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여버린다" 협박·야릇한 시선.. 조사표 찢어 던지기도 [탐사기획-위협 받는 '통계 첨병']

박영준 2020. 12. 14.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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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벼랑 끝 통계조사관
최근 3년간 고함·욕설 등 경험 529명
응답자 39% "항상 사고 위험에 불안"
모욕적 언행·성희롱에 무방비 노출
첫 조사 후 "사진 보내달라" 문자에
"어쩜그리 살결이.." 게슴츠레 시선
옷 벗는 남성 피해 집 뛰쳐 나오기도
불응률 높으면 인사고과에 불이익
위험 무릅쓰고 유대관계 유지 애써
35% "사고 위험 통계조사에 악영향"
4차 산업혁명 시대, 복잡하고 어려운 숫자로만 여겨졌던 통계가 이제 막대한 부를 창출한다. 데이터의 홍수 속에서 신뢰할 수 있는 양질의 정보를 담은 국가통계를 찾는 이들도 늘고 있다. 하지만 우리 국가통계 작성 현장의 민낯은 처참하다. 통계조사관들은 성희롱이나 성추행, 폭행, 폭언, 사생활 침해 등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돼 있다. 조사 환경은 갈수록 열악해지고, 개인정보 보호 인식이 커져 통계조사 불응률도 치솟고 있다. 신뢰도와 정확도가 생명인 국가통계에 적신호가 켜졌다. 세계일보는 ‘위협 받는 통계 첨병’을 주제로 5차례 심층 보도한다. 통계조사관 근로 현황 및 처우 설문조사와 심층인터뷰, 감정노동 평가 등은 국내 언론 최초 보도다. 통계조사관의 최저임금·고용불안·차별의 벽, 일당 6만8720원짜리 ‘도급’ 통계조사의 문제점, 코로나19시대 비대면·디지털 조사의 필요성 등도 다각도로 짚어본다.
 
“먼저 욕을 하지요. 왜 귀찮게 하느냐고요. 국가통계 조사한다고 하면 나라에서 해준 게 뭐 있냐면서요. 정치 이야기로 일장 연설을 하고요. 그래도 가만히 듣고 있어요. 문 못 닫게, 발을 문틈에 밀어 넣고요. 그러다가 분이 풀리면 조사를 해주기도 해요. 그런데 욕만 한참을 하다가 얼굴에 대고 삿대질을 하고, 조사표를 찢어서 얼굴에 던져요. 나가라고 밀치고요. 특별한 일이 아니라, 늘 겪는 일이에요.”<통계조사관 A(44·여)씨>

국가통계를 조사하는 통계조사관들이 ‘수시’로 겪는 상황은 이렇다. 폭언은 익숙하고, 성희롱은 비일비재하고, 성추행이나 더한 일이 벌어질 만한 아슬아슬한 상황은 재빨리 눈치 채고 회피하는 ‘노하우’까지 체득했을 정도다.

13일 세계일보 설문에서 최근 3년간 모욕적인 비난이나 고함, 욕설을 경험했다고 응답한 통계조사관은 529명이었다. 신체적 위협이나 폭력을 경험한 조사관은 84명, 성적 수치심을 느끼는 말이나 행동을 경험한 조사관도 무려 122명에 달했다.

이에 반해 통계청이 2018년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조사한 자료를 보면 통계조사관이 경험한 단순폭언은 115건, 모욕성 폭언은 51건, 협박성 폭언은 48건, 조사표 훼손은 27건으로 집계됐다. 안전사고는 성희롱이 3건, 폭력은 없었다. 통계청이 통계조사관들이 실제 조사현장에서 겪는 폭언이나 안전사고 상황 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통계조사는 시작부터 불안감을 안고 시작된다.

통계시스템에서는 특정인이나 특정가정이 아니라 특정가구, 예를 들어 A다세대주택의 101호, B아파트의 201호가 표본가구로 선정되고, 그 집에 사는 불특정인을 조사하는 식이다. 기존에 조사하던 대상자가 이사를 가면, 새롭게 이사 오는 사람이 조사 대상자가 된다. 조사가구에 ‘성범죄자 알림e’에 등록된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조사관들 사이에서 무용담처럼 회자된다. 누가,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지 방문하기 전에는 알 수가 없어서다.

