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가게 50곳을 움직였다, 어느 카페의 용감한 '제로 실험'

유지연 입력 2020. 11. 25. 11:53 수정 2020. 11. 25.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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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웨이스트 페스티벌 '유어보틀위크'
동네 가게서 포장 없이 용기에 담아간다
스마트폰 앱에 기록하고 나무 키우기도

지난 19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사러가 마트’ 농산물 매대. 감자와 고구마를 마트에서 흔히 보던 비닐 대신 신문지와 천 주머니에 담았다. 어떤 손님은 집에서 가져온 플라스틱 통에 당근을 담아간다. 비닐 없이 당근과 감자 표면에 바로 바코드 스티커를 붙여 계산대로 향하는 이들도 있다. 연희동 ‘경복쌀상회’에선 쌀‧콩‧현미 등 곡류를 소분해 판매한다. 비닐 포장 없이 집에서 가져간 용기에 원하는 양만큼 담아올 수 있다. 서대문구 ‘명문식품’에선 두부를 포장 없이 판매한다. 이곳 주인장은 손님들이 가져온 반찬통 사이즈에 맞춰 테트리스 하듯 두부를 잘라 담아주는 수고를 마다치 않는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사러가 마트'의 농산물 매대. 천주머니와 종이 등에 포장할 것을 제안하는 문구가 쓰여있다. 사진 유어보틀위크


지난 7일부터 30일까지 마포구‧서대문구 일대 카페‧베이커리‧마트‧방앗간‧쌀가게‧반찬가게 등 50여 업체가 플라스틱 포장 줄이기에 나섰다. 일회용품 없는 카페로 유명한 연희동 ‘보틀팩토리’가 주축이 됐다. 올해로 세 번째를 맞는 ‘유어보틀위크’는 지역 기반의 제로 웨이스트 축제다. 11월 한 달간 축제에 참여하는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는 일회용품 없이 개인 용기로 사는 경험을 할 수 있다. 2018년 카페 7개가 모여 처음 시작됐고, 올해는 다양한 품목의 50여개 매장 참여로 확장됐다. 올해의 슬로건은 ‘버릴 것 없이 채우는 일상’이다.

'유어보틀위크' 포스터. 연희동 일대 50여 군데 가게가 모여 포장 없이 물건을 사는 경험을 제공한다. 사진 유어보틀위크


“반찬 가게와 떡집을 참여시킨 게 제일 뿌듯해요”
유어보틀위크를 기획한 보틀팩토리 정다운 대표의 말이다. 비닐 포장 없이 개인 용기를 가져와 채워가는 장터 ‘채우장’도 그가 기획한 것이다. 보틀팩토리에는 일회용 컵은 물론 일회용 빨대도 없다. 음료 테이크아웃도 다회용 텀블러로만 가능하다. 매장에 비치된 것도 다회용 빨대다. 정 대표는 “엄청나게 불편할 것 같지만 불평하는 손님은 한 명도 없다”며 “처음이 어렵지 일단 경험하고 나면 어렵지 않다”고 했다.

'유어보틀위크'를 기획한 '보틀팩토리'의 정다운 대표. 우상조 기자


‘시작의 경험’을 일상적으로 보다 다양한 가게에서 해볼 순 없을까. 유어보틀위크의 출발점이다. 첫해에는 홍대·연남동·연희동 일대의 카페 7곳이 합심해 일주일간 텀블러에 음료를 테이크아웃 하면 7개 카페 중 어느 곳이든 반납할 수 있도록 했다. 두 번째 축제였던 지난해부터 동네 떡집·빵집·김밥집이 참여했다. 올해는 반찬 가게와 단팥죽집, 중식당 등 다양한 음식점으로 범위를 넓혔다. 벌써 세 번째라 상인들을 설득하기가 수월했다고 한다. 정 대표는 “떡이 늘 스티로폼과 비닐 랩으로 포장돼 있는 게 안타까웠다”며 “유어보틀위크 기간 동안만이라도 포장 안 된 떡을 팔아보자 부탁했다”고 했다.

'명문식품'에서 두부를 용기에 담아 사가는 모습. 사진 유어보틀위크


반드시 비닐 포장이 필요할 것으로 여겼던 반찬 가게에서도 파김치를 통에 담아 올 수 있다. 분식집에선 뜨거운 어묵 국물을 유리병에 담아준다. 손님들도 통을 가져가 음식을 포장해오는 게 생각만큼 불편하지 않고, 무엇보다 포장 쓰레기를 버리는 수고가 줄어 좋다는 반응이다.
“처음엔 ‘누가 통을 가져오겠어’라고 생각했던 사장님들도 통을 가져오는 분들이 많고 반응이 좋아서 모두 깜짝 놀랐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면 행사기간인 한 달이 지난 후에도 지속적으로 해보자는 마음이 생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음식점 '희로'에서 우동을 용기에 담아왔다. QR코드를 찍으면 앱에 포인트 8점이 적립된다. 사진 유어보틀위크


용기를 들고 다니는 불편함을 이겨내는 동력을 만들기 위해 정 대표는 ‘제로 클럽’이라는 스마트폰 앱도 개발했다. 유어보틀위크 참여 업체에서 일회용 용기 대신 다회용기에 음식을 받으면 포인트를 적립할 수 있다. 앱을 열면 첫 화면에 작은 나무 한 그루가 등장한다. 포인트가 쌓일수록 나무는 쑥쑥 자라 가지를 치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는다. 정 대표는 “어렸을 때 착한 일을 하면 포도알 그림에 ‘참 잘했어요’ 도장을 채웠던 것처럼 참여자분들께 보상을 하고 싶어 개발했다”고 했다.
포인트가 쌓일수록 뿌듯함도 자란다. 얼마나 일회용품을 줄였는지 내 순위도 나온다. 은근 경쟁의식이 생긴다. 정 대표는 “엄마와 함께 장 보러 나온 동네 아이들이 앱을 사용하면서 포인트 적립을 챙기며 즐거워한다”고 전했다. 유어보틀위크 기간이 끝난 뒤에도 이 제로 클럽 앱을 십분 활용할 계획이다. 유어보틀위크 기간 이후에도 포장 없이 음식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있다면 이 앱에서 포인트를 계속해서 적립할 수 있다.

정다운 대표가 개발한 '제로 클럽' 앱. 배달 대신 방문 포장을 하고, 다회용기를 사용하면 포인트가 적립된다. 사진 유어보틀위크


“재활용이 얼마나 잘 되는지 궁금해서 쓰레기차를 따라가 본 적이 있다. 산더미 같이 쌓인 일회용 포장 용기들을 보며 어떡하든 버려지는 쓰레기 양을 줄여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코로나19로 배달·포장이 많아지면서 일회용 포장 쓰레기들이 심각하게 쌓이고 있다. 동네 단위의 작은 행사지만 유어보틀위크가 일회용품을 줄이는 ‘시작의 경험’을 제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포인트가 적립될수록 앱 안에서 나무가 자란다. 추후 할인이나 프로모션 등 사용자에게 실제적인 이익이 갈 수 있도록 프로그램도 구상하고 있다. 사진 유어보틀위크

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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