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증인 아닌 양심적 병역거부자도 '무죄'..'입영 거부'로는 처음

이혜리 기자 2020. 11. 29.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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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여호와의증인 신도가 아닌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법원이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이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형사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판결을 내린 지 2년이 넘었지만 여호와의증인 신도가 아닌 이들은 여전히 유죄를 받아온 상황에서 나온 판결이다. 지난해 2월 수원지법에서 군 복무 후 예비군 훈련을 거부한 20대 남성에게 무죄를 선고한 바 있지만, 현역 입영을 거부한 사례에 대한 무죄 선고는 이번이 처음이다.

29일 경향신문 취재 결과, 의정부지법 형사항소4-1부(재판장 이영환)는 병역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시우씨(활동명)에 대한 2심에서 지난 26일 무죄를 선고했다. 시우씨는 2017년 현역병으로 입영하라는 통지를 받고 정당한 사유 없이 입영하지 않아 재판에 넘겨졌다.

2016년 12월13일 참여연대 회원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라며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시우씨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여호와의증인 신도가 아니다. 그는 어릴 때 세례를 받고 기독교 활동을 했다. 성소수자로서 남성성을 강요하는 또래집단 문화에 반감을 느끼며 사회의 가치체계에 의문을 품었다. 대학 입학 후에는 평화와 사랑을 강조하는 기독교 정신에 따라 전쟁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 “사회적 약자에게 큰 고통을 안기는 전쟁과, 타인에 폭력을 가할 것을 전제로 존재하는 군대가 약자를 포용하며 생명을 존중하는 기독교 교리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회가 ‘정상’으로 여기는 요소를 성소수자 입장에서 다루는 ‘퀴어 페미니즘’을 연구하게 됐다. 차별과 이분법적 성별 인식을 지양하고 공존을 강조하는 페미니스트로서 다양성을 파괴하고 차별과 위계로 구축되는 군대 체제와, 생물학적 성으로 자신을 표준 남성으로 규정짓는 국가권력을 용인할 수 없다고 느꼈다. 시우씨의 병역거부 결정은 ‘종교’, ‘비폭력‘, ‘반전’ 중 어느 하나만이 아니라 여러 신념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그와 관련된 수십 차례의 활동 내역을 법원에 제출했다.

2018년 2월 1심 재판부는 징역 1년6월을 선고했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권리로 인정할 수 없고, 일반적인 입영기피와 동일하게 형사처벌해야 한다고 했다.

그해 6월 헌법재판소가 대체복무제를 두지 않은 병역법이 위헌이라고 선언하고, 11월 대법원은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형사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 판결 이후 여호와의증인 신도는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았다. 반면 비폭력·평화주의 등 이른바 ‘비종교’ 또는 ‘비여호와의증인’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유죄 판결을 받았다. 무죄가 선고됐다고 알려진 사례는 수원지법의 1건 뿐으로, 현역 입영 거부가 아니라 예비군 훈련 거부 사례였다.

2004년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대법원의 유죄 판결이 내려지기 전 법정에서 기다리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시우씨에 대한 이번 무죄 판결은 여호와의증인 신도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양심’의 내용을 근거로 병역거부를 인정했다는 의미가 있다.

재판부는 재판부 자신들의 시각에서는 “(시우씨의) 사고의 흐름이 국군에 대한 편향적인 인식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러나 “병역거부 사유에 있어서 ‘정당한 이유’의 존부 판단이 양심의 내용의 타당성에 따라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어 “(병역거부가 정당한지 여부는) 진정한 양심, 즉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인격적 존재가치가 파멸되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가 깊고 확실하며 진실한가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라며 “(양심의 내용의 타당성은) ‘정당한 이유’를 인정함에 장애사유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대법원은 앞서 “자유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운영되지만 소수자에 대한 관용과 포용을 전제로 할 때만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며 “국민 다수의 동의를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형사처벌을 감수하면서도 자신의 인격적 존재가치를 지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병역을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존재를 국가가 언제까지나 외면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했다.

기독교 주류의 교리 해석이 어떤지, 다른 신도들도 병역거부를 하는지도 재판의 쟁점이었다. 재판부는 “양심적 병역거부가 특정 종교의 구체적 교리임을 전제로 그 교리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명하고 있는지 또는 다른 신도들 또한 양심을 이유로 병역을 거부하고 있는지와 같은 요소는 피고인(시우씨)의 병역거부 신념이 깊고 확실하며 진실한지 판단하는 데 있어 준거가 되기 어렵다”고 했다.

이런 기준에 따라 시우씨의 삶의 궤적을 살펴본 결과 재판부는 시우씨의 신앙과 신념이 내면 깊이 자리잡혀 분명한 실체를 이루고 있고, 진정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맞다면서 형사처벌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시우씨가 적어도 2010년부터 주변에 병역거부 의사를 표시했고, 대법원 판결 이전에 형사처벌을 감수하면서도 병역거부를 선택한 점, 대체복무제를 이행할 의지가 있는 점 등을 감안했다. 재판부는 “(시우씨의 병역거부가) 타협적이거나 전략적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시우씨를 변호한 임재성 변호사는 “헌재와 대법원 모두 병역거부의 문제를 종교문제로 국한하지 않고 보다 폭넓은 양심의 자유 측면에서 다뤘지만, 이후 하급심 판단들은 병역거부 문제를 사실상 여호와의증인이라는 특정 교파를 ‘신실하게 믿고 있는지 여부’로만 좁혀서 판단해왔다”고 지적했다.

임 변호사는 “(헌재 결정과 대법원 판결로) 닫혀있었던 문이 열렸다 생각했지만, 실상은 매우 좁은 틈이 생긴 것이었다”며 “대법원 판결 2년이 지나고나서야 비로소 여호와의증인이 아닌 청년에 대한 무죄 판단이 나온 것은 병역거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나 공감수준이 여전히 부족함을 보여준다”고 했다.

무죄 판결은 시우씨가 기소된 지 3년 만에 나왔다. 시우씨는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기대를 많이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소중한 판결을 받게 돼서 기쁜 마음”이라며 “재판을 받고 있는 다른 병역거부자들도 무죄를 선고받고 양심과 신념을 보호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검사가 상고하면 대법원이 시우씨 사건을 최종 판단하게 된다. 시우씨는 “헌재와 대법원 판결에서 양심의 진정성과 확고함에 무게를 뒀는데 실제 재판 과정에서는 종교적인 소속이 어디인지를 따져서 양심을 형성하는 과정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며 “대법원에서 최종 판단을 받게 된다면 양심의 자유가 기본권에 속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확인해줬으면 한다”고 했다. 대법원은 여러 개의 비종교·비여호와의증인 양심적 병역거부자 사건을 심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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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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