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만나는 북한 문화유산] ⑨ 영변과 의주의 역사유적

정창현 머니투데이미디어 평화경제연구소장 입력 2020. 12. 1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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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북한은 200개가 넘는 역사유적을 국보유적으로, 1700개 이상의 유적을 보존유적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지역적 특성상 북측에는 고조선과 고구려, 고려시기의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지난 75년간 분단이 계속되면서 북한 내 민족문화유산을 직접 접하기 어려웠다. 특히 10년 넘게 남북교류가 단절되면서 간헐적으로 이뤄졌던 남북 공동 발굴과 조사, 전시 등도 완전히 중단됐다. 남북의 공동자산인 북한 내 문화유산을 누구나 직접 가 볼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하며 최근 사진을 중심으로 북한의 주요 문화유산을 소개한다.

(서울=뉴스1) 정창현 머니투데이미디어 평화경제연구소장 = 평양에서 평양-향산고속도로를 통해 북쪽으로 약 80km 달려 청천강을 건너면 바로 영변군이 나온다. 고속도로 옆으로 한적한 영변의 시골풍경이 펼쳐진다.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에 등장하는 '영변 약산의 진달래'로 알려져 있지만 지금은 북한의 대표적인 핵시설이 자리해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곳이 됐다. 조선 말기(1897년)부터 평안북도관찰사영의 소재지였고, 1921년 신의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평안북도청이 자리하고 있었다.

평양-향산고속도로 서쪽 영변군의 초입에 있는 농촌마을의 풍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2.12.© 뉴스1

특히 영변읍성(철옹성)은 고구려 때 처음 쌓은 이래 조선시대까지 서북 방위의 중요한 거점 역할을 하였다. 네 방향이 깎아지른 낭떠러지로, 항아리 입구와 같이 생긴 까닭에 철옹성(鐵甕城)이란 이름이 붙였다. 철옹성(국보유적 제63호)은 고구려 때 처음 쌓은 본성·약산성과 조선시대 때 쌓은 신성·북성 등 4개의 부분 성으로 이뤄져 있다. 본성의 둘레는 14㎞에 성벽의 높이는 6~7m다. 조선 태종실록에는 "약산은 사방이 높고 험하고 바위들이 깎은 듯이 서 있어 하늘이 만든 성이라고 일컬으며, 의주와 삭주, 강계 등 여러 고을 중에서 군사를 모으기에 적당한 곳"으로 기록돼 있다.

평안북도 영변군에 남아 있는 철옹성(영변읍성) 본성의 남쪽 성곽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2.12.© 뉴스1

철옹성은 고려 현종 3년(1012) 강감찬(姜邯贊) 장군이 거란군과 맞서 대승을 거둔 요새였고, 임진왜란 때는 선조가 피난을 와 3일간 머문 곳이기도 하다. 현재 철옹성 본성의 남쪽 성벽과 남문이 잘 남아 있고, 약산의 서쪽기슭의 서운사(棲雲寺)와 동쪽기슭의 천주사(天住寺), 본성 안에 있는 육승정(六勝亭) 등이 유명하다.

영변 철옹성의 정문인 남문은 만노문, 완월문, 고연주성문, 은주루라고도 불린다. 문루 아래층에 만노문(萬弩門), 위층에 고연주성문(古延州城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시대에 영변 철옹성을 쌓으면서 처음 세웠고 이후 여러 차례 보수했다. 1658년(효종 9)에 불타 없어진 것을 이듬해 단층으로 중건했다. 현재의 건물은 1789년(정조 14)에 중층으로 재건한 것이다. 1824년(순조 25)에 홍예문을 보수했고, 이후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문의 위치는 성벽으로부터 40m가량 안쪽으로 들어가 있어서 옹성과 같은 기능을 갖게 됐다.

