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김박사넷·배달음식점 리뷰.. 세평은 언제 사찰이 되나

권승준 기자 2020. 12. 5.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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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판사 사찰' 논란
세평의 사회학

‘세평(世評):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오가는 평판이나 비평’(표준국어대사전). 올해의 단어 유력 후보다. 지난달 24일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윤석열 검찰총장을 징계해달라고 청구하면서 핵심 이유로 꼽은 이른바 ‘판사 사찰 문건’ 논란 때문이다. 해당 문건에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재판 등 몇몇 사건 담당 판사에 대한 정보가 기재돼 있었다. 핵심 세 가지 항목은 각각 출신 고교나 대학, 주요 판결 그리고 세평.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는 출신 학교나 주요 판결보다는 주로 검찰 내외부 정보망을 통해 수집한 것으로 보이는 세평이 최대 쟁점이었다.

추 장관과 더불어민주당은 “판사 세평 수집은 불법 사찰이며 명백한 범죄”라고 주장하고, 윤 총장 측은 “정상적 업무 범위 내의 활동”이라고 반박한다. 지난 1월에는 청와대 역시 경찰에 지시해 사법연수원 28~30기 검사들에 대한 세평을 수집했다가 논란이 된 일이 있었다. 당시 청와대는 “승진 대상자들의 인사 검증을 위한 절차였다”고 해명했지만, 이에 대해 검찰은 “불법적인 정보 수집”이라며 반발했다. 세평, 어디부터 불법 사찰이고 어디까지 정상 업무인가.

일상 깊숙이 들어와 있는 세평

세평은 검찰뿐 아니라 청와대부터 지방자치단체까지 관가(官街)에선 익숙한 단어다. 앞선 청와대의 해명처럼, 보통 인사 대상자 검증을 위한 세세한 신상 정보 수집을 가리킨다. 민간에서도 이런 유의 정보 수집은 일상이다. 직장을 옮길 때 회사 의뢰로 헤드헌터들이 실시하는 평판 조회가 대표적이다.

세평을 수집하든 평판을 조회하든 겹치는 조사 항목이 많다. 업무 실적, 직장 선후배와 동료 관계 같은 기본부터 시작해 주량, 술버릇이나 금전 및 이성 문제, 도박 중독 등 사생활 문제까지 광범위한 조사다. 헤드헌터로 일한 경력이 있는 김명호(40)씨는 “보통 이직 대상자의 친구와 직장 동료 등 3명 정도를 섭외해 평판 조회를 한다”며 “이전 직장에서 일한 기간이나 퇴사 이유를 중점적으로 살펴 이른바 ‘상습 이직자’인지 판단하는 게 제일 중요한 포인트”라고 말했다. 기업에서 인사 평가 때 활용하는 소위 ‘다면 평가’나 ‘김박사넷’ 같은 곳에서 대학교 교수에 대한 평가를 공유하는 행위 역시 본질은 세평 수집이다. 차이가 있다면 제3자가 수집하는 게 아니라 평가 당사자와 함께 일하는 상사나 부하 직원, 대학원생 등이 직접 입력한다는 점 정도다. 기업에서 대표이사나 임원이 외부 인사와 미팅을 할 경우 상대방의 출신 학교 등 개인 정보와 각종 신상 특이 사항 등을 모은 소위 ‘면담 자료’를 담당 직원들이 만드는 것도 세평 수집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SK그룹 관계자는 “최태원 회장은 기부나 사회 공헌 활동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면담자가 관련 활동 기록이 있는지 사전에 파악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른바 ‘사람 장사’하는 곳에서도 세평은 중요하다. 15년째 서울 대치동 일대에서 강사로 일하는 김모(39)씨는 “사교육 시장은 그야말로 강사와 학부모 및 학생 간에 세평이 난무하는 동네”라고 말했다. 특히 소문과 인맥을 타고 이뤄지는 그룹 과외에선 세평이 결정적이다. 이씨는 “학부모가 그룹 과외 강사들을 섭외할 땐 대입 실적은 기본이고 자기 학생과 ‘사고’ 친 경력 같은 것도 알아본다”며 “반대로 강사가 학생들을 모을 땐 학부모가 간섭하는 스타일인지, 강사와 트러블은 없었는지 등을 점검한다”고 말했다. 고려대 사회학과 이명진 교수는 “세평은 업무나 판단에 필요한 정보를 사전에 알 수 없거나 접근하기 어려운 소위 정보 비대칭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필요로 한다”며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서비스센터 직원들에 대한 서비스 후기를 남기거나, 배달 음식점 리뷰를 쓰는 것도 세평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일러스트= 안병현

청와대는 1년에 수십 회씩 세평 수집

사실 세평 수집에 적극적인 기관 중 하나는 청와대다. 고위 공직자 임명 시 후보자 검증에 꼼꼼한 세평 수집이 필수기 때문. 과거 정부에선 경찰과 함께 국가정보원이 이 업무를 맡았다. 문재인 정부 들어선 국정원 국내 파트가 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경찰이 세평 수집을 전담하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장·차관급 고위 공직자의 경우 임명 때는 물론, 복무 점검이란 이름으로 수시로 세평 수집이 이뤄진다. 한 해 수십 회에 이른다고 했다.

