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월간산

[낭만야영] 부귀산, 뱀이 하늘을 우러러보는 명당자리에서 하룻밤

글·사진 민미정 백패커 입력 2020. 12. 02. 09:57

기사 도구 모음

음성 기사 옵션 조절 레이어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글자 크기 조절 레이어
마이산이 가장 멋지게 보이는 곳에서 10년 전 벗들과
전북 진안 부귀산 전망대에서의 야영. 구름에 가려진 달이 운치를 더해주었다.
10년 전 결혼한 언니가 물려준 낡은 3인용 텐트를 들고 처음 백패킹을 시작했다. 동생인 김효주·송은미와 함께 한 주도 빠짐없이 전국의 산을 돌아다녔었다. 지금은 가볍고 성능 좋은 장비가 넘쳐나지만, 당시엔 기본 장비만으로도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2~3일에 걸쳐 느긋하게 산을 만끽할 수 있었다.
능선 어딘가에 자리 잡고 밤하늘의 은은한 달빛과 별빛 아래에 텐트를 치면, 오롯이 우리만의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우리의 만남도 줄어들었다. 오랫동안 해외여행 하느라 멀어졌던 어느 날, 두 사람과 연락이 닿았다. 옛날 사진을 주고받던 우리는 백패킹을 가기로 했다. 틈틈이 백패킹을 즐겼다는 은미는 오랫동안 산을 놓고 살았던 효주를 위해 경치는 좋지만 오래 걷지 않아도 될 만한 부귀산을 추천했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과 멋진 풍경이 더해져, 즐거움이 배가됐다.
부귀산은 전북 진안군 진안읍과 부귀면의 경계에 있는 높이 806m의 산이다. 금남호남정맥의 일부로, 마이산~강정골재~부귀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경계로 동북쪽의 금강과 남서쪽의 섬진강으로 나뉜다. 산줄기는 북쪽으로 옥녀봉을 지나 운장산으로 이어지며, 서쪽은 질마재를 거쳐 주화산으로 이어진다.
부귀산은 사지앙천蛇之仰天이라 하여 뱀이 하늘을 우러러보는 형상인 명당이 자리한 곳으로, 가뭄이 들면 진안 사람들이 모여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었다. 산수山水가 좋아 천하명당 자리에 터를 잡은 부귀한 곳이라는 의미도 있다. 마이산도립공원에 근접해 있어 사시사철 다양한 모습의 마이산을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일몰을 여유롭게 볼 수 있다는 것이 백패킹의 매력 중 하나이다.
10년 전 백패킹 멤버들과의 만남
아침 일찍 서울을 출발했지만, 차가 막혀 도로 위에 갇혔다가 오후가 되어서야 진안에 도착했다. 우리가 계획한 숙영지에 누군가 먼저 자리하고 있다면 마이산이 보이는 멋진 풍경은 포기해야 했기에 조금 초조했다. 두남마을로 들어서니 막바지 가을을 화려하게 장식한 듯, 커다란 은행나무가 황금빛을 발하며 이방인을 맞아 주었다. 다음날 비 소식이 무색할 정도로 맑은 오후였다. 마을을 벗어나 부귀산 임도로 들어서서 10여 분을 오르니 부귀산 전망대 주차장이 나왔다.
차에서 내려 산행을 시작했다. 바싹 마른 형형색색의 낙엽이 바스락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그리웠을 효주는 탭 댄스 추듯 박자에 맞춰 낙엽 위를 누비고 다녔다. 흥이 많은 은미도 신바람이 나서 효주의 장단에 맞춰 발을 굴렀다.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파른 산을 오르면서도 눈만 마주치면 깔깔대며 즐거워하던 초보 백패커 시절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떨어져 있던 7년 동안에도 계속 산을 올랐던 나에게는 너무나 당연했던 모든 것들이, 그녀들에겐 잊혀진 즐거움이었다.
월요일이 되면 의무적으로 출근하듯, 주말이 되면 산으로 가는 것이 나의 의무이자 일상이 되었다. 국어 교사인 은미는 언어 자판기마냥 쉴 새 없이 미사어구를 쏟아내며 막바지 가을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들을 카메라에 담으며 잊고 지냈던 나의 감성이 되살아났다.
평소라면 산 위에 인위적으로 놓인 나무계단이 입안의 보철처럼 거슬렸겠지만, 가파르게 시작되는 오르막을 보니, 그녀들에겐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단의 끝에서 이어지는 된비알은 낙엽이 쌓여 미끄러웠다.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롤러코스터처럼 발끝에 힘을 주고 깊은 날숨을 뱉어내며 등산스틱으로 힘차게 밀어 올렸다.
가을 단풍의 감성에 젖어 있던 근육이 바짝 긴장한 듯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내가 미끄러운 비탈과 싸우는 동안 그녀들은 이미 전망데크에 도착해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이 아니라 나를 걱정했어야 했다. 멋쩍은 웃음이 나왔다. 우려와는 달리 전망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곧 해가 질 것 같아 멀리 보이는 마이산 구경은 뒤로하고, 배낭을 내려둔 채 정상을 향해 올랐다.
