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주로 배고픔 달랜 고흐, 유일하게 팔린 유화도 '포도밭'

2020. 12. 19.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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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집시 화가 빈센트 반 고흐
구원의 장소라 믿은 파리서 좌절
술에 의지, 밤새 마시는 생활 지속
디오니소스적 삶 살다 건강 해쳐
"싸구려 와인 너무 마셔 위장 약해져"

와글와글
반 고흐 생전에 유일하게 팔린 유화인 ‘아를의 붉은 포도밭’, 캔버스에 유채, 73 x 91㎝. [푸슈킨미술관]
빈센트 반 고흐라는 이름을 들으면 첫사랑의 기억처럼 아련함이 배어 온다. 세상으로부터의 인정에 목말라하고 작품이 팔리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려 하자 불편해하며 밀쳐내고 도망갔던 사람이다. 관계에 서툴렀던 그는 언제나 탈출을 꿈꿨다. 파리 오르세미술관에는 방랑자로서 그의 의식을 들여다볼 수 있는 그림 한 점이 걸려있는데, 아를 시절 그린 ‘집시 가족의 유랑마차’다.

그림처럼 그는 한 명의 외로운 집시였다. 네덜란드 브라반트 지방에서 태어나 파리 북쪽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37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한 군데 정착하는 법이 없었다. 초기 작품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렸던 뉘넌, 헤이그, 암스테르담, 브뤼셀, 안트베르펜 등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도시와 농촌과 탄광지역을 두루 방랑했다. 1873년 5월 스무 살의 나이에 런던의 화랑 직원으로 떠나는 빈센트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 보자.

파리 시절 자화상 35점 중 25점 그려

“월요일 아침 나는 파리로 떠난다. 브뤼셀을 2시 7분에 지난단다. 가능하다면 역전으로 나와 주렴. 그렇다면 나에게 큰 기쁨이 될 거야.”

이국의 기차역 플랫폼에서 만나자는 손편지는 얼마나 낭만적인가. 위대한 화가이기에 앞서 그는 끊임없이 손편지를 썼던 작가였다. 그가 생전에 주고받은 편지 중 현재 보존된 것은 903통, 이 가운데 그가 보낸 것은 820통인데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가 658통으로 압도적으로 많다.

편지 속에는 작품 드로잉과 여행 풍경 등도 함께 그려서 보냈다. 빈센트는 동생이 보낸 편지들을 읽은 뒤 대부분 불태워 버렸지만, 동생은 형에 관한 것들이라면 뭐든지 버리지 않고 모아 두었다. 그 결과 암스테르담 반 고흐 박물관이 편지와 작품을 함께 묶어 6권짜리 서한집을 발간할 수 있었다. 빈센트의 잦은 여행과 편지가 가능했었던 것은 19세기 후반 급속히 확장된 유럽의 철도 덕분이다. 손편지에는 예술 얘기와 함께 생활비 하소연이 가장 많다. 화가가 된 직후인 안트베르펜 시절 편지 중 일부다.

“간절히 네게 바라는 게 있다면 제발 편지 쓰는 것을 미루지 말고 많든 적든 네가 가진 것을 보내 달라는 거야. 하지만 문자 그대로 내가 정말 배고프다는 것을 알아다오.”

동생은 화상으로 일하며 본인도 넉넉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그때마다 돈을 보내주곤 하였다. 테오는 후원자였으며 거의 유일한 소통 창구였다. 원래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려던 빈센트는 뒤늦게 전업작가를 선언하고 동생이 일하던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왔다. ‘파리는 나의 구원’이라고 외쳤던 고흐는 점차 좌절하기 시작했다. 그림이 잘 팔리는 기존 인상주의 화가들과 대비해 자기와 친구들을 가리켜 자조적으로 ‘작은 거리(Petit Boulevard) 화가’라 불렀다. 상처받은 자의식은 자화상과 알콜에 빠지게 만든다. 그가 평생 남긴 35점에 이르는 자화상 가운데 최소한 25점 이상은 파리 시절에 그린 것이다.

파리의 카페는 보헤미안의 상징. 이곳에서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커피와 담배, 싸구려 와인, 독한 술 압생트에 중독되어 갔다. 물랭루주의 화가 툴루즈 로트렉을 만나면 둘이서 밤새 많은 술을 마시곤 했다. 고대 그리스의 아폴론처럼 조화와 규율의 삶을 살았던 그는 파리에서 광기와 파괴, 혼돈을 특징으로 한 디오니소스적 삶으로 뒤바뀐 것이다. 디오시소스는 포도주의 신이기도 하다. 동생 집에 얹혀살면서도 그는 친구들을 데려와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치우지도 않았다. 결국 동생과 헤어져 남쪽 아를로 내려가는 이유가 되었다.

“이 빌어먹을 건강만 문제없다면 두려울 게 하나도 없겠다. 그러나 파리에 있을 때보다는 훨씬 좋아졌다. 내 위장이 너무 약해진 것도 그곳에서 싸구려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신 탓이지. 여기에도 싸구려 포도주가 많지만 아주 조금밖에 마시지 못한다.”

1888년 5월 1일 동생에게 쓴 편지다. 포도주는 가난한 예술가의 배를 든든하게 해 주고 기분도 취하게 해 주었다. 철도시대가 개막되기 이전 파리와 근교지역은 프랑스에서 가장 큰 와인 생산지였다고 한다. 철도가 활성화한 이후 남쪽 와인에 급속히 경쟁력을 잃게 된다. 빈센트의 그림에도 그려진 것처럼 몽마르트르에는 현재도 포도밭이 있고 연간 2000병 정도의 와인이 생산된다.

몽마르트르 포도밭 와인 연 2000병 생산

“내 그림은 팔리지 않는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언젠가는 알아줄 거라고 생각해. 매우 가난한 생계를 꾸려 가면서 물감에 쏟아부은 모든 것들이 내 그림 안에서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살아났다는 것을 말이야.”

신세를 한탄하며 동생에게 보낸 편지다. ‘저주받은 포도주’였지만 반 고흐 생전에 유일하게 팔린 유화가 ‘붉은 포도밭’이었던 것을 보면 포도주와 포도밭은 그에게 야누스의 두 얼굴이었다. 1888년 8월 11일에 쓴 편지는 마치 힘든 시기를 사는 우리에게 전해 주려는 메시지처럼 들린다.

“건강이 좋다면 하루종일 일해도 빵 한 조각으로 버틸 수 있어야 해. 거기다 담배를 피우고 술 한 잔쯤 마실 체력도 있어야 하지. 이런 조건에서도 그건 필요하니까. 그리고 높은 하늘의 별과 무한함도 분명 느껴야 해. 그럴 때 인생은 참으로 매력적이지.”

손관승 인문여행작가 ceonomad@gmail.com
MBC 베를린특파원과 iMBC 대표이사를 지낸 인문여행 작가.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 『me,베를린에서 나를 만났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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