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째 의식불명 택배기사..'심야배송 중단·인력 지원' 약속은?

이유민 2021. 1. 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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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2일 서울 동작구 흑석 시장에서 배송 중이던 택배 기사가 쓰러졌다


■하루 '4시간' 수면…열흘째 의식불명

"지병이 전혀 없는 건강한 사람이었어요. 택배일 시작하고 나서 2년 만에 갑자기 쓰러지게 된 상황입니다."(한진택배 기사 김 모 씨 가족)

연말 배달 물량이 몰렸던 지난달 22일. 서울 동작구 흑석 시장의 한 정육점 앞에서 한진택배 소속 택배기사 40대 김 모 씨가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김 씨는 이날도 어김없이 300개 넘는 물량을 배송하던 중이었습니다.

김 씨의 여동생 미영(가명) 씨가 보여준 병원 진단서에는 '과거력과 신경학적 증상이 없고, 업무 과중으로 하루 4시간 미만 수면하며 일했다'는 의사의 소견이 적혀 있습니다. 두 차례나 뇌출혈 수술을 받은 김 씨는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 씨가 시장에서 쓰러진 뒤 고객들이 보낸 문자들


■ 자정 넘어서도 "배송 완료하고 갑니다." 문자 메시지

"기사님 제발 쾌차해주세요. 그렇게 오래 일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고객 문자 중 일부)

택배 기사가 배달 중에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는 뉴스를 본 고객들은, 김 씨를 걱정하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쓰러진 장소가 김 씨가 평소 배달하는 구역이어서, 안면이 있는 고객들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자를 보낸 것이죠. 하지만 김 씨는 여전히 답을 하지 못합니다. 열흘째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은 김 씨가 이달 안에 세 번째 수술을 받게 된다고 전했습니다.

택배 기사의 과로사 문제가 집중 조명되던 지난해 10월, 김 씨가 속한 한진택배는 밤 10시 이후 심야 배송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김 씨의 휴대전화를 보면, 자정을 넘겨서도 '배송을 완료했다'고 고객들에게 보낸 문자메시지들이 여러 개 남아 있습니다. 업체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죠.

기자와 화상 인터뷰를 하는 CJ대한통운 기사 이연홍 씨


■"바뀐 것 없어요. 우리 대리점엔 아르바이트생 1명 왔는데…."

한진택배 "밤 10시 이후 심야 배송 중단"
롯데택배 "분류 인력 천 명 단계적 투입"
CJ대한통운 "분류 지원 인력 3천 명 투입"

한진택배뿐이 아닙니다. 다른 업체들도 지난해 택배 기사들이 과로를 호소하며 숨지거나 다치자, 잇따라 대책을 내놨습니다. 내용은 조금씩 달랐지만, 과중한 업무를 줄여주겠다는 점에서 핵심은 같았습니다.

하지만 택배 기사들은 현실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지난해 말, 롯데 택배 기사가 아내와 나눈 문자메시지 내용


롯데 택배에서 근무하는 한 택배 기사의 가족은 성탄절 전날인 지난달 24일 "남편이 400개 넘는 물량을 받았다."라며 "고3 아들까지 분류작업을 거들었는데도, 새벽 1시에 들어왔다"고 기자에게 토로했습니다.

아내가 새벽 1시가 넘은 시각, 남편에게 언제 퇴근하느냐고 묻자 1시 반이면 들어갈 거 같다고 답한 문자메시지도 볼 수도 있었습니다.

대표이사가 고개를 숙이며, 대대적인 인력 투입을 약속했던 CJ 대한통운의 사정도 나아지지 않은 듯 보입니다. CJ대한통운 기사 이연홍 씨는 대책 발표 이후, 자신이 속한 대리점에 지원된 인력은 아르바이트생 1명뿐이었다고 말했습니다.

■택배업체들은 "안타깝다"..."시범운영 중"..."투입했지만, 지역별로 차이"

택배회사들에 입장을 물었습니다. 먼저 흑석 시장에서 쓰러진 택배 기사 김 씨가 소속된 한진택배는 밤 10시 이후 심야 배송을 금지한 뒤 물량을 점검해 왔고, 심야에 일하는 인력이 생길 경우 면담까지 했지만 이런 일이 생겨 '안타깝다'고 밝혔습니다. 충원하겠다고 발표한 1,000명 가운데 실제 지금까지 투입한 인원은 300명이라고 했습니다. 내년 3월까지는 약속한 1,000명을 모두 채우겠다고 덧붙였습니다.

롯데 택배 역시 인력을 단계적으로 투입하고 있지만, 시범운영 중이어서 일부 대리점에는 인원 지원을 못 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2월에는 종합대책을 다시 발표해 모든 택배 기사들이 체감할 수 있는 대책을 내놓겠다고 전했습니다.

3천 명을 상자 분류와 지원작업에 투입하겠다고 했던 CJ 대한통운은 이미 2,295명을 투입했다고 취재팀에 밝혀 왔습니다. 다만 지역별로 차이가 있어 인력 투입을 못 한 곳도 있다고 해명했습니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배달 물량이 급증하면서, 많은 택배 기사들은 '일하다 실신할 정도'의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세상에 자신들의 이야기가 알려지면, 무언가 바뀔 거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연말, 그런 기대는 고스란히 실망으로 돌아왔습니다.

화상 인터뷰 내내 남은 배송물량을 걱정하며 조급해했던 CJ 대한통운 택배 기사 이연홍 씨는 새해 소망을 묻는 말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장시간 노동시간을 줄이는 거, 그것만 해결되면 거의 반 이상은 해결되지 않을까요? 저희는 크게 바라는 거 없습니다, 솔직히…."

이유민 기자 (reason@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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