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한국일보

[김시덕의 이 길을 따라가면] 철도 없는 섬 제주, 90년전엔 기차도 기차역도 있었다

입력 2020. 12. 1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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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생명이다. 형성되고 성장하고 쇠락하고 다시 탄생하는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는다. 우리는 그 도시 안에서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다. 과연 우리에게 도시란 무엇일까, 도시의 주인은 누구일까. 문헌학자 김시덕 교수가 도시의 의미를 새롭게 던져준다.
<6> 제주시 탑동로
제주시 탑동광장. 탑동 앞바다를 매립한 자리 위에 세워졌다. 김시덕 제공

오늘은 제주특별자치도의 북쪽 절반을 차지하는 제주시, 그 중에서도 제주 도심 지역의 북쪽 탑동 바닷가에 놓여 있는 탑동로(塔洞路)를 걷는다. 지도 어플리케이션으로 ‘탑동로’를 검색하면, 서남쪽으로는 서문사거리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라마다프라자에서 동쪽으로 크게 방향을 꺾어 탑동사거리까지 이어지는 길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탑동 사거리에서 동쪽으로 더 나아가서 산지천(山地川)이 바다로 흘러드는 용진교(勇進橋)까지의 임항로(臨港路) 500m 구간도 넓은 의미의 탑동로라고 간주할 것이다.

제주시 원도심 지도. 탑동 광장은 제주 관문인 북쪽 바다와 닿아있다. 제주아라리오뮤지엄

행정적인 관점에서 붙여진 길 이름이 가리키는 범위와, 실제로 사람들이 걷고 생활하면서 느끼는 길의 범위는 서로 다른 경우가 많다. 탑동로와 임항로가 갈라지는 탑동사거리는 제주시 삼도이동과 건입동이 맞닿는 지점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에서 길의 이름은, 설사 그 길이 꺾여지거나 다른 길과 접속하거나 언덕을 넘거나 하천을 건너는 등의 눈에 띄는 변화를 보이지 않더라도 행정구역이 달라지면 서로 다르게 명명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실제로는 하나의 길에 의해서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여 있는 지역이, 각 지자체가 서로 다르게 붙인 길 이름 때문에 마치 무관하게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경우가 많다. 도시에서 길과 그 주변의 사회적 성격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행정적 관점에서 서로 다른 이름이 붙여져 분단된 것처럼 느껴지는 하나의 길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

탑동 테마관광거리 안내판. 해안선과 평행한 탑동로와 임항로가 갈라지는 지점을 탑동사거리라고 부른다. 김시덕 제공

넓은 의미의 탑동로는 제주시의 북쪽 바닷가에 놓인 좁은 해안도로였다. 20세기 들어서 이 길과 나란히 열차가 달렸다. 제주도 순환궤도 철도라 불리는 열차였다. 1929년부터 동쪽 김녕에서 제주를 통과하여 서쪽 협재까지 57㎞ 구간을 달리던 제주도 순환궤도 철도는, 불과 2년 뒤인 1931년에 운행을 중단했다. 워낙 짧은 시기에만 존재하다보니, 이 열차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부분이 많다. 철도가 어디에 놓여 있었는지도 알 수 없고, 공식적으로는 제주・조천・김녕・사수・애월・한림・협재의 7개 역의 이름이 알려져 있지만 더 많은 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 열차를 ‘도록고’라고 부른다. ‘트럭’을 가리키는 일본어 ‘도롯코(トロッコ)’는, 일본에서는 협궤(狹軌) 철로 위를 손으로 밀어서 운행하는 소형 화차(貨車)를 가리킨다. 아마 제주의 ‘도록고’도 이런 소형 화물열차였겠지만, 그래도 20세기 전반의 2년간 제주도는 열차가 달리는 땅이었던 것이다.

용진교 옆에 세워진 '도록고' 차 표지석. 김시덕 제공
도록고는 화석 운반용 무동력 궤도차로, 1920년대 일본인이 운송사업을 벌이기도 했다는 설명이다.

제주도 순환궤도 철도는 이름 그대로 제주도 해안을 원형으로 연결할 계획이었던 것 같다. 만약 이 계획이 실현되었다면 제주도의 이후 모습은 오늘날과 매우 달랐을 것이다. 오늘날 제주는 필자같은 대중교통 이용자들이 돌아다니기에는 매우 불편한 교통 시스템을 지니고 있다. 만약 이 순환철도가 완성되고 역에서 버스가 운행하는 시스템이 갖추어 졌다면 제주나 서귀포 같은 도심지 이외의 제주 구석구석까지 사람들이 쉽게 이동할 수 있었을 것이고, 제주도의 고질적인 문제인 교통 체증도 상대적으로 덜했을 것이다.

