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살아남았다" 말하는 '평범한' 여성들의 2020년[플랫]

플랫팀 twitter.com/flatflat38 2020. 12. 31.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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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20년은 코로나19의 해이자, ‘성범죄 공화국’의 민낯을 드러낸 한 해였다. 올 초 텔레그램 성착취 범죄를 일컫는 일명 ‘n번방 사건’이 공론화됐고, 3월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이 검거됐다. 아동성착취물 사이트 ‘웰컴 투 비디오’ 운영자 손정우는 1년6개월 형을 살고 7월 풀려났다. 4월과 7월엔 오거돈 전 부산시장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 비위가 각각 고발됐다. 성추행 혐의로 고발당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많은 여성이 무력감을 호소했다. 사회안전망의 부재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절망 속에도 어김없이 연대는 빛났다. n번방을 최초 보도하고 신고한 시민 기자단 ‘추적단 불꽃’을 시작으로 피해자의 편에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불법 성착취 영상을 신고하는 계정 수십 개가 생겨났다 사라졌으며, 가해자들의 엄벌을 촉구하는 광고를 내걸기 위한 모금에는 수천 명이 참여했다.

대학생 이지민씨(22)는 n번방 공론화를 위한 광고 모금에 동참하고, 가해자 처벌을 촉구하는 포스트잇 캠페인에 참여했다. 그는 디지털성범죄 양형기준 시민 설문조사에도 참여했다. 오세진씨(가명)는 박 전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성추행 피해 경험을 되돌아보게 됐다. 취업준비생 박다혜씨(24·가명)는 손정우 석방 이후 관련 기사를 영문으로 번역해 외신에 제보하는 일에 나섰다.

그래픽|이아름 기자

‘#n명의 연대자_n명의 감시자_우리가 여기 있다.’ n번방 사건 이후 등장한 이 해시태그처럼, 성범죄를 근절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여성들의 감시 활동은 계속되고 있다. “올해도 살아남았다” 말하는 ‘평범한’ 여성들의 2020년을 돌아봤다. 이들을 분노하게 한 ‘그날’의 기억과 마음속 변화의 불씨를 댕긴 한마디를 물었다.



‘네 잘못이 아냐, 내 일이 될 수도 있었어.’
침묵 깬 그들 ‘n명의 감시자’가 되다



“코로나19 때문에 오프라인 개강이 미뤄져 부모님 집에 있었어요. 오전에 사이버 강의를 듣고 침대에 누워 있는데, 친구가 청와대 국민청원 링크를 보내줘 n번방에 대해 알게 됐죠.” 이지민씨는 3월19일의 기억을 더듬었다. 이씨는 “부끄럽지만 친구들 중에선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을 가장 늦게 안 편”이라고 말했다.

친구가 보낸 청와대 국민청원 글의 제목은 ‘텔레그램 n번방 용의자 신상공개 및 포토라인 세워주세요’였다. 링크를 열었을 당시엔 7만여명이 서명을 한 상황이었다. “무슨 사건인지도 모르고 청원을 할 수는 없으니까 침대에 누워서 포털사이트에 ‘n번방’을 검색해 기사들을 읽었어요. 국민일보, 한겨레 기사 몇 개를 읽었던 것 같아요. 화장실에 가서 토했어요.”

이씨가 특히 괴로웠던 건 기사에 포함된 가해자들의 메신저 대화 내용이었다. 이씨는 “거리낌 없이 피해자들을 성적으로 모욕하고, 불법촬영물을 공유하는 가해자들의 행위를 보며 기시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대학교 1학년 때 일부 남자 동기들이 여자 동기들을 불법촬영하고, 단체대화방에서 성희롱해 공론화된 적이 있어요. 피해자 중 한 명이랑 친했는데, 얘가 버티질 못하고 1년 만에 자퇴했어요. 그때 생각이 나서 괴로웠어요. 세상은 더 나빠지기만 했다고 친구와 밤새 통화한 기억이 나요.”