경찰청 정보국에서 해당 업무를 수행 했던 이모 경감은 “업무 추진 방식부터 재산 형성 과정이나 이성 문제 같은 기본 사항은 물론 정치 성향, 단골 식당, 소셜미디어 활동 같이 시시콜콜한 것이라도 문제가 될만한 건 모두 수집한다”며 “청와대에서 특정 인물의 부동산 투기 문제 같은 걸 콕 집어 하명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말했다. 고위 공직자가 세평 조회에 걸려 낙마하는 경우도 많다. 현 정부 초기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으로 지명됐다가 한 달도 안 돼 낙마한 연세대 김기정 교수가 대표 사례다. 교수 재직 시절 부적절한 처신과 관련된 세평 때문이었다. 이 경감은 “이혼 경력이 있는 공직자 후보가 있어 전처에게 세평 조회를 했는데, 문란한 사생활 이야기가 나와서 보고했더니 (검증 단계에서) 걸러졌던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반대로 세평을 제대로 수집하지 못해서 뒤늦게 문제가 된 사례도 있다. 현 정부 첫 법무부 장관 후보였던 안경환 서울대 법대 교수 얘기다. 안 교수는 청년 시절 상대 여성 동의 없이 몰래 혼인신고를 했던 일이 야당을 통해 드러났다. 안 교수는 후보 지명 5일 만에 자진 사퇴했다. 당시 청와대 인사검증팀 업무에 관여했던 한 관계자는 “안 교수 문제는 사전 검증 단계에서 파악하지 못했던 것으로 안다”며 “친구들 몇 명에게 좀 더 자세하게 물었다면 얼마든지 알 수 있었던 일인데 놓쳤다”고 말했다.

“농구 좋아한단 세평도 재판엔 쓸모”

세평 수집은 종종 사찰 논란으로 비화한다. 보통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을에 대해 세평 수집을 하기 때문이다. 청와대가 인사 검증이나 복무 점검을 할 땐 고위 공직자의 운전기사나 단골 식당 주인 등을 탐문해 평소 동선이나 자주 접촉하는 인물을 파악하는 일도 잦았다. 실상은 사찰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 세평 수집엔 법적 근거도 마련돼 있다. 경찰은 대통령령인 ‘공직 후보자 등에 관한 정보 수집 및 관리에 관한 규정’에 따라 세평을 수집한다.

이번에 추 장관이 검찰의 판사 세평 수집을 문제 삼은 건 이런 법적 근거 없이 이뤄진 활동이란 이유에서다. 이에 대해 검찰은 판사들에 대한 정보 수집은 재판 업무 수행을 위한 당연한 업무의 일환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검찰 관계자는 “판사 세평 수집은 해당 판사가 증거 채택이나 증인 심문을 어떻게 진행하는지 등 전적으로 업무에 필요한 정보 위주로 모으는 것”이라며 “상식적으로 판사가 갑이고 검사가 을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수집된 세평 역시 해당 판사에게 직접 재판을 받아본 검사들에게 물어서 파악하는 게 대부분이었고, 내용도 주로 재판 진행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검사 출신인 국민의힘 김웅 의원은 “세평에 어떤 판사가 농구를 좋아한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는 걸 보고 업무와 상관없는 정보 아니냐는 지적이 있던데 그 역시 실무에선 필요한 정보일 수 있다”라며 “예컨대 재판에서 농구 경기 규칙에 빗대 사건을 설명하면 더 효율적일 수 있고, 실제 그런 사례도 많았다”이라고 말했다.

검찰뿐 아니라 재판을 받는 피고인들도 판사 세평에 관심이 많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에 연루돼 3년째 재판을 받고 있는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을 비롯, 전·현직 삼성 고위 간부들도 1심부터 각급 재판부 판사에 대한 세평을 꾸준히 보고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본인이 재판 당사자인 만큼 판사가 어떤 사람인지 관심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불법적인 방법이 아니라 해당 판사의 과거 판결 기록이나 언론 보도, 그 판사의 재판에 참여했던 변호사 등을 통해 파악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하느냐 문제

세평과 사찰을 가르는 경계는 결국 누가 어떤 목적으로 정보를 수집했느냐 여부다. 2017년 금융감독원에서 직원을 채용하면서 특정 지원자를 탈락시킬 목적으로 예정에 없던 세평 조회를 실시했다가 감사원 감사에서 적발된 일이 대표적이다. 법원도 어떤 목적으로 세평을 수집했느냐 여부로 위법성을 판단한 바 있다. 박근혜 정부 때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국정원을 동원해 이석수 전 특별감찰관과 문화체육관광부 간부들의 세평을 파악했던 사건에서 그랬다. 2018년 1심 법원은 이 전 감찰관에 대한 세평 수집만 불법 사찰로 판단했다. 이 전 감찰관이 그 당시 우 전 수석의 비리 의혹에 대해 감찰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평 수집이 감찰을 방해할 목적의 사찰이라는 이유다. 임무영 변호사는 “과거 사례를 봐도 사찰은 통상 비공개 정보를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수집하는 것이지 인터넷 검색이나 주변 사람에게 묻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걸 가리키진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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