지역 주민들은 이 ‘도록고’ 열차가 제주를 달렸음을 전하는 표지석을 2008년에 용진교 다리 옆에 세웠다. 일본의 오키나와와 마찬가지로, 현재는 철도가 없는 섬인 제주에도 20세기 전기의 한 시기에 철도가 달리고 있었다. 열차가 달리는 섬 제주를 그리워하는 주민분들이 탑동로 주변에 계시다는 느낌을 이 표지석을 통해 받을 수 있었다. ‘도록고’가 달리던 시절로부터 40여년이 지난 1970년대 초까지도, 용진교 서쪽의 탑동로는 바닷가에 나란히 놓여 있는 좁은 길이었다. 그러나 탑동로 북쪽의 탑동 바닷가는 1970년과 1980년대 후반의 두 차례에 걸쳐 매립되어 사라졌다. 1970년대는 워낙 군사정부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이어서 제주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공유수면 매립사업이 거의 아무런 저항없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1987년의 6월 항쟁으로 이어지게 될 1980년대 후반의 분위기는 앞서와는 달랐다.

탑동 해안을 매립하는 공사 중인 모습. 출처 : 사진으로 보는 제주100년사
탑동 매립 전 아이들이 해산물을 채취하는 모습. 탑동이 매립되기 전 이에 반대하는 주민 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출처 : 사진으로 보는 제주100년사

제주 탑동 공유수면 매립 반대 운동, 또는 간략히 탑동 매립 반대 운동이라 불리는 이 시기의 저항은 1940년대 후반의 4・3사건(4・3항쟁) 이후 뭍의 중앙 정부에 대해 제주 시민들이 수십 년 만에 조직적으로 맞선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탑동 매립 반대 운동은 “국가주도 제주개발체계에 대한 본격적 비판의 출발점”(장훈교 '제주 탑동 공유수면 매립 반대 운동')이었다. 이때부터 해녀를 비롯한 제주의 일반 시민들은 국가, 도, 시에서 집행하는 각종 토목 사업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그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적극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주민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제주의 정치적 공간에 ‘주민’이라는 새로운 주체가 등장하게 되었다”(정영신 ‘탑동매립반대운동과 그 이후의 30년을 생각한다’).

현재 제주 도심의 동문시장 부근에는 해병대 사령부가 그 일대에 있었음을 알리는 표지석(박종상 ‘제주도 주둔 해병대사령부 위치에 대한 연구’)과 함께 해병대탑이 세워져 있다. 4・3사건 당시 수많은 동료 시민을 잃은 제주 시민들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나타내기 위해 3만 여명이 자발적으로 군에 입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제주특별자치도 민속자연사박물관 제140회 특별전 대한민국을 구한 제주인'). 특히 해병대에 입대한 제주 출신 병사들은 인민군이 도청하지 못하도록 제주어로 암호통신문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이 최근 확인되기도 했다(서울신문 2017년 6월 25일자 ‘6·25전쟁 도솔산 전투서 난데없는 제주어 ‘비밀 작전’‘). 얼마나 많은 제주 사람이 해병대에 입대했는가를 상징하는 사례다.

제주 도심에 자리한 해병대탑과 해병대사령부 표지석. 6.25당시 많은 제주도민들이 해병대에 입대했음을 상징한다. 김시덕 제

대한민국이라는 신생 국가가 탄생한 직후에 생존의 위기에 처했던 제주 시민들의 노고를 상징하는 것이 이 해병대탑이라면, 중앙 정부의 일방적인 행정에 맞선, 그리하여 제주도라는 지역의 정치적 의식을 깨운 이 탑동 매립 반대 운동도 좀 더 성대하게 기념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과문하여 현재 탑동로 일대에서 이 운동을 기려지는 흔적을 찾지 못했다. 현재 탑동로에서는 ‘제주 신항만’ 건설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시 매립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1980년대의 탑동 매립 반대 운동에서 기릴 부분이 있다면 탑동로의 어느 한켠에라도 기념물을 세워 기리고 계승할 부분이 있다면 계승함으로써, ‘제주 신항만’ 건설이 관과 민의 대립이라는 군사정권 시절의 갈등 구조를 회피하게 되기를 기원한다.

