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피눈물 나게 하면 대가 치러.. 文, 가장 불행한 대통령 될 것"

최보식 선임기자 2020. 11. 30.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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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식이 만난 사람]
김영삼 5주기 맞아 '김영삼도서관' 개관.. YS의 차남 김현철씨
아버님이 투쟁하고 이룬 민주주의, 현 정권에서 후퇴 아닌 아예 실종
민주화세력이라면서 이렇게 뻔뻔..
현대사 전환점은 이승만의 건국·박정희의 산업화·YS의 민주화
우파 정권에서 다 이뤄냈지만..

‘YS의 차남’ 김현철(61)씨를 만난 날은 김영삼 전 대통령 5주기를 맞아 ‘김영삼도서관’이 개관된 직후였다. 서울 상도동 김영삼 사저(私邸) 부근에 지상 8층 지하 4층 건물이다. 세간에서 관심 있는 뉴스는 아니었다.

“도서관 건축 내막을 알면 기가 막힙니다. 아버님(YS)이 이걸 지어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며 전 재산을 모두 내놓았으니까요. 2010년 말 상도동 사저와 상속받은 거제도 땅과 멸치 어장 등을 사단법인 ‘김영삼민주센터’에 기부한 뒤 기념 도서관을 짓게 했어요.”

-전직 대통령이 자기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사례는 없었는데, 가족과 상의는 있었겠지요?

“저와는 상의했지만, 이미 결심했는데 말려서 될 일도 아니고.... 저희 자식 5형제는 상속을 한 푼도 못 받게 됐지요.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준다는 이런 개념이 아버님께는 없었어요. 저는 솔직히 처가의 경제적 지원이 없었으면 살아가기 어려웠을 겁니다.”

‘DJ는 믿을 수 없는 사람’

-’YS의 지갑은 보는 사람이 임자'라는 말이 있었지요. 주위에 챙겨야 할 사람들이 있으면 지갑에서 돈이 잡히는 대로 건네주는 걸로 유명했는데?

“아버님은 정치를 위해 태어났지, 가족에게는 0점이었습니다.”

-그런데 60억원으로 이런 도서관을 지을 수 있나요?

“아버지는 2, 3층의 아담한 도서관을 염두에 뒀어요. 도서관 짓고 남는 돈으로 민주센터 운영 기금으로 쓰려고 했지요. 2012년 기공하고 난 이듬해 아버님이 쓰러져 서울대병원에 입원하자, 상도동계 사람들이 ‘민주화 대통령에 걸맞은 최고의 도서관을 짓자’며 욕심을 냈어요. 박사급 연구원들을 여러 명 뽑는 등 방만하게 일을 벌였습니다. 전직 대통령 예우 법에 따라 정부 보조금과 민간 모금도 받았습니다. 아버님 사후(死後)인 2015년 도서관 외양이 준공됐을 때 40억~50억원 빚이 쌓였어요. 채권자들이 정부 예산이 들어간 도서관 차압을 못 하자, 상도동 집(100평)을 경매에 붙이려고 했습니다.”

김현철씨는 “아버님은 정치를 위해 태어났지 가족에게는 0점이었다”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어머니(손명순 여사)가 상도동 사저에 살고 있지 않나요?

“어머니가 길바닥에 나앉을 판이 된 거죠.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도서관 문제를 떠맡았습니다. 사업하는 형수가 상도동 집을 매입해 남의 손에 넘어가는 걸 막았어요. 현재 상도동 집은 조카 명의로 돼있습니다.”

-그 뒤 막대한 빚을 어떻게 해결해서 도서관을 개관할 수 있었나요?

“당시 김부겸 행안부장관에게 ‘더 이상 감당 못하겠다. 도서관을 포기하고, 건물을 매각해 정부 빚도 갚겠다’고 했어요. 김 장관의 도움으로 동작구에 기부체납하는 방안을 찾았어요. 구청이 공사를 마무리 짓고 개관할 수 있었지요.”

-김영삼도서관에 이런 사연이 있을 줄 세상 사람들이 알겠습니까?