평안북도 영변군에 남아 있는 육승정 전경. 조선후기 영변대호부 관청 앞 연못 가운데에 세운 정자로, ‘청북제일루’(청천강이북의 으뜸가는 누정)로 일컬어졌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2.12.© 뉴스1

육승정(국보유적 제47호)은 조선후기 영변대도호부 관청 앞에 세운 누정으로, 1728년(영조 4) 주머니 모양의 인공섬인 연못 가운데 있다. 원래 항미정(杭眉亭)이라고 하였는데, 이 정자에서는 천주사의 종소리, 향교에서 글 읽는 소리, 약산 동대(東臺)에서 피리 부는 소리 등 영변의 여섯가지 운치를 다 감상할 수 있다고 하여 '육승정'이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육승전은 '청북제일루'(청천강이북의 으뜸가는 누정)로 알려져 있지만, 다른 정자에 비해 비교적 장식이 없고, 구조도 단순 소박하다. 약산 동대의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천주사(국보유적 제46호)는 1684년(숙종 10)에 철옹성을 수리하면서 중건된 사찰로, 창건 연대는 분명치 않다. 1684년 중건할 때 사찰의 규모가 80여 칸 정도였으나 현재는 보광전(普光殿), 천주루(天柱樓), 망월루(望月樓), 향일헌(向日軒), 요사채 등이 남아 있다. 1949년 김일성 수상과 가족이 인민군들과 함께 천주사를 방문했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중요하게 관리되는 사찰이다.

평안북도 영변군 약산동대 동쪽 기슭에 있는 천주사 입구 천주루 전경. 천주루는 왕이 다시 연변에 오게 되는 경우 숙소로 쓸 수 있게 지은 건물로, 절에서는 보기 드물게 궁전 건축 양식을 띠고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2.12.© 뉴스1
평안북도 영변군 약산동대 동쪽 기슭에 있는 천주사 보광전의 모습.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2.12.© 뉴스1
1949년 10월 김일성 수상이 인민군 대원들과 함께 천주사를 방문해 천주루 앞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4번째 줄 가운데에 김일성 수상이 앉아 있고, 맨 앞줄에 어린 김정일(왼쪽에서 3번째)의 모습이 보인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2.12.© 뉴스1

서운사(국보유적 제50호)는 약산동대 서쪽 기슭에 있으며, 1345년(충목왕 1)에 창건됐다. 지금 있는 건물은 1654년(효종 5)에 중건한 것이고, 1756년(영조 32)에 중수했다. 대웅전과 백화전(白花殿)·응진전(應眞殿)·청운당(淸雲堂) 등 여러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현재 대웅전과 청운당만이 남아 있다.

평안북도 영변군 약산동대 서쪽 기슭에 있는 서운사 전경. 현재는 대웅전과 청운당만 남아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2.12.© 뉴스1

영변에서 북쪽으로 의주까지 가는 동안에는 태천, 구성, 천마, 피현 등을 거쳐야 하는데, 과거 이 지역은 군사적 요청지로 성과 산성 유적이 산재해 있다. 영변의 남쪽에는 고려의 명장 서희(徐熙)가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새로 쌓은 안주성이 있고, 북쪽으로는 1019년의 ‘구주대첩(귀주대첩)’으로 유명한 구주성이 있다.

