 곳뿐이었다. 2008년 법 시행 이후 10여 년 동안 기업살인법으로 처벌받은 기업도 26곳으로 지극히 수가 적다. 그사이의 산재 사망자(1382명)와 비교하면 2% 정도밖에 안 된다. 

ⓒ시사저널 오종탁

英 HSE 수석감독관 "규제 강화, 근본적인 산재 예방책 못 돼" 

2016년 영국의 산업재해 사망률은 노동자 10만 명당 0.53명(HSE 데이터 기준)으로 유럽 최저 수준이다. 같은 기간 한국은 18배가량인 9.6명(통계청 기준)을 기록했다. 비결은 무엇일까. 일단 기업살인법은 아니다. 현장의 깊숙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영국 맨체스터에 있는 보건안전연구소(HSE Laboratory)에서 만난 니콜라스 릭비 HSE 수석감독관(사진)은 "영국이 산업 안전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기업살인법보다는) 1974년 제정된 보건안전법(HSWA) 덕분"이라며 "이 법 시행 이후 (안전사고에 대한) 기업의 생각도 서서히 바뀌어 갔다"고 강조했다. 일단 영국 정부는 산재 컨트롤타워인 HSE를 통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HSWA에 따라 HSE 안전감독관은 자신의 인건비를 문제 기업에 요구할 수 있다. 사업장 조사와 보고서 작성에 걸린 시간에 대해 '시간제 보수(time charge)'를 매기는 것이다. 그 액수는 시간당 125파운드(약 18만원)에 이른다. 안전감독관에게는 작업 중지 명령권은 물론 기소권까지 있을 정도다. 기업살인법 적용이 없어도 충분한 재량권과 경각심을 주고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역시 처벌보다는 예방이다. 총면적 500에이커(축구장 300개 넓이) 규모의 HSE 연구실은 영국을 넘어 전 세계를 아우르는 산업 안전 본부를 자처한다. 석·박사급 연구원 200여 명이 매일같이 산재 예방책을 모색하고 있다. 릭비 수석감독관은 문제가 생기면 엄격하게 처벌하되 기업에 포괄적 자율성을 준 것도 주효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HSWA 도입 전까지 정부가 안전보호 책임을 갖고 산업별로 구체적 방향을 제시했다면, 도입 이후엔 각 산업 주체에게 보호 책임을 넘기고 안전 목표를 달성하게 했다"고 밝혔다. 규제보다 자율성에 방점이 찍힌 것이다. 

예를 들어 정부는 각 업계에 '모든 근로자의 건강과 안전을 보장한다'는 등 포괄적 목표만 제시한다. 개별 기업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 목표를 이뤄내면 된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레 기업 스스로 가장 효율적인 목표 달성 방법을 연구하는 분위기가 생긴다는 것이다. 릭비 수석감독관은 산재사고 처벌에 위축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철저한 산업 안전 관리에 굉장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고 밝혔다. 

그의 마지막 말이 인상적이었다. "안전 문제에서 정부가 주도하는 톱다운(Top-down) 방식은 글로벌 스탠더드가 아니다. 근본적인 산재 예방책이 결코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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