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미국 편 서지 말라' 압박 대신 한국과 협력 넓히는 '그물 전략'
[경향신문]
왕이(王毅)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2박3일의 방한 ‘광폭 행보’를 마치고 27일 귀국했다. 전날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회담하고 문재인 대통령을 예방해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구두 메시지를 전달했던 왕 부장은 이날 오전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와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여권 인사들과 조찬을 한 뒤 박병석 국회의장을 만나는 것으로 일정을 마무리했다.
왕 부장은 박 의장 면담에서 “남북 양측이야말로 한반도의 진정한 주인”이라며 “한반도의 운명은 남북 양측의 손에 쥐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왕 부장은 또 “한국 측이 남북 간 채널을 통해 방역이 허락되는 전제하에 북한 측과 교류를 회복하는 것을 중국은 적극적으로 지지할 것”이라며 중국이 남북관계 개선에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시사하기도 했다.
이번 왕 부장의 방한은 미·중 갈등이 깊어지고 있는 가운데 미국의 정권교체기이자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공백기에 이뤄진 것이어서 주목받았다. 방한 기간 왕 부장의 발언과 한·중 외교장관회담 결과 등을 통해 한국에 대한 중국의 시각과 정책적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
왕 부장은 청와대 방문 등 정부 간 대화에서는 미·중 갈등에 대한 언급을 자제했다. 대신 코로나19 협력과 한·중 수교 30주년 등을 계기로 양국관계 폭을 넓히고 교류협력을 강화하는 방안에 집중했다. 경제·안보·문화 등 각 분야에서 양국을 묶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강화해 ‘그물을 넓게 치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한·중 외교장관회담에서 왕 부장이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의 조속한 발효, 한·중·일 자유무역협정(FTA) 추진, 한·중 2+2(외교·안보)대화 가동 등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외교소식통은 “미국 편에 서지 말라는 직접적인 압박 대신 한국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상호의존성’을 넓히려는 의도로 읽힌다”고 말했다.
중국이 시 주석 방한을 서두르지 않고 있다는 점도 분명해졌다. 시 주석 방한을 처음 추진하던 당시와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지금 같은 정세 변환기에 중국 최고지도자가 한국을 방문하려면 상당히 복잡하고 예민한 문제들이 정리되어야 한다. 코로나를 명분으로 내세우긴 했지만, 중국은 당분간 주변 정세를 관망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먼저 미국의 신정부 출범을 지켜보고 전략을 세운 뒤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중국은 시 주석 방한 결정에 앞서 한·중 정상회담으로 얻을 수 있는 확실한 성과를 한국 측이 보장할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왕 부장은 ‘안정적 정세 관리’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미 정권교체기와 대화 공백기를 무난히 넘겨야 한다는 한·미 인식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중국은 북한의 자제도 필요하지만 미국 역시 북한을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대화가 여의치 않을 경우 조 바이든 행정부가 대북 압박 강도를 높이거나 한·미 연합군사훈련 규모를 확대하려 한다면 북한 문제에 대한 미·중 협력이 어려워질 수 있다.
한국 정부는 왕 부장에게 북한의 도발적 행동을 막기 위한 중국의 역할을 강조했지만, 중국이 직접 개입할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소식통은 “중국이 나섰음에도 북한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대북 영향력’이라는 중국의 독점적 지위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에 위험부담을 감수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sim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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