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가난은 없다 '45년생 윤영자' [책과 삶]

배문규 기자 입력 2020. 12. 11. 11:20 수정 2020. 12. 11.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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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가난의 문법
소준철 지음
푸른숲 | 304쪽 | 1만6000원

윤영자씨는 한국 나이로 일흔여섯 살이다. 국민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서무일을 하다 1966년 결혼해 3남3녀를 낳았다. 남편 김정웅씨는 이런저런 사업을 했지만 망하기 일쑤였고, 윤씨는 복덕방 일을 도우며 생계를 꾸려갔다. 1970년대 아이들이 국민학교 갈 나이가 되면서 그녀는 태평양 화장품 방문판매를 했다. 1980년대 들어 남편은 택시 운전을, 그녀는 옷가게를 시작했다. 88올림픽 전후 경제 호황으로 수입이 늘면서 서울 북아현동에 단독주택을 한 채 구입했다. 1990년대가 되자 아이들이 연이어 대학에 입학했고, 윤영자씨의 50대는 화려했다.

하지만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문제가 시작됐다. 은행에서 잘린 큰사위는 사업자금을 대달라고 했고, 이혼한 막내딸은 작은 영어학원을 내겠다고 했다. 늘 위태했던 첫째 아들도 유산 대신 사업자금을 달라고 했다. 집을 팔았다. 재개발 소문이 있었지만, 돈보다 아들의 성공이 앞섰다. 그렇게 전세살이를 시작했는데 남편까지 아프기 시작했다. 2008년 경제위기에 아들은 또다시 망했다. 서울역에 대형마트가 생기고, 아현동 재개발로 손님이 줄면서 옷가게를 접었다. 내 집이었던 자리에는 큰 아파트가 들어섰다.

대체 뭔 죄를 졌길래 말년이 이리 힘든지. 65세 노인들에게 기초노령연금이 나온다고 해서 문의를 하니 부양의무자 가족이 있어 돈이 안 나온다고 한다(2008~2012). 그녀는 동네에서 소일거리를 찾아 일했다. 골목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다른 노인 몇몇이 슈퍼에서 공병을 줍고, 종이쪼가리니 플라스틱이니 하는 쓰레기를 줍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생각해봐도, 나이든 노인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없었다. 어느덧 일흔. 막내딸이 대장암 수술을 받은 아버지를 모시기로 했고, 윤씨는 재개발에 휩쓸려 반지하방을 전전하게 됐다. 그리고 오늘도 골목을 걷는다. “윤영자는 자신의 키가 될락 말락 한 파랑 카트를 앞에서 끌며 걷는다. … 그녀는 인사도 나누지 않는 다른 그녀들과 함께 골목을 걸으며 누군가 버린 것 가운데서 팔 만한 것을 골라 줍는다.”

도시의 길거리에서 보이는 폐지 줍는 노인들은 오늘날 ‘가난’의 표상이다. 이들을 마주하는 반응은 ‘외면하거나, 동정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정도다. <가난의 문법>에선 윤영자라는 여성노인의 생애경로를 해부하며 노인들 ‘가난’의 구조를 찾는다. 그리고 개인의 책임을 넘어 국가가 어떻게 그들을 보호할지 문제를 제기한다. 정지윤 기자
가난은 열심히 살지 않아서일까
개인 노력으로 벗어날 수 있을까
도시 말단의 폐지 줍는 여성노인
내조와 양육이 생애의 목표가 된
윤영자씨 삶의 경로 재구성 통해
노인빈곤 필연적 구조 찾아 환기
가난은…그 모습만 바뀌었을 뿐
직면한 고령사회 해법 고민 던져

<가난의 문법>은 재활용품을 수집하는 여성 도시 노인의 생애사를 통해 한국 사회 가난을 들여다보는 책이다. 도시사회학 연구자 소준철이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연구한 결과를 엮었는데, 구성이 특이하다. 책에 또 다른 제목을 붙인다면 <45년생 윤영자>가 될 것 같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서사에 통계자료와 각주를 더해 질적 연구에 입각한 사회과학 연구서를 떠올리게 했다면, <가난의 문법>은 사회과학 연구에 서사를 병치해 도시 말단의 ‘가난’에 돋보기를 들이댄다.

책은 오후 1시부터 다음날 낮 12시30분까지 윤영자의 하루를 보여준다. 1945년생 윤영자는 실존 인물은 아니다. 1945년 출생등록한 이들의 이름 가운데 가장 많았던 것이다. 76세(만 75세)는 면허 갱신 시기가 5년에서 3년 주기로 바뀌는, 신체적 능력에 대한 사회적 의구심이 가득해지는 나이이며, 인구통계에선 후기고령자로 분류된다. 윤씨의 가족과 사건들은 1945년생이 거쳤다고 여겨지는 ‘일반적인 생애주기’를 반영했다. 저자가 만난 노인들 생애의 조각을 기워낸 ‘평균의 노인’이라 할 수 있다. 책에선 윤씨의 이야기를 전한 뒤, 그 토픽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을 교직한다. ‘그들은 어떠한 경로를 거쳐왔는가?’ ‘분기점에서 어떤 선택이 가난으로 이끌었는가?’ ‘그 가난의 구조는 개인의 노력으로 벗어날 수 있는 것인가?’ 책이 풀어가는 질문이다.