그렇다고 마냥 무력감에 빠져 있진 않았다. “가수 황소윤씨를 좋아하는데, 인스타그램에 n번방 사건과 관련해 ‘침묵과 중립은 결국 괴롭히는 사람 편에 서는 것’이란 글을 올린 거예요. 이 글을 보자마자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픽|이아름 기자



이씨는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n번방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을 촉구하는 광고를 내걸기 위한 모금에 동참했다. 계좌로 돈을 이체하는 데는 3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지난 5월 서울 교대역에는 ‘n번방_지켜보겠습니다’ 등의 해시태그가 적힌 지하철 광고가 게시됐다. ‘프로젝트 리셋(ReSET)’이 기획한 포스트잇 캠페인에도 참여했다. 이씨는 1시간가량 집 주변을 돌며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역 곳곳에 n번방 가해자들의 처벌을 촉구하는 내용의 포스트잇을 붙였다.

📌[플랫]불꽃과 리셋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이씨는 “그동안 나 하나 행동한다고 뭐가 바뀔까 하는 생각이 컸다. 강남역 살인사건, 웹하드 카르텔, 버닝썬 사건 등 매번 분노했지만, 사회는 변한 게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달랐다”고 말했다. 그는 8월 추적단 불꽃과 리셋이 공동소송플랫폼 ‘화난사람들’을 통해 진행한 디지털성범죄 양형기준 설문조사를 예로 들었다. 이씨도 이 설문에 참여했다. 유효 응답자 7509명 중 98.8%가 ‘사법부에서 디지털성범죄를 진지하게 여기고 있지 않다’고 응답했다. 99.8%가 ‘디지털성범죄 처벌이 솜방망이라는 주장에 동의’했다. 이러한 의견은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전달됐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9월14일 강화된 디지털성범죄 양형기준안을 확정·발표했다. 이씨는 “밀알을 줍는 심정으로 참여했던 일들이 성과를 낸 듯해 뿌듯했다”며 “앞으로도 그저 분노만 하는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행동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씨는 2020년 소회를 이렇게 말했다. “올해는 정말 버텼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아요. 코로나19 이슈도 컸지만, 특히 제 또래 여성들에게는 n번방 사건 때문에 또 하나의 트라우마로 남은 것 같아요. 함께 목소리를 내준 사람들에게 버텨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 너무 고생했고, 우리 내년에도 잘 버텨봅시다. 남은 가해자들이 처벌받는 모습 끝까지 지켜봐야 하니까요.”

📌[플랫]법원과 시민들이 생각하는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은 달랐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오세진씨는 7월10일로 넘어가는 새벽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카카오톡엔 읽지 않은 메시지가 수십 건 쌓여 있었다. ‘넌 괜찮아?’ ‘뉴스 봤어?’ 절반의 호기심, 절반의 걱정이 담긴 지인들의 문자였다. 이날 새벽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북악산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실종 전날인 8일 박 전 시장의 비서가 박 전 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상태였다. 오씨는 지방자치단체에서 비서로 근무했다.

📌[플랫]지자체장들 인사권 등 ‘제왕적 권력’이 문제

위력형 성범죄로 세상이 떠들썩한 것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오씨는 “이 사건은 유독 일상에 미친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밤을 새우고 출근한 오씨와 마주친 상사는 “나는 오래 살고 싶으니까 불만이 있으면 직접 말해”라는 농담 아닌 농담을 던졌다. 회사 내부에선 “이참에 비서를 다 남자로 바꿔야 한다”는 말도 돌았다. 오씨는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와 그가 속한 직업군이 비난받아야 하는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박 전 시장의 장례를 ‘서울특별시장(葬)’으로 치렀다. 피해자는 정치권에서 피해자가 아닌 ‘피해호소인’으로 호명됐다. 오씨는 “이 사건으로 ‘위력’이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며 “앞서 같은 달 안희정 전 충남지사 모친 장례식장에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 조화가 빼곡한 사진을 봤을 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피해자가 이기기 힘든 싸움을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아빠가 전화를 하더니 ‘넌 혹시 그런 일이 있어도 일 키우지 말고 그냥 조용히 그만둬라’고 하더라고요. 그게 딸한테 할 소리냐면서 대판 싸웠어요.”

📌[플랫]보이지 않는 힘, 위력

오씨는 “며칠은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하고 사람들과 대화하는 게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이유는 모르겠어요. 온라인상에서 벌어진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가 마치 저한테 하는 말 같더라고요.” 오씨는 전 직장에서 임원에게 성추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 동료들에게 하소연해도 돌아온 대답은 “이 바닥이 원래 그렇다”는 말뿐이었고, 결국 회사를 떠난 건 오씨였다. “피해자는 난데, 왜 내가 떠나야 했을까 수십 번 생각했어요. 박 전 시장 사건에서 피해자에게 ‘4년 동안 뭐 하다가 이제 와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잖아요. 정말 철저히 가해자 편이구나.”

