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머n]당신들 이름을 떳떳하게 말할 그날을

장수경 입력 2020. 11. 25. 10:08 수정 2021. 5. 4.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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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너머n']디지털성범죄 끝장 프로젝트 '너머n'
피해자의 편지 '그 사람들에게'

<한겨레21>이 디지털성범죄를 정리하고, 앞으로 기록을 꾸준히 저장할 아카이브(stopn.hani.co.kr)를 엽니다. 11월27일 나오는 <한겨레21> 1340호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이후 1년동안 일궈온 성과와 성찰, 그리고 여전히 남아 있는 고민으로만 채웁니다.

디지털성폭력 피해자 4명이 ‘너머n’에 6통의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중 가해자에게 보낸 한 피해자의 편지를 먼저 공개합니다. 나머지 편지들은 11월27일 펴내는 <한겨레21> 1340호에 실립니다.

안녕하세요.

 제가 누구라 하면 다들 기억하시렵니까? 저를 잊었다 해도 화가 날 것 같고 아니라 해도 화가 날 것 같군요. 안 잡힌다고 큰소리치면서 날 겁주고 집어삼키려 했던 당신들이 국민과 법의 심판 아래서 벌벌 떨며 죄송하다 외치는 모습이 참 웃기기만 합니다.

 처음 당신들의 존재가 세상에 나왔던 그날을 기억합니다. 난 그날 아침 뉴스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처한 현실을 믿지 못했어요. 하나둘 드러나는 당신들 얼굴을 보니 그제야 내 삶이 붕괴했다는 걸 완전히 알게 되었습니다. 온라인 속 베일에 가려진 당신들은 정말 가상의 인물 같았고 가상이길 바랐고 내가 사는 현실이 잠깐 자고 있는 꿈이길 바랐죠.

 그 꿈에서 깨어버렸어요. 이제 보호받을 것이란 안도와 동시에 두려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모두 다 알아버린 것 같은 그런 부끄러움에요. 밖에서 밥을 먹다가 뉴스를 보다 당신들 얼굴이 나오면 구역질이 나와 화장실로 뛰어가고 현실이 믿기지 않아 서러워서 엉엉 울었습니다. 의사 선생님께 매번 말했어요.

 선생님 저 가끔 현실이 느껴지는 순간에 뛰어내리고 싶어요. 갑자기 제가 죽으면 어떡하죠, 라고. 혹시나 내가 갑작스럽게 죽으면 내가 왜 죽었는지 아무도 모를까 봐 병원에 기록을 남겨두었죠. 그렇게 혼자 앓으면서 지내려 했습니다.

 뉴스엔 끊임없이 소식이 흘러나왔죠. 저녁에 다 같이 모여 뉴스를 보고 있는 부모님에게 열심히 사셨는데 이렇게 못나게 딸이 자라서 죄송하다 사실을 밝히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우리 엄마가, 펑펑 울지도 못하고 그저 몇 방울의 눈물이 초점 잃은 눈에서 흐르는데 그 자리에서 누가 나 좀 죽여줬으면 싶었습니다.

 당신들 부모님은 당신들이 그런 사람인 걸 알았을 때 어떤 표정을 지으셨습니까? 당신들은 인륜악적인 행동을 저지르고 스스로 악마라 표현하고선 가족에게 존재를 들키니 부끄러워 이제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당신들의 진심 어린 반성은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그럴 가치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는 사람들이니깐요. 이제 당신들의 사과는 됐습니다. 그렇다 해서 치유될 내 마음도 아니고, 나는 이제 나 하나로도 단단해지는 방법을 배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처음엔 당신들과 싸운다 생각했지만 인생은 길고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게 당신들을 이기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숨어 살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들을 이길 것이고 내 입으로 떳떳하게 당신들 이름을 말할 그날을 오늘도 만들고 있습니다.

 용서요? 받지 못하실 거예요. 그렇게 죽길 바랍니다.

여성의 연대로 세상은 바뀌고 있다

‘너 소라넷 하니?’

2015년 11월 트위터에 계정 하나가 만들어졌다. 이 계정은 ‘소라넷’의 트위터 계정을 팔로 한 사람들에게 일일이 멘션을 보냈다. “소라넷이 그렇게 좋니?”라고. 당시 소라넷에는 불법촬영물이 수시로 올라왔고, 만취한 여성을 상대로 성폭행 모의를 하기도 했다. “남의 성생활을 왜 까발리냐”, “성적 자유” 같은 반발이 이어졌다. 불법 사이트 이용자들을 추적하던 이 계정은 신고를 당해 정지됐다. 그러자 유사 계정들이 “소라넷 하니?”라고 대신 물었다.

언제나 여성의 연대가 있었다.(디지털성범죄 끝장 프로젝트 ‘너머n’의 n명의 추적(stopn/hani.co.kr/we/) 2016년 “소라넷이 해외 서버라 수사가 어렵다”던 수사기관을 움직이게 한 것도, 2019년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세상에 처음 드러낸 것도, 2018년 ‘웹하드 카르텔’을 들춘 것도 모두 그들이었다. 여성들은 디지털성착취에 맞서 끊임없이 ‘너 소라넷 하니?’라고 묻고, ‘#n번방_따로없다_너희도_공범이다’라고 외쳤다. 그리고 또 다른 n번방이 솜방망이 판결을 먹고 자랄 수 없도록 재판을 모니터링한다.

피해자들에게 손을 내민 것도 여성들이었다. 이들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했다. 유사 n번방의 피해자인 ㄱ씨는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희망이 생겼다”고 <한겨레21>에 편지를 보내왔다.

2016년, 17년 동안 유지돼온 소라넷이 폐지됐다. 2020년 9월 디지털성범죄의 양형 기준이 확정됐다. 10월 텔레그램 성착취방인 n번방과 박사방을 만든 ‘갓갓’ 문형욱과 ‘박사’ 조주빈에게 무기징역이 구형됐다. 그러나 여성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텔레그램 성착취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해 모인 ‘리셋’과 ‘eNd’는 11월2일에 탄원서 2만장을 대구지법 안동지원에, 13일엔 탄원서 8만장(33개 상자)을 서울중앙지법에 각각 제출했다. 1심 선고를 앞둔 문형욱과 조주빈의 엄벌을 재판부에 촉구하기 위해서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의 서승희 대표는 “성착취 영상물이 웹하드에서 텔레그램으로 옮겨갔다고들 하는데 그렇지 않다. (반디지털성범죄 운동으로) 피해 영상물 유통량이 확연히 줄었다”고 말했다. 여성의 연대로 세상은 바뀌었고, 바뀌고 있다.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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