안주성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서북지역 방어에서 가장 중요한 요충지로 꼽은 곳이다. 그는 "안주는 일도(一道)의 인후(咽喉)가 되며 또한 양곡을 저장한 곳이니 튼튼히 수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안주를 지키지 못하면 평안도 전체가 보전되지 못할 것이다. 대개 안주만 지나오면 청천강 이북은 길이 사방으로 트여서 박천(博川)·태천(泰川)을 지나 삭주(朔州)·창성(昌城)에 이르며, 가산(嘉山)·정주(定州)를 거쳐서 의주에 이르며, 영변(寧邊)·희천(熙川)을 거쳐서 강계(江界)에 이르게 된다. 이른 바 성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곳이 있다는 말은 이런 것들을 이른 것이다. 만일 수천의 군병만 있으면 성을 지킬 수 있고, 이 성만 확보하면 적이 여기를 지나 깊이 들어오지 못한다"라며 안주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안주성에는 서북쪽에 백상루(百祥樓, 국보유적 제31호)가 남아 있다. 청천강은 고구려 때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이 살수대첩을 치른 곳이고, 청천강을 굽어보는 백상루는 외적의 침입 때 전투를 지휘하는 중요한 장대로 기능했다. 백상루라는 이름은 백 가지 절경을 볼 수 있는 누각이라는 뜻에서 붙여졌다고 전한다. 청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니 위치에 서 있는 백상루는 예로부터 관서팔경 중 으뜸으로 꼽혔다. 조선시대의 방랑시인 김삿갓은 백상루에 와보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오는 고려 충숙왕(忠肅王)의 '백상루'라는 시를 자기도 모르게 소리 내어 읊었다고 한다.

"淸川江上百祥樓 청천강가 백상루에 오르니 / 萬景森羅不易收 오만가지 경치를 한눈에는 보기 어렵네 / 草遠長堤靑一面 풀은 기나긴 둑에 한빛깔로 푸르고 / 天低列岫碧千頭 수많은 멧부리는 푸른 하늘에 솟았다." 김삿갓은 백상루의 경치가 하도 좋아 이 집 저 집에서 걸식을 해가며 안주 읍내에서 사흘 동안이나 묵었다고 한다.

평안북도 안주시 안주성 서쪽 장대(將臺)인 백상루 전경. 백 가지 절경을 볼 수 있는 누각이라는 뜻에서 ‘백상루’란 이름이 붙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2.12.© 뉴스1

백상루는 안주읍성이 완성되던 1753년(영조 29)에 고쳐지었으나 6·25전쟁 때인 1952년에 불타버렸다. 현재의 건물은 1977년에 서쪽으로 약 400m 옮겨 복구한 것이다. 진주 촉석루와 함께 조선시대의 대표적 누각이다.

영변 북쪽에 있는 구성시는 고려 초 거란과의 강화로 얻어낸 압록강 동쪽의 서북 연안지역에 설치한 강동6주의 하나로 '구주(龜州)'라 불렸다. 고려시대인 994년에 쌓은 구주성(국보유적 제60호)은 이후 거란의 3차 침입 당시 강감찬 장군에 의한 구주대첩의 무대가 되었다. 진남루(鎭南樓)라는 편액이 달려 있는 구주성 남문(국보유적 제44호)은 구주성의 8개 성문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결구가 우수한 문으로 평가된다. 1702년에 고쳐지었고, 1836년(헌종 2)에 중건됐다. 6.25전쟁 당시 폭격을 맞아 파괴된 것을 1979년에 원형대로 복원했다.

평안북도 구성시에 있는 구주성의 남문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2.12.© 뉴스1
평안북도 구성시에 있는 구주성의 남문 정면 모습. 진남루(鎭南樓)란 편액이 붙어 있으며, 1979년에 복원됐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2.12.© 뉴스1

군사적 요충지인 '강동6주' 인근에는 고구려 때 처음 쌓고 고려와 조선시대에 개축한 여러 산성이 남아 있다. 그중 평안북도 태천 산성산에 있는 농오리산성(籠五里山城, 국보유적 제56호), 피현군 백마산에 있는 백마산성(白馬山城, 국보유적 제58호), 염주군과 피현군 경계에 있는 용골산에 쌓은 용골산성(龍骨山城, 국보유적 제62호), 곽산군 능한산에 쌓은 능한산성(凌漢山城, 국보유적 제61호) 등이 국보유적으로 지정돼 있다. 모두 고구려 때 처음 쌓았고, 고려 때 거란의 침략에 대비해 개축한 산성들이다.

