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의 오마이갓] 코로나 한파에 되새기는 법정 스님의 '더위, 추위' 법문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입력 2021. 1. 6. 07:00 수정 2021. 1. 6. 13:29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법정 스님

“추울 때는 너 자신이 추위가 되고, 더울 때는 너 자신이 더위가 돼라.”

지난 2006년 하안거(夏安居·음력 4월 보름부터 석달간 집중적으로 참선수행하는 기간)를 마치던 날 법정 스님이 서울 성북동 길상사 법문에서 옛 선사(禪師)와 제자의 대화를 소개하며 한 말씀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는 출발점에서 문득 법정 스님의 이 ‘더위, 추위’ 법문이 떠오른 것은 해를 넘겨 이어지고 있는 코로나 19 한파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물리적으로도 강력한 추위가 몰려오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겁니다.

2006년, 그 해 여름은 무척 더웠던 모양입니다. 법정 스님이 이 법문을 한 이유도 “더위가 극성이지만 다 한때”라는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스님은 그날 이런 법문을 했습니다. “그 한때에 꺾여선 안됩니다. 세상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어려운 일, 말 못할 사정이 있지만 거기에만 매달리면 안 됩니다. 곧 가을바람이 불면 더위가 자취를 감추듯, 상황을 받아들이면 극복할 의지와 용기가 생깁니다.”

15년 전 법문을 다시 찾아 읽으면서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법정 스님의 말씀을 이것저것 계속 찾아 읽었습니다. 저는 종교를 처음 담당하게된 2003년부터 2010년 스님이 입적하기 전까지 매년 4월 넷째주 일요일과 10월 넷째주 일요일 오전엔 길상사로 ‘출근’(?)했습니다. 법정 스님의 법문을 듣기 위해서였지요. 법정 스님은 2003년부터는 대중법문을 1년에 딱 두 차례, 봄과 가을에만 하셨거든요. 물론 동안거와 하안거에 참가하는 길상사 신도들을 대상으로 법문을 하기는 했지만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는 1년 중 가장 날씨가 좋은 봄·가을 두 차례만 했습니다. 스님 법문의 마지막은 항상 봄에는 ‘신록(新綠)’, 가을엔 ‘단풍’이었습니다. “내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입니다. 나머지는 저 꽃(단풍)에게 들으세요!”라고 마무리하셨지요.

2003년 가을 광주광역시 '맑고 향기롭게' 회원들을 대상으로 강연에 나선 법정 스님. /조선일보DB

스님의 법문은 대개 두 가지 주제, 질타와 위로였습니다. 형편이 좋아져 물질문명에 흥청망청할 때에는 따끔한 죽비를 내리쳤지만 바로 이어서 어렵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속인(俗人)들을 따뜻하게 위로했습니다. ‘더위, 추위’ 법문도 그랬습니다. 스님의 ‘더위, 추위’ 법문은 곧 행복론이었습니다. 스님은 항상 “행복할 때 행복에 매달리지 말고, 불행할 때는 받아들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스님은 법문 때 강조할 이야기 있으면 꼭 두 번, 세 번 반복했지요. 행복론이 그랬습니다. 지금처럼 모두가 어려울 때라면, 법정 스님은 분명 위로를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날부터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 법정 스님의 글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을까?’ 다시 스님의 글을 읽다가 얻은 제 나름대로의 답은 ‘적당한 거리’였습니다. 스님은 1970년대 유신시절 꼿꼿한 글을 쓰다가 자의반타의반 송광사 불일암으로 낙향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법정 스님의 글 대부분은 ‘불일암 발(發)’이었습니다. 스님의 글이 인기를 끌자 불일암까지 ‘팬’들이 몰렸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최소한의 인원 외에는 아무에게도 정확한 거처를 알리지 않았습니다. 저도 모릅니다. 다만 스님의 글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그곳에서 촛불·호롱불로 책 읽고, 채마밭에서 이런저런 채소를 키워 반찬을 삼고, 때로 폭우가 쏟아지면 아궁이에서 물이 솟고... 1970년대 이른바 ‘이농(離農)’이 벌어지기 전까지, 대한민국 인구의 3분의 2 이상이 ‘농업’이던 시절, 익숙했던 풍경이지요.

