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재 대신 화성 범인 누명..'20년 옥살이' 윤성여씨 재심서 무죄

권상은 기자 입력 2020. 12. 17. 13:51 수정 2020. 12. 17.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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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발생 32년, 무기징역 확정 30년만에 누명 벗어
17일 오후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재심 선고공판에서 재심 윤성여 씨가 무죄를 선고받고 법원 청사를 나와 축하 꽃다발을 받고 환하게 웃고 있다. /연합뉴스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20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한 윤성여(53)씨가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지난 1988년 8차 사건이 발생한 지 32년, 대법원에서 윤씨의 무기징역이 확정된 지 30년만이다.

수원지법 형사 12부(박정제 부장판사)는 17일 오후 열린 윤씨의 재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경찰 자백진술은 불법 체포· 감금 상태에서 가혹행위로 얻어진 것이어서 임의성이 없고 적법절차에 따라 작성되지 않아 증거능력이 없다”고 밝혔다. 또 “피고인의 자백과 법정 진술은 다른 증거들과 모순·저촉되고 객관적 합리성이 없어 신빙성이 없는 반면, 이춘재의 자백 진술은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증거들과도 부합하여 그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당시 국과수의 범행 현장 체모에 대한 감정결과, 경찰 진술조서 등도 피고인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인정하기에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으므로, 공소사실에 대한 증명이 없어 형사소송법에 따라 피고인에 대해 무죄가 선고돼야 한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특히 “경찰에서의 가혹행위와 수사기관의 부실수사 및 제출된 증거의 오류를 법원이 재판과정에서 발견하지 못해 결국 잘못된 판결이 선고되었고, 그로 인해 20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옥고를 치르면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큰 고통을 겪었을 피고인에게, 법원이 인권의 마지막 보루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점에 대하여 사법부 구성원의 일원으로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또 “오늘 선고되는 이 사건 재심판결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고 피고인의 명예 회복에 보탬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고 덧붙였다.

“피고인은 무죄”라는 주문이 낭독되자 윤씨는 작년 경찰의 재수사부터 재심 청구, 재판 전 과정을 도운 박준영 변호사, 법무법인 다산의 김칠준, 이주희 변호사, 그리고 여러 방청객과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윤씨에 대한 무죄 선고는 이미 예견됐다. 8차 사건을 포함해 30년 넘게 미제로 남아있던 화성, 수원, 청주 일대의 살인사건 14건을 이춘재(57)가 자신의 범행이라고 자백했고, 경찰의 재수사 과정에서도 이춘재가 진범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또 과거 윤씨가 경찰의 불법체포 및 감금, 폭행·가혹행위로 인해 허위 자백을 한 사실도 인정됐다. 유죄의 증거로 쓰인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정서가 조작된 사실도 확인됐다.

특히 이춘재는 지난달 2일 윤씨의 재심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해 “8차 사건 등 화성·청주에서 발생한 총 14건은 내가 진범”이라고 증언했다. 이춘재는 8차 사건 범행 과정에 대해 상세하게 증언했다. 또 법정에서 방청을 하던 윤씨에게 “사죄하겠다”며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검찰도 지난달 19일 결심 공판에서 윤씨에게 무죄를 구형하고 사과했다. 이 때문에 이번 무죄 판결에 대해 검찰도 항소를 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돼 윤씨는 무죄가 확정될 전망이다.

검찰은 당시 “피고인이 이춘재 8차 사건의 진범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히 확인됐다”며 “수사의 최종 책임자로서 20년이라는 오랜 시간 수감 생활을 하게 한 점에 대해 피고인과 가족에게 머리 숙여 사죄한다”고 말했다.

당시 윤씨는 최후 진술에서 “‘왜 하지도 않은 일로 갇혀 있어야 하나', ‘하필 내게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라는 등의 질문을 30년 전부터 끊임없이 던져왔다”며 “그때는 내게 돈도 ‘빽’도 없었지만, 지금은 변호사님을 비롯해 도움을 주는 많은 이가 있다.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춘재 8차 사건은 1988년 9월 16일 경기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가정집에서 박모(당시 13세·중학생) 양이 성폭행을 당한 뒤 살해된 사건이다. 인근의 농기계수리점에서 일하던 윤씨는 이듬해 7월 범인으로 검거됐다. 윤씨의 나이는 당시 21세였다.

그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상소하면서 “경찰의 강압 수사로 허위 자백을 했다”며 혐의를 부인했으나, 2심과 3심 재판부는 이를 모두 기각했다.

20년을 복역 후 지난 2009년 가석방된 윤씨는 이춘재의 범행 자백 이후인 지난해 11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법원은 지난 1월 이를 받아들여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한편 윤씨는 무죄가 확정되면서 ‘잃어버린 20년'에 대한 형사보상금을 받게 된다. 형사보상금은 형사 피의자 또는 형사 피고인으로 구금됐던 사람이 불기소 처분을 받거나 무죄 판결을 받았을 때 국가에 청구하는 보상금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형사보상금은 선고가 나온 그해 최저 임금의 5배 안에서 이루어진다. 19년 6개월간 복역을 한 윤씨는 하루 8시간씩 올해 최저임금(8590원)의 5배를 적용할 경우 대략 17억 6000 만원정도의 형사 보상금을 받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와 함께 국가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도 청구할 수 있다. 지난 2008년 발생한 ‘약촌오거리 사건’의 경우 억울하게 10년 동안 감옥생활을 한 최모(35)씨는 국가와 담당 경찰·검사에게 6억5000만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윤씨는 최근 본지 인터뷰 등에서 “100억원을, 1000억원을 준다 한들 내 인생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 기자님한테 ’20억 줄 테니 감옥에서 20년 살아라' 하면 살 수 있겠습니까. 보상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게 싫습니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한편 경찰은 윤씨에게 무죄가 선고되자 입장문을 내고 “재심 청구인을 비롯한 피해자, 가족 등 관련된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며 “뒤늦게나마 재수사를 통해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을 검거하고 청구인의 결백을 입증하였으나, 무고한 청년에게 살인범이라는 낙인을 찍어 20년간의 옥살이를 겪게 하여 큰 상처를 드린 점 깊이 반성한다”고 밝혔다.

또 “경찰은 본래적‧1차적 수사의 주체이자 인권 옹호자로서, 이 사건을 인권보호 가치를 재인식하는 반면교사로 삼아 억울한 피해자가 다시는 없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겠다”며 “앞으로 내‧외부 심사체계를 필수적 수사절차로 정착시키고 수사단계별 인권보호 장치를 더욱 탄탄히 마련해 수사의 완결성을 높이고 공정한 책임수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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