“2015년 3월의 어느 날, 가양역 근처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작은 골목을 지나가는데, 1㎞가 채 안 되는 거리에서 재활용품을 줍는 노인 여럿을 보게 됐다. 그녀들은 함께 다니는 게 아니었다. 어떤 갈림길에 다다르자 뿔뿔이 흩어졌다. 알고 보면 경쟁 중이었던 상황이며, 고물은 먼저 발견한 사람의 차지가 되기에 굳이 남의 뒤를 따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저자의 연구가 시작된 첫 발견이다. 한국 사회에서 가난이 사라진 줄로만 알았는데, 그 모습만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판잣집 대신 쪽방살이가, 넝마주이 대신 ‘폐지 줍는 노인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2020년 65세 이상 노인은 812만명(전체의 15.7%)이다. 2017년 기준 한국의 상대적 빈곤율은 17.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국가 중 2위이며, 65세 이상 노인의 상대적 빈곤율은 43.8%로 가장 높다. 여기에 65~69세 고용률(45.5%)과 70~74세 고용률(33%)은 수위를 다툰다. 한국의 노인은 일을 많이 하는데도 빈곤하다는 의미다. 더 주목할 지점이 있다. ‘거리에서 폐지를 줍는 노인들 중에는 왜 여성이 많을까.’ 책에선 “가난한 여성노인은 이전의 한국 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설명한다. 이를테면 남성노인은 ‘출생’-‘진학(초등-중등)’에서 ‘취업’과 ‘결혼’과 ‘은퇴’로 이어지는 사회적 경로를 거쳐 나이든다. 여성은 ‘출생’에서 ‘진학(초등)’ 이후 잠깐의 ‘취업’과 ‘결혼’과 ‘육아’를 거쳐 ‘자녀와의 분리’로 이어진다. 여성노인들은 배우자에게 의존하는 방식으로 생활이 재편되고, 그렇지 않으면 제도에서 벗어난 ‘시장’의 변방에 나가 직접 생계를 꾸려야 했다. “여성 생애의 목표를 남편에 대한 내조와 자녀의 양육으로 삼게 하고, 따라서 교육을 받고 직업을 가질 기회를 갖지 못하게 했던 결과인 것이다.”

재활용품을 수집하는 노인들과 우리를 연결하는 고리는 ‘재활용 산업’이다. “영자씨는 솔직하게 물었다. ‘오늘 어느 고물상이 돈 좀 더 쳐준다요?’ 형자씨는 자신이 가진 정보를 풀어놨다. ‘이, 가차운데 저는 싸고, 삼십 원이라 하지 않것소. 아래께 신수짝 가믄 십 원 더 친다지라.’ … 영자씨는 문득 궁금해졌다. 동네 사람들이 대체 뭘 사길래 이 상자가 이렇게 많이 나오는지. 영자씨가 경험한 바로는 모든 상자에 폭탄 그림이 있었고, 그 폭탄 안에 ‘로켓 배송’이라 적혀 있었다.”

2018년 ‘재활용 쓰레기 대란’으로 일반에도 드러난 바지만, 현재 재활용 시스템은 민간에 책임을 떠넘긴 체제다. 수거 과정에서 업체들이 맡지 않는 주택가나 사업장의 빈틈은 재활용품 수집 노인들이 채우고 있다. 공식 노동으로는 인정되지 않는 형태로 말이다. 2020년 9월 현재, 폐지 1㎏ 평균 가격은 66.6원이며, 여기서 노인들이 고물상과 거래하는 가격은 중간 과정의 이윤을 제하게 된다. 이 폐지 가격에는 중국의 경제상황, 국제 유가, 국제 원자재 가격, 국내 경제상황도 영향을 미친다. 그리하여 노인들이 손에 쥐는 돈을 시급으로 환산하면 500원 혹은 1000원 남짓. 그들의 가난을 좇다보면, 우리가 이 도시와 세상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아득해진다.

“우리는 ‘늙는다는 것이 역사상 처음으로 정상적인 것이 된’ 사회에 살고 있다.” 지금의 노인들은 이전 세대에 비해 생존 연령은 갑자기 늘어났는데, 다음 세대에 비해 사회보장망의 보호는 미약한 상황 속을 ‘버티고’ 있다. 국가와 사회는 이들을 위해 여러 가지 제도를 마련했지만, 현실과 제도 사이에는 빈틈이 있게 마련이다. 책에선 노인의 소득과 일자리, 경로당과 종교시설 등을 매개로 한 노인의 인간관계, 도시에서의 나이듦 등 노인의 삶을 다층적으로 조명한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세세하게 인식하고, 해결할 방법을 함께 고민하자는 제안이다.

‘왜 노인들의 매너가 불량할까’ 혹은 ‘젊은 날 열심히 살지 않아서 어렵게 산다’는 생각들을 해봤다면 꼭 읽어보길 권한다. 어찌 보면 지금의 젊은 세대가 맞닥뜨릴 미래의 모습이다. “재활용품 수집 노인, 그중에서도 여성노인에 대한 책을 쓰는 이유는 단순하다. ‘가난’을 박멸할 수 있다는 정치적 선언도, ‘가난’을 무조건 긍정해야 한다는 낭만도 아니다. 이 책은 가난한 삶의 경로와 우연하지만 필연적이었던 구조들을 가시화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그렇기에 독자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단순하다. 재활용품을 수집하는 노인들이 그런 일과 생활을 하게 된 원인이 개인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 한 개인의 삶은 국가, 산업, 심지어는 같은 동네 주민인 우리들의 영향을 받아 이뤄지는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윤영자의 삶은 다름 아닌 스스로가 스스로를 구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 나서며 살아왔던 이 시대 노인들의 보통 모습이다.”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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