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돈내산'인데 수리는 회사 마음대로?

신지민 2020. 12. 25.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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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애프터서비스] 몇 년 지나면 그냥 '무거운 쓰레기'가 되는 전자제품들 2021년에는 고쳐 쓸 길 열릴까
독일의 한 전자제품 재활용 공장에 버려진 전자제품들. 짧은 품질보증 기간과 이후 발생하는 유상 수리비용에 대한 부담 때문에 고쳐 쓰기를 포기하는 소비자가 많다. 로이터
‘버려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tvN 인기 프로그램 <신박한 정리>가 주려는 교훈이다. 집에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비우면서 내 욕망도 비울 수 있다니, 당장 정리를 시작하고 싶다.
그런데 욕망을 버리려고 물건까지 버려야 할까. 2021년 진짜 신박한 정리를 제안한다. ‘마인드 미니멀리즘’이다. 나를 파괴하는 욕망, 욕구, 습관, 집착 따위는 2020년에 묻어두자. 기자들도 소소한 실천을 해봤다. 육식, 플라스틱 빨대, 하루 한 잔의 술, 게임 현질(아이템을 돈 주고 사는 것), 배달음식을 버렸다. 정말로 버리니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버리는 것은 끝없는 투쟁이라는 사실. _편집자주

재택근무 2주차, 회사에 가서 일하고 싶어졌다. 프린터기 때문이다. 대부분 문서는 노트북 화면으로 봐도 문제가 없지만, 분량이 긴 논문이나 자료집은 종이로 봐야 잘 읽혔다. 집에는 프린터기가 없다. 하나 살까 하다가 문득 베란다 창고에 처박혀 있던 옛 프린터기가 생각났다. 대체 언제 집어넣었는지도 기억이 안 났지만, 사용할 당시엔 고장 없이 잘 쓰던 제품이다. 먼지가 쌓인 프린터기를 꺼내 닦았다. 역시나 전원이 켜지지 않았다. 애프터서비스(AS)를 받아야 했다. ‘그냥 프린트 안 하고 말지’라는 귀찮음과 게으름이 나를 지배했지만, 새해부턴 새로 사지 말고 고쳐 써보자고 결심한 터였다.

고쳐 쓰면 20만원, 새로 사면 7만~8만원

가까운 서비스센터를 검색하기 위해 누리집에 접속했다. 2013년 출시된 이 프린터기를 고칠 수 있는지부터 알아봐야 했다. 챗봇과 상담이 가능했다. 프린터기 모델명과 고장 증상을 선택하자 ‘방문 접수하시겠습니까? 출장비가 청구될 수 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떴다. 클릭 몇 분 만에 AS 신청을 했고, 몇 시간 후 마스크를 쓴 수리기사가 집으로 찾아왔다.

요즘 전자제품엔 잘 사용하지 않는 3구 연결선을 찾아 연결한 뒤 전원이 켜졌다. 그러나 여러 번 시도해봐도 프린트는 되지 않았다. 노트북에 프린터 드라이버를 설치하려고 하니, 지원하는 드라이버가 없다고 했다. 호환되는 드라이버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 “자재를 구해서 수리할 순 있어요. 자재비와 공임 등 수리비가 10만원이고, 교체할 토너 비용이 10만2천원이에요. 비슷한 사양의 흑백 프린터기가 7만7천원인데, 새로 사는 게 어떨까요? 대부분 고객은 2~3년 단위로 제품을 교체하더라고요.”

고쳐 쓰면 20만원, 새로 사면 7만~8만원. 고쳐 쓸 이유가 없었다. 오랜 시간 사용하지 않았을 뿐 멀쩡한 기계였는데, 세월이 지나니 꽤 무거운 쓰레기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멀쩡한 제품의 운영체제(OS)를 업데이트했다가 오히려 먹통이 되는 일도 있다. ㄱ은 2019년 스마트폰의 OS를 업데이트했다가 전원이 켜지지 않아 서비스센터에 방문했다. 그러나 무상수리 기간이 지나서 수리비용이 40만원 든다는 답변을 받았다. ㄱ은 “평소 정상적으로 사용했고 업데이트 알람이 떠서 안내에 따라 진행한 것뿐인데, 소비자가 유상으로 수리비를 부담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며 “한국소비자원에 구제 신청을 하려 했지만 강제력이 없는 절차라는 것을 알았고, 당장 불편해 결국 새로 사버렸다”고 했다.