탑동 매립 반대 운동에서는 특히 탑동 앞바다를 생활 기반으로 삼던 해녀 분들의 조직적인 활동이 두드러졌다. 매립이 끝나고 나자 이곳에서는 더이상 해녀 분들이 활동하지 않게 되었지만, 당시의 모습을 전하는 도시 화석(都市化石)이 아직 탑동로에 남아 있다. 4차선의 탑동로 바로 남쪽, 탑동로5길과 탑동로13길 사이의 좁은 골목길에 자리한 해녀 강달인 선생의 집이다. 오늘날 제주공항으로 향하는 자동차들이 빠르게 스쳐가는 간선도로로만 생각되는 탑동로가, 한때는 해녀들이 삶의 무대로 삼던 바닷가의 해안도로였음을 이 집은 증언한다. 탑동 매립 반대 운동을 기념하는 시설이 필요하다면, 이 강달인 선생의 자택인 ‘해녀의 집’이야말로 그에 가장 걸맞는 공간일 것이다.

탑동 매립 반대운동에 앞장섰던 해녀 강달인 선생의 집. 김시덕 제공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와 제주도시재생지원센터가 발간한 '리노베이션 스쿨 in JEJU 지역의 미래를 바꾸는 비즈니스를 발명하자'에는 강달인 선생이 이 집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필자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에는 집이 비어있는 것 같았다. 이 책에 따르면 강달인 선생의 집을 리노베이션해서 식당 및 체험공간으로 리모델링할 계획이라고 하니, 이 리모델링 작업을 위해서 잠시 집이 비어져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탑동로의 역사성을 상징하는 이 ‘해녀의 집’이 부디 철거되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활용되기를 바란다.

탑동 앞바다를 매립하는 과정에서 탑동로를 4차로로 확장하면서, 매립된 바다와 탑동로 남쪽 지역은 단절되었다. 현재 탑동로 북쪽의 양쪽 끝에는 사립 미술관과 서부두(西埠頭) 회타운이 자리하고 있어서 어느 정도 활기를 띠고 있지만, 두 지역 중간에는 탑동 광장과 대형 마트, 주차장 등이 위치하고 있어서 걷기에 황량한 느낌을 받았다. 한편 탑동로 남쪽의 중앙로1길・중앙로2길에는 몇몇 맛집이 자리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호텔, 모텔, 클럽 등의 유흥가가 형성되어 있어서 남녀노소 누구나 마음 편히 돌아다니기에는 곤란해 보였다. 탑동로 북쪽의 사립 미술관과 그 일대의 시설을 이용하는 집단과 탑동로 남쪽의 유흥가를 이용하는 집단은 겹치지 않을 것 같았다. “지역민이나 관광객이 도로를 건너 원도심으로 넘어올 만한 매력적인 이유가 현재로선 없는 상황이다”('리노베이션 스쿨 in JEJU').

탑동로 북쪽 제주조선소(오른쪽)와 회타운이 있는 서부두. 김시덕 제공
탑동로 남쪽에 위치한 중앙로 거리. 김시덕 제공

탑동 앞바다가 매립된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는 탑동 광장을 비롯하여 탑동로 남북에 수십 개의 포장마차가 성업했다. 이 포장마차촌은 매립 전부터 탑동 바닷가에 존재하고 있었는데, 매립과 함께 탑동로의 서쪽에 자리한 용담 해안도로로 옮겼다(경향신문 2011년7월11일자 ‘제주 탑동 노점상 3년째 “올해만…”’). 그 후 1990년에 다시 탑동에서 포장마차 영업이 허가되자 그 숫자가 크게 늘어나면서 주변 상인들과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포장마차촌이 용담 해안도로에 있던 시기에는 행정당국에 의해 자신의 포장마차를 철거당한 28세 김준연씨가 분신자살하는 비극이 일어났다(한겨레 1991년9월4일자 '포장마차 강제철거 비관 '억척 삶' 20대 분신자살').

그리고 탑동로 포장마차촌이 철거되는 과정에서는 제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새삼 부각되기도 했다. 1918년 10월 7일 법정사의 김연일(金連日)・방동화(房東華) 등이 주도하여 400여명이 이틀에 걸쳐 무장 투쟁을 일으킨 무오 법정사 사항일운동(戊午法井寺抗日運動)이 있었다. 이들은 일본인 고이즈미 세이신(小泉淸身) 및 장로교도 윤식명(尹植明) 등을 부상입히고 중문순사주재소를 불태우는 등의 투쟁을 전개한 한 뒤 퇴각했다. 이 법정사 항일운동의 배후에 자리한 것이 김석윤이라는 주자학자 출신의 승려였다(한금순 ‘승려 김석윤을 통해 보는 근대 제주인의 사상적 섭렵’).

