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종류의 독감 다 잡는 '무적의 백신' 현실화

이영완 과학전문기자 입력 2020. 12. 18.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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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인체 대상 임상서 효능 입증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이 전 세계에 대유행하면서 매년 찾아오는 독감(인플루엔자) 바이러스도 코로나처럼 치명적인 형태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심지어 코로나와 독감이 같이 퍼지는 트윈데믹(twindemic·동시 대유행)까지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머지않아 최소한 독감에 대한 걱정은 사라질 것으로 기대된다. 모든 종류의 독감 바이러스에 효과가 있는 범용 백신이 개발돼 처음으로 인체 대상 임상 시험에서 효능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이론상 한 번 범용 독감 백신을 맞으면 면역력이 몇 년씩 지속된다. 백신 접종 횟수가 크게 줄어들 수 있는 것이다.

게티이미지뱅크

미국 마운트 시나이 아이칸 의대의 플로리언 크레이머 교수 연구진은 지난 7일(현지 시각) 국제 학술지 ‘네이처 메디슨’에 “모든 종류의 독감 바이러스에 효과가 있는 범용 백신을 개발해 임상 1상 시험에서 기존 독감보다 부작용이 적고 강력한 면역반응을 유도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변이 많은 돌기 머리 대신 줄기 공략

연구진은 51명에게 범용 백신을 주사해 1명을 제외하고는 부작용 사례가 없었다고 밝혔다. 백신을 접종받은 사람은 가짜 약을 주사한 15명보다 훨씬 많은 항체가 생성됐다. 면역반응이 유도된 것이다.

임상 1상 시험은 안전성만 시험한다. 하지만 연구진은 별도의 동물실험으로 효능도 확인했다. 백신을 맞고 생성된 항체를 생쥐에게 투여하고 일부러 독감 바이러스에 노출시켰다. 항체를 투여한 생쥐는 다른 생쥐보다 체중 감소가 덜 나타나 독감에 대한 면역력이 형성됐음을 입증했다.

크레이머 교수는 “모든 종류의 계절 독감에 대비할 수 있는 백신을 개발해 인체에서 시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임상 2, 3상에서도 백신의 효능이 계속 확인되면 매년 독감 백신을 맞지 않고 몇 년에 한 번만 맞아도 된다”고 밝혔다.

백신은 독성을 없앤 바이러스를 인체에 주사해 면역반응을 유도하는 원리다. 바이러스를 한 번 경험한 인체는 실제 바이러스가 침입하면 바로 면역 단백질인 항체를 분비해 감싸 버린다. 항체가 결합한 바이러스는 다른 세포에 감염되지 못하고 다른 면역세포의 공격을 받는다.

독감 백신 접종으로 생산되는 항체는 독감 바이러스의 표면에 있는 돌기인 헤마글루티닌에 결합한다. 헤마글루티닌은 인체 세포에 결합해 바이러스의 침투를 돕는다. 항체가 여기에 결합하면 세포 침투가 차단된다.

◇조류와 인간 바이러스 섞은 키메라 백신

백신이 유도하는 항체는 주로 헤마글루티닌에서 버섯처럼 두드러진 머리 부분에 결합한다. 문제는 돌기의 머리 부분이 돌연변이로 인해 해마다 달라진다는 점이다. 매년 새로 백신을 개발해 접종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작년 접종한 독감 백신은 올해 독감 바이러스에는 효과가 없다.

크레이머 교수 연구진이 개발한 범용 백신은 헤마글루티닌 돌기에서 머리 대신 그 아래 줄기에 달라붙는 항체를 생산하도록 유도한다. 줄기는 머리보다 돌연변이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종류가 다른 독감 바이러스라도 헤마글루티닌의 줄기는 거의 같다. 따라서 줄기에 달라붙는 항체는 모든 종류의 독감 바이러스에 효과가 있는 셈이다.

밴더빌트 의대 백신연구소장인 제임스 크로 교수는 사이언스지 인터뷰에서 “독감 바이러스의 돌기 줄기 부분에 대한 항체가 모든 종류의 바이러스를 막을 수 있다는 가설을 시험한 엄청난 결과이자 범용 백신을 위한 중요한 첫걸음”이라고 평가했다.

범용 백신은 그동안 많은 연구자가 도전했지만 개발이 쉽지 않았다. 인체가 헤마글루티닌의 머리 부분에 대해 강력한 면역반응을 보여 줄기에 대한 면역반응이 희석됐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이른바 ‘키메라 백신’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신화에 나오는 키메라가 여러 동물의 몸이 섞인 것처럼 각기 다른 바이러스의 돌기를 섞었다는 의미다.

연구진은 돌기의 머리 부분은 조류인플루엔자(AI) 바이러스에서, 줄기는 사람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서 각각 가져와 둘을 합쳤다. 이를 인체에 주사하면 항체가 머리 부분에는 별로 달라붙지 않고 줄기에만 몰린다. 크레이머 교수는 “인체는 낯선 조류 독감 바이러스의 돌기 머리 부분은 지나치고 익숙한 사람 독감 바이러스의 돌기 줄기에 대해서만 강력한 면역반응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낙타과 라마의 항체도 범용 백신 후보

안데스산맥에 사는 낙타과 동물인 라마도 범용 독감 백신 개발에 활용될 수 있다. 백신은 인체가 스스로 병원체에 대항할 항체를 생성하도록 유도한다. 만약 인체가 스스로 항체를 만들지 못하면 세포 배양으로 대량생산한 항체를 주입해 인위적으로 면역력을 제공할 수 있다. 과학자들은 최근 라마의 항체가 범용 독감 백신이 될 수 있음을 확인했다.

라마의 항체는 크기가 인간 항체의 4분의 1에 불과해 나노 항체로 불린다. 크기가 작은 만큼 주사 대신 바로 호흡기로 흡입할 수 있다. 호흡기 질환 치료에 안성맞춤인 것이다. 유사시 병원에 가지 않고도 환자가 직접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미국 스크립스 연구소의 이언 윌슨 박사 연구진은 지난 2018년 사이언스지에 라마의 나노 항체 4종류를 하나로 묶어 생쥐에게 주사했더니 사람을 공격하는 A형과 B형 독감 바이러스 60가지를 모두 막아냈다고 발표했다.

사람 항체는 원래 헤마글루티닌의 머리에 주로 달라붙지만, 덩치도 커서 돌기 줄기까지 잘 들어가지 못한다. 연구진은 대신 크기가 훨씬 작은 라마의 항체로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즉 마운트 시나이 의대 연구진이 생물학적 방법으로 범용 백신을 구현했다면, 스크립스 연구진은 물리적 방법을 택한 것이다.

과학자들은 라마의 소형 항체로 코로나 치료제도 개발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머지않아 모든 독감 바이러스는 물론이고, 코로나 바이러스까지 듣는 명실상부한 범용 백신, 항체 치료제가 등장할 수 있다고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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