특히 현재 신의주시 바로 남쪽에 있는 백마산성은 고구려 때 쌓은 우마성을 기초로 고려 때 강감찬의 지휘로 내성을 쌓고, 18세기에 외성을 이어 쌓은 산성이다. 1633년 병자호란 때 임경업이 산성을 개축하고 성에 웅거해 청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북으로는 의주, 남으로는 용천과 피현 일대의 사면팔방을 굽어볼 수 있어 군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다. 백마산성은 고구려, 고려, 조선 등 서로 다른 세 시기에 쌓아진 부분성(우마성, 내성, 외성)들로 구성 되어 있어 각 시기의 축성 형식과 방법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역사유적이다.

평안북도 피현군의 백마산성 외성의 홍예문과 성벽 모습. 외성은 조선시대 때 쌓은 성곽이다. 현재 산성에 설치돼 있던 장대와 문루는 모두 파괴돼 남아 있지 않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2.12.© 뉴스1

1019년(현종 10) 거란의 3차 침입 때 구주대첩으로 승리했지만 거란과 여진족의 침입이 계속되자 고려는 1033년(덕종 2)부터 1044년(정종 10)까지 11년에 걸쳐 천리장성(千里長城, 국보유적 제48호)을 쌓았다. 천리장성은 고려 초부터 북방 국경 지대에 축성된 여러 성들을 연결시킨 형태의 장성으로, '고려장성'이라고도 한다. 서쪽의 압록강 하구와 함경남도 동해안의 도련포(都連浦)를 동서로 연결하는 형태로 축조됐으며, 기록상 총 길이는 1,000여 리(약 400km)에 달한다. 지역에 따라 높이가 약 4~7m에 달했다. 현재 신의주 쪽에는 토성 형태로, 함경남도 정평군의 장자령 등에는 석성 형태로 흔적이 남아 있다.

고려 말 사신으로 명나라에 갈 때 의주에 도착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는 "의주는 우리나라 문호(門戶)여서 예로부터 중요한 관방(官方)이로세. 장성(長城)은 어느 해에 쌓았는가. 꾸불꾸불 산언덕을 따랐네"라고 했다. 당시까지 의주지역에 고려장성이 확연히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때 현재의 신의주지역부터 함경남도 동해안까지 이어 쌓은 천리장성(고려장성)중 의주 인근의 토성 모습. 일제강점기 때 촬영된 사진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0.12.12.© 뉴스1

백마산성과 천리장성을 지나면 의주읍이 나온다. 의주는 예부터 한반도의 서북쪽의 관문으로 조선 제1의 무역도시였다. 조선시대 때 조선의 연행사(燕行使)들은 의주와 구련성(九連城) 사이의 압록강을 건넜다.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압록강을 건너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물살은 매우 급한데 뱃노래가 일제히 터져 나왔다. 사공이 힘들인 공역으로 배가 마치 번개처럼 빨리 달리니, 갑자기 정신이 아찔하여 하룻밤을 지낸 듯싶었다. 저 통군정의 기둥과 난간 그리고 헌함(軒檻)이 팔면으로 빙빙 도는 것 같고, 전송 나온 사람들이 아직까지 모래펄에 섰는데 마치 팥알처럼 조그마하고 까마득하게 보인다."

조선시대 때 의주군은 현재의 삭주군·천마군·피현군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일제강점기까지 의주읍 일대에 수백채의 한옥들과 의주행궁(行宮), 그리고 관아들이 남아있었지만 6·25전쟁 당시 의주폭격으로 거의 다 사라졌다. 현재는 관서팔경 중 하나인 통군정(統軍亭, 국보유적 제51호)과 의주읍성 남문(국보유적 제52호)이 남아 과거 역사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평안북도 의주읍성의 북쪽 장대인 통군정의 측면 모습.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2.12.© 뉴스1
일제강점기 의주읍성과 시가지 전경. 오른쪽 멀리 남문이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0.12.12.© 뉴스1