그런 오씨에게 힘이 된 한마디는 예상 밖에 한 국회의원의 입에서 나왔다. “저 한 사람만큼은 피해를 호소하고 있는 고소인 편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2차 가해가 현실화한 상황에서 고소인뿐만 아니라 권력관계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거나 하고 있을 많은 분께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는 저 같은 국회의원도 있어야 한다고 알리고 싶었습니다.” 7월13일 류호정 정의당 의원이 YTN 라디오 <노영희의 출발 새 아침>에 출연해 한 말이었다. 류 의원은 앞서 페이스북을 통해 박 전 시장의 빈소 방문 거부 의사를 밝힌 바 있었다. 출근길 택시 안에서 이 말을 들은 오씨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나왔다”며 “마치 내게 하는 말 같았다”고 했다.

지난 7월 서울대 중앙도서관에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사건의 피해자를 지지하는 내용의 대자보와 포스트잇이 부착됐다. 권도현 기자



📌[플랫]추모와 2차 가해 사이

며칠 뒤 오씨는 언론사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SNS에서 비서 재직 중 불합리한 일을 겪었거나 성추행 경험이 있는 사람의 제보를 기다린다는 기자의 글을 봤거든요. 연락해볼까 말까 고민했는데, 류 의원의 말이 떠올랐어요. 제 이야기를 통해 피해자가 침묵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좀 더 알려지고, 피해자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단 생각을 했어요. 피해 사실 중 극히 일부만 기자에게 털어놨을 뿐인데 속이 시원했어요.” 오씨는 8월부터는 심리상담도 받기 시작했다.

오씨는 “2020년은 두 번 다신 되풀이돼선 안 되는 해”라고 정의했다. “그래도 피해자 곁에서 목소리 내준 사람들 덕에 큰 용기를 얻었어요.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지인이 생긴 것도 올해 얻은 것 중 하나예요. 2021년은 피해자가 좀 더 편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정의를 되찾을 수 있도록”



“n번방 사건 때 이미 바닥을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더 내려갈 곳이 있더라고요. 번아웃, 번아웃이 왔던 것 같아요.” 취업준비생 박다혜씨는 7월6일 손정우 석방 당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이날 법원은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 ‘웰컴 투 비디오’ 운영자 손정우를 미국에 강제송환하지 않기로 판단했다. 2시간여 뒤, 손정우는 서울구치소 정문을 걸어나왔다. “점심을 먹으면서 스마트폰으로 손정우가 출소한 사진을 봤어요. 종일 소화가 안 되는 기분이었어요. 아, 이래서 손정우가 필사적으로 한국에 남으려고 했구나.”

📌[플랫]빨간 비디오가 n번방이 되기까지 눈감아준 n개의 순간의 기록

박씨는 “이날 유독 절망적인 뉴스가 많았다”고 말했다. “저녁 무렵엔 문재인 대통령이 안희정 전 충남지사 모친 장례식장에 조화를 보냈단 얘기로 SNS가 시끄러웠어요. 성범죄 가해자들을 이렇게 온정주의로 대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사법부도, 정부도 공범이란 문구가 또 한 번 떠올랐어요. 혼자 있으면 자꾸 안 좋은 생각만 나니까 친구를 자취방에 불러서 같이 잤어요. 둘이서 ‘이제 어떡하면 되지?’라는 말만 반복했던 것 같아요.”