“이런 얘기도 얘기지만, 아버님 5주기를 맞아 만나자고 한 것은 YS가 확립한 민주주의가 문재인 정권에서 후퇴·실종되는 것에 참을 수 없어서입니다. ‘의회 민주주의자’ 김영삼의 정신은 다 잊혔어요. 여야(與野) 어느 쪽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자식 된 입장이라 섭섭한 기분이 들지 모르나, YS에 대해 호감 갖는 국민이 많을 겁니다.

“안 그렇습니다. YS는 우파·좌파 양쪽에 낀 샌드위치 신세가 됐습니다. 어느 쪽에서도 대접받지 못해요. 좌파 정당은 그렇다치고, 우파 정당에서도 YS 사진만 걸어놓았을 뿐입니다. 현대사의 전환점은 이승만의 건국, 박정희의 산업화, 그리고 YS의 민주화였습니다. 우파 정권이 다 이뤄냈습니다. 하지만 우파는 이승만·박정희만 말하고, YS의 민주화는 활용할 줄 모릅니다.”

-’민주화의 상징' 타이틀은 DJ가 갖고 갔는데?

“아버님이 민주화 타이틀을 뺏긴 게 아니라 우파가 뺏긴 겁니다. 아버님은 DJ와 함께 민주화 투쟁을 했지만 1987년 대선을 앞두고 단일화 실패로 갈라졌어요. 민주화 염원보다 정권욕에 사로잡힌 DJ가 단일화를 파기했던 거죠. 그때부터 아버님은 ‘DJ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며 선을 그었습니다. 1970년 신민당 경선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패배를 해도 아버님은 DJ를 위해 전국 유세를 다녔는데....”

-지나간 옛날 얘기인데, 1987년 양김(兩金) 분열의 책임이 전적으로 DJ에게 있다는 건가요?

“아버지는 동계동계에서 원하는 경선 조건 등을 모두 받아주겠다고 했지만, DJ는 평민당을 만들어 출마했어요.”

-당시 아버지 곁에 있었습니까?

“저는 미국에서 MBA를 마치고 증권회사에 입사했다가 1987년 대선을 돕기 위해 석 달 만에 나왔어요. 단일화를 못하면 노태우 후보에게 이길 수 없는 선거였어요. 저는 ‘아버님이 양보하시라’고 했어요. 상도동계 사람들은 감히 할 수 없는 말을 한 거죠. 그러자 아버님은 ‘나도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DJ 손을 들어주면 군부에서 가만히 안 있을 거다’라고 했어요.”

-당시 ‘DJ 비토론’이 확산돼 있었지요.

“동교동계는 ‘4자 필승론(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이 모두 출마하면 이김)’을 말했지요. 단일화 파기 책임에 몰린 DJ는 ‘내가 YS보다 한 표라도 적게 나오면 정계 은퇴할 것’이라고 공언했습니다. 대선 결과 DJ는 3위 였어요. 하지만 이듬해 ‘소선거구제’로 치러진 총선에서 평민당이 2등 하자, 정계 은퇴 약속은 번복됐어요. 반면 아버님은 처음으로 제3당 신세가 돼 크게 좌절했어요.”

문재인과 첫 만남

-그 뒤로 당신은 선거여론조사기관을 만들어 소위 ‘사조직’ 활동을 시작했는데?

“대선 패배 뒤 제가 미국으로 돌아가 학업을 계속 하겠다고 하자, 아버님이 ‘내 옆에 누가 있나. 자식으로서 부모를 끝까지 도와줘야 하지 않나’라며 우셨어요.”

-아버지가 의지를 많이 한 것 같군요.

“아들이면서 정치적 동지로 봤어요, 그래서 여의도에 ‘중앙조사연구소’를 차렸어요. 그때까지 대규모 인파 동원을 과시해 주먹구구식으로 선거를 치렀는데, 처음으로 선거에 여론조사기법을 도입한 겁니다.”

-노태우 정권은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에서 ‘3당 합당’을 만들었지요. 당시 아버지께 이를 권했나요?

“민정당은 DJ와도 접촉하며 여러 노림수를 썼습니다. 그즈음 아버님이 3당 합당에 대한 의견을 물어왔을 때 ‘리스크가 너무 크다’며 몇 가지 문제점을 얘기했습니다. 아버님은 ‘어느 당끼리 합쳐야 될지 여론조사를 해보라’고 했어요. 예상대로 ‘민정당+공화당’ ‘평민당+민주당’으로 합쳐야 한다는 의견이 가장 높았어요. 둘째로 ‘민정+민주+공화당’으로 나왔습니다.”