2020년 스마트폰 품질보증 기간 연장

이처럼 소비자는 짧은 품질보증 기간과 이후 발생하는 유상 수리비용 부담 때문에 고쳐 쓰기를 포기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2020년 1월1일부터 스마트폰 품질보증 기간이 연장됐다는 점이다. 2019년까진 스마트폰 품질보증 기간은 1년, 부품 보유 기간은 4년이었다. 그러나 2019년 소비자분쟁해결기준 고시가 개정되면서, 스마트폰 품질보증 기간이 2년(부품 보유 기간은 현행 4년 유지)으로 연장됐다. 다만 배터리는 제품 주기가 짧기 때문에 1년 그대로 유지된다. 노트북 메인보드 품질보증 기간도 1년에서 2년으로 늘리도록 했다. 데스크톱 메인보드가 2년을 적용받기 때문에 같은 수준으로 보장하겠다는 의미다. 그동안 기준이 없던 태블릿피시 품질보증 기간은 1년, 부품 보유 기간은 4년으로 새로 규정했다.

프린터 AS 의뢰에서처럼 비용이 비싼 것도 고쳐 쓰기를 포기하게 한다. ‘단말기 AS 실태조사 및 단말기유통법 개정방향 연구’(2019년 12월)를 보면, 스마트폰 AS를 받은 경험이 있는 1천 명에게 설문조사를 해보니 응답자 68%가 ‘수리를 맡기지 않았다’고 했다. 주요 이유로는 ‘비싼 수리비용’(42.6%)을 꼽았다. 특히 부품별 정확한 AS 비용을 알 수 없고, 이 또한 제품 출고가에 견줘 비싸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액정 수리비는 제품 출고가 대비 약 16~27%, 배터리 교체 비용은 3~6%다. 수리비용이 높은 부품인 메인보드는 출고가 대비 23~33%, 애플 아이폰은 리퍼폰으로 교체할 경우 출고가의 53%를 차지했다.

ㄴ은 최근 스마트폰이 고장나 공식 서비스센터를 찾았다가 수리를 거부당했다. 몇 달 전 사설 수리점에서 수리한 흔적이 있다는 이유였다. ㄴ은 “당시 사설 수리점의 수리비용이 훨씬 저렴해서 선택했는데, 정품을 쓰지 않아 또 고장난 것 같아 공식 센터에 간 것”이라며 “내 돈 주고 내가 산 제품인데, 어떤 제품으로 어떻게 수리할진 제조사의 규칙을 따라야 하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3월 유럽연합 ‘소비자 수리받을 권리’ 법안 통과

대부분의 정보기술(IT) 기업들은 소비자가 스스로 수리했거나, 사설 업체에 가서 수리한 흔적이 있다면 공식 수리를 해주지 않는다는 규칙이 있다. 외국에선 이런 논란 때문에 최근 ‘수리할 권리’를 주장하는 소비자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2020년 3월 유럽연합(EU)에서 소비자에게 수리할 권리를 주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미국 20개 주에서도 관련 법안이 제출된 상태다. 이 법안이 시행되면 스마트폰 등 전자기기의 부품을 사설 업체에서도 살 수 있도록 강제할 수 있다.

염수현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단말기 AS 실태조사 및 단말기유통법 개정방향 연구 보고서에서 AS 활성화 방안을 두 가지 제언한다. 첫째, ‘수리받을 권리’를 제도화해 사설 수리점이 안정적으로 정품 부품을 공급받아 수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다만 사설 수리점의 품질 등의 관리 체계가 미흡하므로 일정 설비와 기술을 보유하면 등록 이후 영업하도록 등록제 도입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둘째, 주요 부품 AS 가격을 공시해, AS 비용까지 고려한 합리적인 소비를 유도하고, 수리비가 출고가의 적정 비율을 넘어가지 않도록 수리비 상한제 적용이 필요하다.

아직 갈 길이 멀고 험하다. 2021년에는 고쳐 쓸 수 있는 길이 열릴까.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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