사법부 결정에 분노한 대중은 성범죄자의 사진과 개인정보를 공개하는 ‘디지털교도소’의 등장에 열광했다. 검찰의 범죄인 인도 청구를 기각한 판사의 대법관 자격 박탈을 요구하는 청와대 청원은 반나절 만에 20만이 넘는 동의를 얻었다. 박씨는 “화를 내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친구와 함께 손정우 석방과 n번방 사건을 영어로 설명한 카드뉴스를 만들어 해외 언론사로 제보했다. “무슨 좋은 일이라고 소문을 내고 다니냐는 사람도 있었어요. 나라 망신이라고요. 나라 망신은 이미 손정우와 사법부가 시켰는데, 저희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힘이 빠지기도 했어요.”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 전광판에 지난 9월 ‘웰컴 투 비디오’ 운영자 손정우의 석방을 비판하는 광고가 걸렸다. 케도 아웃 홈페이지, 그래픽|이아름 기자



아동 성범죄에 대한 세계적 관심과 연대를 촉구하려는 움직임은 또 있었다. 익명의 여성들로 구성된 단체 ‘케도 아웃’은 같은 달 손정우의 미국 송환 불발을 규탄하는 광고를 내걸기 위해 모금을 시작했다. 2주 만에 목표액 2000만원의 4배가 넘는 9090여만원이 모였다. 후원에 참여한 4686명 중 박씨도 있었다. “이런 모금을 한다고 설명했더니 엄마도 돈을 보태고 싶다고 했어요. 10만원을 주면서 후원 문구로 ‘내 딸을 위해서’라는 말을 꼭 적어달라고. 더디지만 세상이 변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정말 세대 불문하고 함께 목소리를 내고 있었으니까요.”

광고는 그로부터 약 한 달이 지난 9월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 전광판에 걸렸다.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의 운영자가 400만달러를 벌고도 한국 법정에서 고작 18개월형을 선고받았다. 피해자들이 정의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문구가 적혔다. 이날은 그룹 방탄소년단이 한국 가수 중 처음으로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인 ‘핫 100’ 정상에 올랐단 소식이 전해진 날이기도 했다. “대통령이 방탄소년단에게 축전 쓴 걸 보면서 손정우가 석방되던 날이 떠올랐어요. 한편에선 여성들이 뉴욕에 성범죄자 비판 광고를 실었는데, 이건 보이지 않는 걸까. 속상했죠. 그래도 좌절하기보단 더, 더 열심히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박씨는 올 한 해를 “피곤함”으로 정의한다. “네 앞가림이나 잘하라고 하지만,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일들이 계속해서 벌어졌어요. 코로나19로 취업도 어려워서 몸도 마음도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지쳤어요. 근데 살아야지 뭐 어쩌겠어요. 친구랑 약속했어요. 내가 지치면 친구가 두 배로 떠들고, 친구가 지치면 제가 두 배 더 떠들겠다고요.”

각각의 이야기는 돌고 돌아 ‘고마움’으로 귀결됐다. 얼굴은 모르지만, 함께 분노하고 싸워준 이들을 “잊지 않겠다”고 했다. 2021년은 ‘가해자는 감옥으로, 피해자는 일상으로’라는 이 당연한 구호가 실현되기를. 여성들의 분투로 세상은 분명 변하고 있다.



n번방 최초 보도한 ‘추적단 불꽃’의 2020년



두 명의 대학생으로 구성된 ‘추적단 불꽃’은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최초 보도자인 동시에 최초 신고자다. 2019년 7월 디지털성범죄가 벌어지는 텔레그램 대화방에 잠입해 같은 해 9월 n번방 추적기를 담은 보도로 제1회 뉴스통신진흥회 탐사심층르포 공모전 우수상을 받았다. 이들의 보도가 나온 지 약 6개월 후, 세상은 n번방 사건으로 들끓었다. 올해 3월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이 검거되면서 대중의 이목은 추적단 불꽃에 쏠렸다. 지난 19일 화상 인터뷰로 추적단 불꽃 활동가 ‘불’과 ‘단’을 만났다. 평범한 20대 여성이자 기자 지망생이던 두 사람은 n번방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여전히 디지털성범죄 모니터링 활동을 하며 피해자들을 돕고 있다.

이들에게 2020년은 어떻게 기억될까. 인터뷰는 “어, 기자님도 저랑 비슷한 단발머리네요”라는 불의 밝은 목소리로 시작됐다.

그래픽|이아름 기자



- 지난 3월 n번방 사건이 공론화되면서 일상이 완전히 변했죠.

단 = 취업준비 6개월 차에 접어들던 시점이었어요. 불의 경우엔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고요. 사건이 대중에 알려지면서 계획한 일을 멈추고 사건을 증언하는 데 집중했어요. 저희가 말하지 않으면 자극적인 성범죄 뉴스 중 하나로 그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사람들과 직접 소통하기 위해 유튜브도 시작했습니다. 2020년이 곧 끝나는 시점인데 아직도 그 일에 몰두하고 있네요(웃음).