설문에서 통계조사 수행 과정에서 각종 사고의 위험에 불안을 느끼는 정도를 묻는 질문에 38.6%에 해당하는 321명이 ‘항상 불안을 느낀다’, 449명(55.5%)이 ‘가끔 불안을 느낀다’고 답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통계조사관 36명에 대한 세계일보 심층인터뷰에서는 통계조사관들이 현장에서 조사 대상자로부터 겪는 부적절한 연락이나 폭언이나 폭력, 성희롱, 성추행 등의 경험이 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아름다운 ○○씨. 서로 힘이 되면 좋겠습니다’ 첫 조사 이후에 몇 달째 계속 이런 문자가 와요. 답장을 안 보내고 무시해도 아내 몰래 문자 지울 테니 답장을 보내 달라고 하고, 사진을 보내 달라고 하고요. 불응가구 처리를 할 수 있긴 해요. 근데 회수율이 100%니까. 욕을 하고 막 신체적으로 위협을 하고 하는 건 아니니까….”<통계조사관 B(44·〃)씨>

“60대 남성분인데 조사할 때마다 ‘어쩜 그렇게 살결이 뽀얗고 예쁘냐’, ‘우리 며느리도 이렇게 예쁘면 얼마나 좋겠냐’ 하면서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쳐다보는데 기분이 너무 나빠요. 커피 한잔 마시자, 저녁에 맥주 한잔 하자고 하고요. 조사를 계속해야 하니까 친절하게, 농담처럼 넘기지요. 다른 것보다 저를 국가에서 나온 통계조사관이 아니라 여자로 본다는 느낌이 제일 싫어요.”<통계조사관 C(45·〃)씨>

“트렁크는 아니고, 파자마같이 얇은 바지요. 그걸 입고 나와요. 자꾸 들어오라는 걸 한쪽 다리는 신발장에 걸쳐놓고, 다른 한쪽은 거실에 걸쳐놓고 앉은 채로 조사해요. 신발은 안 벗고요. 조사를 한참 하는데 ‘성인이니까 이렇게 남의 집 다니고 하면 다 알 거 아니냐’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민망한 곳을 만지며 옷을 벗어요. 도망치듯 집을 뛰쳐 나왔는데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해요. 이런 일을 겪는 걸 남편이나 가족들이 알까봐 말도 못하고요.”<통계조사관 D(51·〃)씨>

폭언이나 신체적 위협도 일상사다. 쌍욕을 퍼붓고, 주먹을 치켜들고 위협을 하는 것도 무섭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순간들도 있다.
“먼저 조사를 안 하겠다고 해서 돌아왔다가 두 번째 찾아갔어요. 중년 여성이었는데 문 앞에 쪽지를 붙여놓았어요. 볼펜으로 꼭꼭 눌러서 ‘다시 찾아오면 죽여 버리겠다’하는 내용이 욕설이랑 섞여 있는데 그게 그렇게 소름이 끼치더라고요. 그다음부터는 그 집을 못 갔어요.”<통계조사관 E(54·〃)씨>

“가구 방문을 했다가 중학생 정도 되는 아들을 만나서 아버지 계실 때 다시 오겠다고 명함을 남겼어요. 밤늦게 아버지라는 분이 전화가 와서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모르는 사람 집에 들여서 아들을 흠씬 패줬는데 또 찾아오면 또 때리겠다고요. 전화기 너머로 아들 울음소리가 들려오는데 그 소리가 아직 생각나요. 그 집은 다시 못 갔어요. 아들을 제가 위협하는 거니까요.”<통계조사관 F(47·〃)씨>

조사관들이 사고 위험을 무릅쓰고, 두려움과 싸워가며 조사 대상자와의 유대관계 유지에 애를 쓰는 이유는 불응률을 낮추기 위해서다. 조사대상 가구가 정해지면 짧게는 6개월, 길게는 3년까지 계속해서 한 가구를 조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불응률이 높으면 인사고과 등에 불이익이 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불응률을 낮추라는 지침도 수시로 내려온다. 조사를 위해서 위험한 상황 등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지난달 24일 황모(53·여) 통계조사관이 경제활동인구조사를 위해 한 주택 초인종을 누르고 있다. 이재문 기자
조사 환경의 어려움은 통계조사 정확성의 하락으로 이어진다. 통계조사 업무 수행 과정의 각종 사고 위험이 정확한 통계조사에 악영향을 끼치는지를 묻는 질문에 35.1%(285명)가 ‘매우 그렇다’, 58.0%(475명)가 ‘그렇다’고 답했다.

한 통계조사관은 인터뷰에서 “1인 가구나 중년 남성 집 문 앞에서 밤에 혼자서 조사하는 경우엔 될 수 있으면 대화를 적게 나누고 조사를 빨리 끝내려고 한다”며 “10개를 질문해야 하면 5개, 6개만 겨우 물어보고 나오니까 아무래도 부정확한 조사가 나올 수밖에 없다”고 했다.

통계청 관계자는 “통계조사관들이 (안전사고 등을) 공식적으로 보고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알고 있다”면서 “조사관들이 당당하게 조사에 임하도록 교육하고, (조사 방해 등의) 심각한 경우는 법적 조치까지 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종=박영준 기자 yj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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