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광받던 혁신학교, 왜 '결사반대' 대상이 됐나..'성적 부진 학교' 프레임·정책 퇴행에 흔들린 '다양성 교육'

이성희 기자 2020. 12. 17.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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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혁신학교로 지정된 서울의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음악수업 시간에 아이들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다. 혁신학교는 강의 위주에서 벗어나 다양한 체험과 토론을 통한 전인교육을 지향한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경원중 혁신학교 지정 추진
주민 반대로 무산되는 등
도입 10년 만에 위기 맞아

학교 후문 울타리에 ‘결사반대’라고 쓰인 붉은색 띠가 수십개 달렸다. 학교 주변에는 ‘○○○, 나는 너를 죽어서도 잊지 않겠다’며 교장의 실명을 적은 저주인지 협박인지 모를 현수막까지 나붙었다. 코로나19 재확산으로 수도권 지역에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 2.5단계가 적용되기 바로 전날인 지난 7일 밤에는 인근 주민 등 100여명이 교문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혁신학교 지정을 놓고 최근 서울 서초구 경원중학교에서 벌어진 일이다. 결국 학교와 서울시교육청이 손을 들었으며, 경원중의 혁신학교 지정 추진은 없던 일이 됐다.

경원중 사태는 일단락된 듯하지만, 교육계는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혁신학교 정책의 암담한 미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는 것이다. 이번 일은 2018년 12월 송파구 헬리오시티 단지 내 혁신학교 개교를 위해 열린 간담회에서 벌어진 물리적 충돌의 연장선에서 빚어진 일이다.

이후 학부모·주민 반대에 부딪혀 혁신학교 추진이 좌초된 사례는 서울에서만 10건이 넘는다. 주로 강남 지역의 반발이 큰데, 반대 양상도 점점 더 격해지고 있다.

교육 전문가들은 이른바 강남3구에서 촉발된 혁신학교 거부 집단행동이 다른 지역으로 번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획일적인 교육에서 벗어나 창의적이고 능동적인 교육을 하고자 시작한 혁신학교가 도입 10여년 만에 위기에 놓인 것이다. 혁신학교는 어쩌다 ‘기피’와 ‘혐오’의 대상이 된 것일까.

■‘공부 안 하는 학교’라는 오명

혁신학교는 2009년 김상곤 경기도교육감 시절 국내에 처음 도입됐다. 당시만 해도 체험·토론·참여 위주로 수업을 진행한다는 특성 때문에 인기가 많았다. 혁신학교 덕분에 주변 집값이 오른다는 언론보도도 쏟아졌다. 집값 하락을 이유로 인근 주민들이 나서 혁신학교 반대를 외치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최근 혁신학교를 반대하는 현수막에는 해당 학교 학부모 모임뿐 아니라 인근에 있는 아파트 단지 이름까지 모두 나열되곤 한다.

혁신학교에 집값 문제를 운운하는 배경에는 혁신학교의 학력 부진 인식이 깔려 있다. 이때 주로 활용되는 근거가 2016년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다. 혁신고등학교의 기초학력 미달 비율이 전국 평균보다 3배 높았기 때문이다. 수월성 교육철학을 가진 입장에서 아이들을 다그치지 않으니 학업성취도가 떨어진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 통계에는 표본집단에 대한 이해가 빠져 있다고 교육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그간 혁신학교는 농어촌 등 교육환경이 다소 열악한 지역에 주로 지정됐는데, 지역에 따른 학력 차이 등이 반영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입학 성적과 경제 수준 등의 변수를 적용하면 학년이 올라갈수록 오히려 혁신학교의 학업성취도가 높아진다는 반박이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2018년 발표한 ‘혁신학교 성과 분석’ 보고서를 보면, 국어·수학·영어 모두 혁신학교를 경험한 학생의 성적이 일반학교(비혁신학교) 학생들보다 낮았으나 학년이 올라가면서 성장률이 더 높게 나타났다. 이 보고서는 2011년 초등학교 6학년, 2014년 중학교 3학년, 2016년 고등학교 2학년을 대상으로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를 토대로 혁신학교와 일반학교 학생들의 성장유형을 살펴본 것이다.

수업참여도에서도 초6, 중3, 고2의 세 시점에 걸쳐 수업태도가 향상되는 집단은 혁신학교였다.

안혜정 휘봉고 교사(국가교육회의 위원)가 2018년 내놓은 보고서 ‘졸업생이 말하는 혁신고등학교 이야기’를 보면, 학생들은 협력수업과 참여형 수업, 교육과정을 재구성한 수업 등을 의미있었던 교육활동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모든 학생에게 다양한 기회가 공정하게 주어졌으며, 자신감과 자존감을 키웠다는 데 만족했다. 안 교사는 기자와 통화하면서 “혁신학교는 일반학교와 교육과정이 다른 게 아니라 아이들을 존중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민주적 문화가 있다는 게 차이”라며 “아이들이 배움의 즐거움을 느끼면서 성장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혁신학교 졸업생 방혜주씨(22·고려대 3학년)는 “학교에서 수업의 주체가 됐던 활동 경험이 많다보니 공부할 때 나에게 어떤 게 필요한지 체크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계속 던지며 자기주도 학습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수능이 유리’ 강남서 유독 반대

잘못된 ‘학력 부진’ 인식에
‘집값 하락’ 프레임 재생산
정시 확대도 공격 빌미 제공

졸업생들의 만족에도 세간의 평가가 박한 것은 혁신학교에 덧씌워진 각종 프레임 탓이라는 게 교육계 안팎의 중론이다. 진보 성향 교육감들이 도입을 주도하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교사들이 적극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념적 낙인이 찍혔다. 학교생활을 즐기는 아이들이 늘고 있는 성과는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보수정권이 들어선 후에는 상위권 대학 진학률 같은 성과가 입증되지도 않았는데 과도한 예산지원을 받고 있다는 공격을 받아왔다. 안 교사는 “교육 그 자체로 보지 않고, 정치적인 색깔을 입혀 진영논리로 몰아간 것”이라고 말했다.