가파른 길이 이어졌고 미끄러운 낙엽까지 더해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두 번째 전망대도 비어 있었다. 붉게 치장한 첩첩 능선 너머로 우뚝 솟은 마이산은 내려오는 전설만큼이나 참으로 독특했다.
옛날 두 아이와 살던 산신 부부가 하늘로 오를 때가 되자, 남신은 사람이 보면 안 되니 밤에 오르자고 했으나, 여신은 밤에는 무서우니 새벽에 일찍 오르자고 했다. 여신의 말대로 새벽에 오르게 되었는데, 물을 길러 나온 아낙이 승천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 소리치는 바람에 승천하지 못한 채 굳어 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쪽의 수마이산은 아이들이 붙어 있는 형상이고, 서쪽의 암마이산은 죄스러워 머리를 떨군 모양이 되었다고 한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이렇게 독특한 형상으로 굳어버렸을까.
마이산 주변은 운해가 자주 생기는데, 구름의 바다 위로 돌출된 두 봉우리가 마치 배의 돛을 닮았다고 해서 돛대봉이라 불린다. 여름에는 우거진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모습이 용의 뿔을 닮았다고 해서 용각봉龍角峰으로, 가을에는 단풍 든 모습이 말의 귀처럼 보인다 하여 마이봉馬耳峰, 겨울에 눈이 내리면 마이봉에만 눈이 쌓이지 않아 먹물을 찍은 듯 검은 모습으로 보여 문필봉文筆峰이라고도 불린다.
마이산도 올랐다면 좋았겠지만, 이번 여행은 그녀들과 만남이 목적이었으니, 이 정도로 만족했다. 가을의 마이봉을 감상하는 사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짧은 거리지만 미끄러질 위험이 있어, 서둘러 숙영지로 내려갔다. 텐트를 치고 나니, 벌써 산 아랫마을에는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지인들로부터 블루문(한 달에 두 번째 뜨는 보름달)과 핼로인데이가 19년 만에 겹치는 날이라며 연락이 왔다. 특별히 핼로인데이 준비를 한 건 아니지만, 랜턴으로 불빛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나서, 핼로인데이에 걸맞게 호박 유령 사진을 찍었다. 완벽한 사진을 담아내는 데 오래 걸렸지만, 무언가를 함께한다는 자체가 즐거웠다. 밝은 달은 천장에 달아놓은 랜턴처럼 밝게 빛났다. 다음날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았다. 오지 않기를 바랐다.
오랜만에 만난 동생들과 추억이 된 옛 산행 이야기를 하며 가을을 만끽했다.
운해 맛집! 부귀산 전망데크
다음날 새벽 눈을 떴을 때, 기대는 텐트에 떨어지는 빗방울과 함께 부서졌다. 그래도 운해를 기대하며 텐트 밖으로 몸을 내어 봤지만, 아스라이 골짜기를 타고 오르는 옅은 구름만 머금고 있었다. 빗방울은 굵어졌고, 데크를 가득 메웠을 사진작가들도 없었다. 오히려 늑장을 부릴 수 있어 다행이었다. 누군가의 기척이 들릴 때까지 누워 빗소리를 듣고 있자니 다시 스르르 눈이 감겼다.
꿈과 현실의 중간 어디쯤에서 헤매고 있을 때, 효주의 외침에 벌떡 일어나 텐트 밖으로 나갔다. 해변으로 밀려오는 하얀 파도처럼 붉은 산 능선으로 운해가 덮쳤다가 부서지고 있었다. 꿈을 꾸는 듯 몽롱했다. 부귀산의 계곡이 용담호수로 뻗어 있어, 호수에서 생긴 운해가 계곡을 타고 부귀산은 물론 마이산을 비롯한 진안 전체를 뒤덮는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은 사진작가들에게 사랑받는 운해 명소인 것이다.
이 아름다운 광경을 우리만 독차지할 수 있다는 게 특별하고 좋았다. 날씨가 좋았다면 산그리메 너머로 떠오르는 일출을 볼 수 있었겠지만, 비 소식에 일출도 운해도 기대를 접었던 터라 기쁨은 배가 되었다. 바람에 일렁이는 구름 파도는 이따금씩 하얀 바다 위로 돛단배처럼 떠있는 마이산을 덮치려는 듯 부딪쳤다가 사라졌다. 코끝이 시린 차가운 가을 아침, 가을비는 잦아들고 상쾌함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자연으로 돌아온 그녀들은 물론 옛 추억에 흠뻑 빠진 나도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아온 이야기를 모두 꺼내기엔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제부터 다시 함께할 수 있으니 또 다른 백패킹의 묘미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주말이 되면 당연히 떠나야 하는 의무가 아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떠나는 힐링으로.
비에 젖은 텐트를 배낭에 구겨 넣으면서도 즐거울 정도로 말이다.
부슬비가 내리는 아침,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운해를 즐기고 있다.
야영 정보
■ 전북 진안군 부귀면 두남리 214-3 삼봉마을회관에 임도를 타고 2.5㎞를 올라가면 들머리가 나온다. 승용차로도 갈 수 있는 임도다.
■ 주차장에서 전망데크까지 걸어서 15분 소요.
■ 사진작가는 물론 일반인들도 운해와 일출을 감상하기 위해 즐겨 찾는 곳이니, 텐트는 해가 뜨기 전에 철수하는 것이 좋다.
관련 태그

포토&TV

    이 시각 추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