도서관에 걸린 YS 사진.

-둘째 안을 택한 이유는요?

“아버님이 DJ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단일화 실패 등을 겪으면서 인간적으로 싫어했어요. 그 뒤 3당 합당 논의는 보안을 위해 제 신혼 아파트에서 이뤄졌습니다.”

-1992년 당신이 이끈 사조직 ‘나라사랑국민운동본부’가 대선 승리에 기여를 했지요. 한창 젊은 나이이고 정치에 깊이 관여해온 당신에게 아무 일 하지 말라는 것도 맞지 않지만, ‘대통령 아들’은 국정 운영과 인사에 참여할 수 있는 공식 직함은 아니지요?

“아버님이 당선된 직후 ‘미국에 가서 박사 과정을 밟겠다’고 말씀드리자, 아버님은 ‘끝까지 도와줘야지’라며 반대했습니다. 합법적으로 도와주려면 공식 직함이 있어야 했습니다. 아버님께 ‘국회의장실에 자리를 만들어달라’고 하니 ‘괜찮은 생각’이라고 했지요. 그러나 내부에서 견제해 불발됐습니다.”

-당신은 사조직을 계속 운영했고 ‘소통령’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상도동계 사람들이나 선거에 도움을 줬던 사람들이 대통령 된 아버님을 만날 수 없으니 저를 찾아왔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꼴 청와대에 들어가 바깥 민심을 전하는 역할을 하다 보니 그런 소문이 났어요.”

-결국 ‘한보 사태’로 구속됐고, 임기 말에 큰 정치적 부담이 됐는데?

“세간에는 제가 한보의 ‘몸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야당의 정치적 공세였지요. 한보와 관련 조사에서 나오는 게 없자, 검찰이 별건(別件)으로 알선수재와 조세포탈 혐의를 씌워 구속했어요. 검찰 공소장과 재판부 판결문 어디에도 ‘한보’라는 글자는 안 나옵니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 지지를 했지요. 언제 처음 만났습니까?

“2013년 아버님이 서울대병원에 입원했을 때 문재인이 문병을 왔어요. 좋은 인상을 받았고 그 뒤 가끔 연락했습니다. 2015년 말 문재인은 경남 김해 출마를 권했습니다. 김해는 노무현 고향이고 그전 선거에서 민주당이 이겼던 지역입니다. 하지만 저는 ‘노무현 후예’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 지역에 출마할 명분이 없었어요. 그래서 ‘아버님 상중(喪中)이라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불 속에 뛰어드는 불나방

-문재인 후보를 공개 지지하고 민주당 입당도 했지 않습니까?

“문재인을 공개 지지하게 된 것은, 그가 3당 합당 얘기를 꺼내며 ‘보수 정당은 YS 정신을 못 살렸다. 민주화 세력이 재결합하자. YS는 민주화 투쟁의 선두 주자였지 않나. 우리 당이 그 정신을 되살리겠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버님의 유훈(遺訓)은 통합과 화합이었다. 이를 반드시 실천해달라. 정권을 잡아 그렇게만 하면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말하자, 그는 ‘취임사에 그걸 넣겠다’고 했습니다.”

-문재인은 그런 취임사를 했으니 약속은 지켰군요.

“취임사에서 지켜진 것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밖에 없습니다. 아버님이 이룩한 민주주의는 후퇴가 아니라 아예 실종됐습니다. 스스로 민주화 세력이라면서, 이렇게 뻔뻔하고 이중적인 정권을 본 적 있나요. 추미애가 윤석열을 직무정지하는 짓 보세요. 아무 생각 없이 불 속에 뛰어드는 불나방꼴입니다. 박정희 정권에 맞선 아버님에게 의원직을 제명하던 장면을 다시 보는 같아요. 그게 ‘부마(釜馬) 항쟁’을 야기해 철권 통치가 종식되는 자충수가 됐습니다.”

-문 대통령의 지지율은 아직 견고한 편인데?

“많은 국민을 피눈물 나게 하면 반드시 대가를 치릅니다. 그가 성공한 대통령이 되길 정말 바랐지만, 그는 가장 불행한 대통령으로 끝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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