불 = 3월에 영어학원을 두 군데 다니고 있었어요. 언론 인터뷰가 하루에 여덟아홉 개씩 잡히다 보니 휴원을 했어요. 한두 달 지나면 다시 가겠거니 했는데 아직도 못 가고 있어요. 우선순위로 봤을 때 공부보단 디지털성범죄를 뿌리 뽑는 게 먼저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학원에선 10년이든 기다려주실 수 있다고. 내년에 여유가 좀 생기면 다시 다닐 수 있지 않을까요.

- 2020년 추적단 불꽃에 가장 긴 하루는 언제였나요.

단 =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이 검거되고 일주일 지난 3월25일 수요일이오. 새벽 생방송 라디오를 시작으로 인터뷰가 열 개 정도 잡혀 있었어요. 지하철을 타고 신문사·방송사를 얼마나 왔다 갔다 했는지 모를 만큼 체력의 한계를 느꼈어요. 인터뷰는 끝날 기미도 안 보이고, 하루가 정말 길었죠. 하필 일주일 중 가운데 낀 수요일이라 더 그랬던 것 같아요.

불 = 2019년 7월 처음 텔레그램 성착취 문제를 취재하면서 ‘여자로서 이게 내 일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어요. 조주빈이 잡히고, 목격자로 나선 사람이 저희 둘뿐이다보니 모든 이목이 쏠렸어요. 우리가 이걸 해결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더 커졌어요.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사건을 알리자, 그러려면 인터뷰도 들어오는 대로 열심히 하자, 그랬는데 같은 질문을 하루에 수십 번씩 받는 것도 고통이더라고요. 증언을 하면 할수록 피해 영상의 잔상이 계속 떠올랐어요. 채증본을 언론사에 보내주려고 봤던 영상을 보고 또 보는데,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았어요. 3월 넷째주가 가장 힘들었던 이유예요.

- 책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에서 스스로를 ‘목격자이자 피해자’라고 지칭했어요.

단 =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알게 됐어요. 사건이 저희에게 큰 외상을 남겼다는 걸요. 힘들어도 성범죄 기사들을 본 20대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는 우울감이나 무기력증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수준이 아니었던 거죠. 우리가 목격자이자 피해자라고 증언하는 행위 자체가 이 사건에서 의미가 큰 것 같아요. 결국 우리도 이 폭력적인 영상 앞에선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폭력을 저희와 같은 일반 시민이나 단체, 피해자에게 감당하라고 하는 건 그 자체가 폭력에 일조하는 행위다,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불 = 저는 그 말을 들으면 마음이 아파요. 아, 나도 피해자였구나,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그런 문장이에요.

- 뉴스통신진흥회에 공모할 탐사기획물의 주제로 ‘불법촬영’을 선정한 이유가 뭔가요.

불 = 저희는 기자라는 꿈을 가지고 있었잖아요. 기자라면 사회문제를 보도하는 직업인데, 수많은 사회문제 중 가장 절실히 느꼈던 게 불법촬영이었어요. 취재를 하다 저희 학교 이름이 적힌 알집(영상 압축) 파일을 발견한 적도 있어요. 남 일이 아니라 제 일상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문제였어요. 그런데 가해자 대부분이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나요. 이 문제를 사회가 다뤄야 할 의제로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었죠.

- 조주빈이 검거되고, 지난 5월 n번방 운영자 ‘갓갓’ 문형욱이 검거됐을 때 기분이 어땠나요.

불 = 기쁘긴 했지만, 아직 온전한 성취감을 느낀 적은 없어요. 그 뒤에 오는 씁쓸함과 안타까움이 더 컸어요. 그들이 만들어놓은 피해자들의 영상은 온라인상에서 계속 유포되고 있었으니까요.

단 = 조주빈이 1심에서 징역 40년을 선고받았을 때도 피해자들 생각이 먼저 났어요. 조주빈 이전의 수많은 디지털성범죄 피해자들은 이 판결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 가해자들은 집행유예를 받거나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을 텐데.

- 원래 그다지 친하지 않은 선후배 사이였다고요. 이제는 ‘추적단 불꽃’이란 이름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됐어요. 오랜 시간 함께할 수 있던 동력은 뭘까요.