프레임은 또 다른 프레임을 재생산한다. 집값 하락이 대표적이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 소장은 “집값이 모든 것을 삼킨 것이다. 교육에서 새로운 실험도 하지 못하게 하는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라고 말했다. 최 소장은 “사실 학군이 아닌 개별 학교(의 변화)가 집값을 좌우하지는 않는다”며 “강남 집값이 비싼 것은 학군뿐 아니라 교통 등 다른 인프라가 좋아서다. 교육이라는 한 가지 변수로만 (향후) 집값을 따질 수는 없다”고 말했다.

강남에서 유독 혁신학교 반대가 거센 이유에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강남의 한 공인중개업소 관계자는 “강남에서는 학군이 그냥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명문(학교)이라는 것은 전통이 있냐 없냐, 선배가 있냐 없냐 같은 졸업 이후 인적 네트워크의 문제”라며 “혁신학교는 실험적인 것 아닌가. 과거와 다른 교육과정을 뜻한다. 이들과의 단절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극렬히 반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정책 퇴행도 혁신학교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문재인 정부는 2023학년도까지 서울 주요 대학의 정시 비중을 40%까지 확대하도록 했다. 정시 확대는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이 좋은 집단에 유리한데, 지방보다는 서울에 사는 학생들의 수능 성적이 높게 나온다. 사교육 의존도가 심해져 서울에서도 강북보다는 강남이 유리하다. 이런 상황에서 입시에 집중한 암기 위주의 문제풀이식 수업이 아니라 다양한 체험·토론을 하는 혁신학교를 반길 리 없는 것이다. 전경원 전 전교조 참교육연구소장은 “뿌리를 내리던 혁신학교가 정시 확대 발표 이후 더 위축된 상황”이라고 말했다.

■“혁신학교 학력 데이터 축적을”

교육청, 양적 확대에만 치중
학부모 설득 노력에는 소홀
“학력저하론 적극 반박해야”

혁신학교에 대한 반발이 갈수록 거세지는 데는 혁신학교의 양적 확대에만 치중한 채 학부모·주민 설득 노력을 게을리했던 교육당국에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취임 이후 줄곧 혁신학교 확대 정책을 펴왔다. 올해 3월 기준으로 서울에만 226개교(초 169개, 중 43개, 고 14개)가 있다. 이를 2022년까지 250개로 늘리겠다는 게 조 교육감의 계획이다.

일반학교가 혁신학교로 전환하는 과정은 비교적 간단하다. 학교 구성원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진행한 뒤 학부모나 교원의 50% 이상 동의를 얻어 학교운영위원회 심의 절차를 거쳐 교육청에 심사를 신청하면 된다. 지난해까지는 신설 학교의 경우 교육감이 혁신학교운영위원회와 협의해 직권으로 지정할 수도 있었다.

송경원 정의당 교육분야 정책위원은 “신설 학교의 혁신학교 지정을 교육감 직권으로 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실적주의의 폐해”라며 “혁신학교 숫자는 늘었을지 모르지만, 지난 10여년간 (혁신학교를 경험한) 학부모·학생의 입소문은 나지 않았고 (학업성취도가 아닌) 혁신학교의 성과라고 내세울 만한 데이터도 축적하지 못하는 등 내실이 없었다”고 말했다.

혁신학교가 최초 도입된 경기도에서도 혁신학교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경기도교육청이 지난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도민 10명 중 8명이 혁신학교를 전혀 모르거나 이름 정도만 들어봤다고 답했다.

교육당국이 혁신학교 지정에 앞서 학부모·주민들을 설득하는 노력을 소홀히 했다는 비판도 있다. 학교 구성원의 동의를 얻기 전 설명회를 진행해야 하는데, 설명회는 연수(강의) 및 질의·응답이나 가정통신문 안내와 온라인 매체를 활용한 질문 등 학교에서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혁신학교 지정 절차 마무리 단계에서 ‘제대로 된 의견 수렴 과정이 없었다’는 민원이 쏟아지는 것이다.

경원중의 경우 지난 8월 교직원 연수와 학부모 회장단 간담회, e알리미를 통한 온라인 설명회를 실시했다. 교원과 학부모 동의율도 각각 80%, 69%에 이른다. 그러나 이 학교의 한 학부모는 “해당 공지를 본 기억조차 없다”며 “혁신학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팽배한 상황에서 좋은 모델이나 구체적 설명도 없이 어물쩍 넘어가려고 한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지정 철회가 반복되고 있는데도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교육당국을 질타하는 목소리도 있다. ‘혁신교육을 지지하는 교사·학부모·시민 3465명 및 단체’는 성명을 내고 “서울시교육청은 학교의 정당한 교육적 선택이 존중받을 수 있도록 불법적으로 침해하는 위법 행동에 대해 강력하게 대응하고 이런 사안이 재발하지 않도록 예방 조치를 강구하라”고 밝혔다.

이범 교육평론가는 최근 출간한 <문재인 이후의 교육>에서 “전국 어디에서든 혁신학교로 지정하려면 반대론이 고개를 들 테고, 이들은 동일한 논리와 근거를 동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학력저하론을 실증 자료를 들어 반박함과 아울러 혁신학교와 비혁신학교를 비교할 수 있는 학력 데이터를 안정적으로 축적해야 한다”며 “혁신학교도 기초학력 보장을 위한 대응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성희 기자 mong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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