통군정은 의주읍성에서 제일 높은 압록강 기슭 삼각산(三角山) 봉우리에 자리 잡고 있고, 서북방위의 거점이었던 의주읍성의 북쪽 장대(將臺)로서 군사지휘처로 쓰였다. 통군정에 올라서면 의주성의 옛 성벽이 눈앞에 보이고, 아래로는 압록강의 푸른 물 가운데에 점점이 떠 있는 여러 섬들이 굽어 보인다. 서쪽으로는 멀리 신의주·용암포(龍巖浦) 일대가 바라보이며, 남쪽으로는 '의주금강(義州金剛)'으로 불리는 석숭산(石崇山)과 백마산(白馬山) 일대의 크고 작은 산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와 예로부터 관서팔경(關西八景)의 하나로 꼽혔다. 통군정은 16세기에 개축되고 여러 차례 보수됐는데, 지금의 건물은 6·25전쟁 때 파괴된 것을 전후에 복구한 것이다.

통군정 남쪽으로 보이는 석숭산 자락에는 금광사(金光寺, 국보유적 제53호)가 남아 있다. 조선후기에 중건된 사찰로, 금강사(金剛寺)라고도 한다. 석숭산은 기암절벽을 이루는 봉우리와 우거진 숲, 아름다운 꽃들, 골짜기의 맑은 물 등 자연풍치가 아름다워 의주금강산 또는 금강산이라고도 불렸다. 옛날 중국사신이 의주에 와서 강원도 금강산은 너무 멀어서 가까이에 있는 석숭산에 안내되었는데, 중국 사신은 석승산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천하절승인 강원도 금강산으로 알았고 산의 절경에 찬탄했다 한다. 금광사가 금강가로 불린 이유를 짐작케 한다. 현재 금광사에는 대웅보전과 백화전, 청운당, 만세루, 칠성각, 산신각 등 6개 전각이 남아 있다.

평안북도 의주 석숭산 기슭에 있는 금광사 전경. 첫 건립연대는 알 수 없고, 조선후기에 중건된 사찰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2.12.© 뉴스1

의주 일대는 고구려 때부터 요새로 중요시됐고, 고구려 때 쌓은 의주성은 발해를 거쳐 고려 때에도 북방 방위의 진지로 이용됐다. 1520년에 대대적인 개축 및 확장 공사가 진행되어 기존 성 둘레의 거의 2배가 됐다. 시가지를 둘러싼 성은 둘레 약 8.3㎞이며, 동 서남북에 옹성이 있는 성문들과 장대들이 설치됐다. 현재는 성벽의 일부와 남문이 남아 있다. 평양에서 의주로 들어갈 때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남문 문루에는 '해동제일관(海東第一關)' 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내훈루 또는 장변루라고도 불렸다.

평안북도 의주읍성의 4대문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남문 정면 모습. 통군정에서 남문까지는 1km 정도 떨어져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2.12.© 뉴스1
평안북도 의주읍성의 4대문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남문의 문루 정면 모습. 문루에는 ‘해동제일관(海東第一關)’과 ‘내훈루’라고 쓰인 편액이 걸려 있다. 1990년대 이후 북한이 남문을 수리하면서 새로 써서 걸어 놓은 것으로 보인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2.12.© 뉴스1

조선시대까지 서북의 제일 무역도시였던 의주는 의주읍의 서남쪽에 경의선 철도가 부설되고 새로운 시가지가 형성되면서 신의주에 중심지 지위를 넘겨줬다. 2002년에는 신의주시 일대에 특별행정구 설치가 발표되기도 했다.

2014년 중국은 신의주와 단둥(丹東)시를 잇는 새로운 다리로 '신압록강대교'를 완공했다. 북중관계와 코로나19사태로 개통식이 미뤄지고 있지만, 이 다리가 정식 개통되면 신의주는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맞게 될 것으로 보인다.

평안북도 신의주와 중국의 단둥(丹東)시를 잇는 신압록강대교의 모습. 1943년에 건설된 낡고 좁은 압록강철교를 대체하기 위해 2014년 6차선 도로의 차량전용 대교로 완공됐지만, 현재까지 공식 개통이 되지 않고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2.12.©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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