단 = 우선 뚜렷한 목표의식이 있었어요. 우리의 행동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자 하는 아주 심플한. 취준생이 그럴 시간이 어딨냐는 사람도 있지만, 작은 행동에 세상이 티끌만큼 나아진다면 해야 하는 것 아닐까. 누군가에겐 도움이 될 것이란 희망을 서로 놓지 않았던 것 같아요. 여기에 둘의 식성이 잘 맞았던 영향도 크고요(웃음).

불 = n번방을 목격하고 곧장 경찰에 신고한 것도 이견이 없었어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죠. 이런 부분이 잘 맞아서 지금까지 함께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처음엔 두 사람으로 시작했지만, 텔레그램 성착취 신고 프로젝트를 추진한 ‘리셋’을 비롯해 연대자들이 늘어났어요.

불 = 이분들 덕에 동지애가 뭔지 알게 됐어요. 지치고 힘들 때가 많거든요. 혹시 내가 지쳐서 주저앉더라도 대신해 싸워줄 사람이 있다. 이 생각만으로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몰라요.

- 힘이 되어준 사람이 또 있다면요.

불 = 우리가 이 활동을 하는 게 맞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한 피해자께서 무지개를 찍은 사진을 보내줬어요. (사진을 꺼내 보이며) 엄청 예쁘죠? 하늘에 무지개가 떠서 저희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대요. 아, 우리가 이런 존재가 됐구나, 좋은 걸 보면 보여주고 싶은 존재가 됐구나. 벅차오르면서 울컥했어요. 피해자들이 불꽃이 아니었다면 가해자들이 큰 처벌을 받지 못했을 거라고 말씀하실 때마다 정말 힘이 되고 용기가 돼요.

단 = 저희가 그분들을 통해 힘을 얻을 때가 많아요.

- n번방 사건의 남은 과제는 무엇일까요.

단 = 디지털성범죄는 끝나지 않았어요. 거의 모든 애플리케이션에서 벌어지고 있어요. 4월 국회에서 인터넷 사업자에게 불법촬영물 유통 방지를 의무화한 ‘n번방 방지법’이 통과됐지만, 해외 사업자는 강제할 수 있는 규정이 없다는 한계가 있어요. 국제적인 논의가 필요한 사안이라고 봐요. 또 성착취물을 시청만 해도 3년 이하 징역 또는 벌금을 받는다고 했지만, 시청을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 하는 부분도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하고요.

불 = 스토킹 처벌법과 그루밍 방지법도 입법 촉구를 계속할 생각이에요.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법률적인 지원도 확대해야 하고요. 조주빈이나 손정우는 범죄수익금으로 변호사를 선임하고,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있어요. 반면 피해자들은 국선변호인들이 싸워주고 계세요. 정말 훌륭한 분들이지만, 변호사 한 명이 한 사람만 전담할 수 없는 상황이에요. 일본처럼 범죄수익을 몰수해 피해자 지원에 쓰는 방법도 적극적으로 논의했으면 해요.

- 올 한 해 유독 굵직한 성범죄 이슈가 많았죠. 이로 인해 힘들었던 여성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요.

단 = 어제가 힘들었다고, 죽고 싶었다고 그 기분을 오늘까지 가져가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 화가 나서 잠이 오지 않는 사건을 맞닥뜨렸을 때, 너무 힘들면 좀 쉬어가셨으면 해요. 사건을 해결하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을 믿어보자는 생각으로요. 저도 너무 힘들 땐 방 구조를 바꾸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산책을 하는 식으로 사소하게 해낼 수 있는 일을 해요. ‘저는 뭘 할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도 많이 받거든요. 사건의 심각성과 왜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를 사람들과 대화하길 시도하는 것, 그 자체가 큰 실천이라고 생각해요.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경험을 쉽게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질 때까지는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야 하니까요.

불 = ‘힘들어서 n번방 관련 기사 안 보고 싶어. 내가 나선다고 세상이 달라지겠어?’ 이런 말 정말 많이 들었어요. 저희는 세상이 변한다는 걸 직접 체험했어요. 우리가 나서야 세상이 변한다, 아이들이 지금보다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같이 연대해 싸웠으면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이유진 기자 yjleee@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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