그런데 그의 막내딸 김복수 선생이 탑동에서 포장마차를 하다가 단속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 다른 노점상들과 함께 철거에 항의하러 시청에 갔다가, 그간 후손을 찾지 못한 김석윤의 막내딸이라는 사실이 밝혀져서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아버지 김석윤은 일본 측의 감시를 받았기 때문에 평생 떠돌아다녔고, 어머니도 세 살 때 사망하는 바람에 김복수 선생은 극빈의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제주불교 2016년8월26일자 ‘광복절 71주년 특집-100주년 앞둔 법정사항일항쟁 재조명 ②법정사 항일항쟁 후손들의 삶 조명’). 이렇듯 탑동로 주변의 포장마차는 탑동 매립의 결과물이면서 비극의 산실이었고, 역사의 증인을 찾아내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또한 포장마차라는 영업 형태에 대해서는 찬반양론이 존재하지만, 이 포장마차촌이 탑동로의 서쪽과 동쪽, 북쪽과 남쪽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로서 기능했음을 여러 현지분들이 증언해주었다.

지금도 이 포장마차촌을 재연해서 탑동로를 관광명소로 부활시키자는 현지분들의 논의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아주 오래전에는 탑동에 포장마차거리가 있었는데 더럽고 보기 안좋다는 이유로 지금은 사라진지 오래이다. 다시 생기면 관광명소가 될텐데 아쉽다.” “예전의 탑동의 분위기를 재연하는 포장마차를 다시 등장시키고 부산의 먹거리 카처럼 50여대의 색다른 개성있는 먹거리장터, 그리고 벼룩시장을 통해 제주민과 관광객의 소통유도." "탑동에 야시장을 만들어 먹거리차, 포장마차, 공연문화,극장들을 포함해서 제주의 바다까지…" 등 탑동의 변신으로 젊는 관광객층을 유도하자는 등의 논의를 볼 수 있다.

제주아라리오뮤지엄(왼쪽)과 갤러리에 전시된 추천장소 안내판. 김시덕 제공

포장마차촌이 사라진 뒤에는 중국의 관광객들이 탑동로 지역에 단체로 관광오면서 한때 활기를 되찾는 듯 했지만, 중국 측이 사드 설치 등의 명분을 내세워 자국 관광객의 제주 방문을 제한하면서 이 또한 시들해졌다. 서울 명동과 마찬가지로, 특정 국가의 관광객만 바라보고 자국민 손님을 홀대한 결과가 최근 몇 년 사이에 이곳 탑동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리하여 2016년부터 제주를 방문할 때마다 탑동로에서 느꼈던 휑한 느낌은 올해 겨울에도 여전했다. 탑동로 서북쪽에서 사립 미술관이 지역의 상업적 활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에 감탄하면서도(모종린 ‘아라리오길, 도시여행자의 제주’), 구조적으로 깊은 연원을 갖는 탑동로의 상업적 침체는 한 개의 사립 박물관이 해결하기에는 버거운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조선시대 자선사업가 김만덕을 기리는 김만덕객주(위)와 업적을 소개하는 안내판. 김시덕 제공

서쪽에서 동쪽까지 차례대로 해녀 강달인 선생의 집, 탑동 매립 반대운동 현장, 제주 최초의 조선소인 제주조선, 탑동로를 달리던 ‘도록고’, 조선에서 가장 유명한 기생이자 자선사업가인 김만덕(金萬德, 1739-1812)을 기리는 용진교 너머 김만덕 객주까지, 조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제주 구도심의 역사와 문화를 상징하는 거리로서 탑동로와 그 주변을 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길이 지나는 지역의 시층(時層, time layers) 즉 역사적 중층성과 사회적 복잡성을 발견하는 것을 좋아하는 필자에게는, 넓은 의미의 탑동로에서 좀 더 많은 사건들이 스토리텔링되어 상업 등 여러 분야에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다음 번에 탑동로를 방문했을 때에는 이번 방문에서 느낀 황량함이 조금은 사라져 있기를 빈다. 마지막으로 이번에 필자를 초청해주신 제주 창조경제 혁신센터 관계자 분들께 감사드린다.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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