법정 스님의 미발표 원고 '좌선'. 법정 스님이 생전에 결성한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는 월간 소식지를 통해 스님의 미발표 원고를 게재할 예정이다. /맑고 향기롭게

요즘 말로 하면 이미 ‘셀럽’이었던 법정 스님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던 셈이지요. 스님은 간혹 이런 말도 했습니다. “수행자는 적당한 외로움이 필요하다”고요. 적당한 외로움을 스스로 찾은 덕에 스님은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새해 출근길 지하철에서 스님의 책 ‘아름다운 마무리’를 펼쳤습니다. 불과 몇 장 넘기지 않자 이런 구절이 나오더군요. “아름다운 마무리는 삶에 대해 감사하게 여기는 것이다. 내가 걸어온 길 말고는 나에게 다른 길이 없었음을 깨닫고 그 길이 나를 성장시켜 주었음을 믿는 것이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과 모든 과정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에게 성장의 기회를 준 삶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아름다운 마무리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저는 이 글에서 새삼 ‘마무리는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뿐 아니라 ‘내가 걸어온 길 말고는 나에게 다른 길이 없었음을 깨닫는다’는 부분도 남다르게 느껴졌습니다. 흔히 ‘가지 않은 길’ 때문에 얼마나 후회를 많이 하던가요.

저는 스님이 입적하기 1년 전인 2008년말 인터뷰를 했습니다. 법정 스님 생전의 마지막 일간지 인터뷰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스님은 마지막 유언장과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시 찾아보니 새삼 새겨들을 말씀이 많았습니다. “솔직히 저도 24시간 내내 깨어있지 못합니다. 하루의 5분의 1이나 6분의 1이 될까 말까...” “마무리는 마지막이 아닙니다. 순간순간 마무리하고 새 출발해야 합니다.” “21세기가 됐다고 갑자기 21세기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에서 무엇이 남습니까? 집? 예금? 명예? 아닙니다. 몸뚱이도 두고 가는데. 죽고 난 후라도 덕(德)이 내 인생의 잔고(殘高)로 남는 것입니다.”

당시 인터뷰에서 법정 스님은 인생을 100미터 달리기에 비유했습니다. 지금의 고통이 30~40m쯤에서 만난 허들(장애물)이라면? 60~70m가 남을 걸 안다면 지금 포기할 수 있을까요? 법정 스님은 ‘이 한때’를 극복하자고 했습니다. 사실 함부로 말씀드리기 어려운 일입니다. 엊그제 제가 늘 다니는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았습니다. 이발소 사장님은 “하루 5명쯤 손님이 온다”고 말했습니다. 코로나 이전엔 늘 2~3명은 대기하던 이발소의 점심시간이었지만 그날은 제가 들어가서 이발을 마치고 나올 때까지 다른 손님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벌써 넉 달째 ‘집에서 가져와 세(임차료)를 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발을 마치고 나오자 맞은편 상가 유리창엔 ‘임대문의’ 안내문이 붙고 가게는 싹 비어있었습니다. IMF외환위기, 월스트리트 발(發) 금융위기 때에도 이렇진 않았다고 합니다.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었습니다.

맑고향기롭게 소식지. 이 단체는 올 1월부터 법정 스님의 미발표 원고를 싣는다. /맑고향기롭게

그때 인터뷰에서 법정 스님은 마지막으로 ‘각자의 씨앗’을 이야기했습니다. 누구나 세상에 하나의 씨앗을 가지고 온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당시 스님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그 씨앗에 맞는 땅을 찾아 꽃 피우고 열매 맺어야 합니다. 그런 땅을 찾으려면 준비가 돼 있어야 합니다. 삶은 저마다 자기 그릇대로 풀리게 돼 있습니다. ‘준비 된 대로’라는 뜻이지요. 자신의 씨앗을 잘 가꾸십시오.”

오늘 마지막은 스님의 생전 말투를 흉내내 보겠습니다. 모쪼록 이 혹한을 잘 견디시고 각자 간직한 씨앗을 잘 가꾸세요.

◇조선일보는 매일 아침 재테크, 부동산, IT, 책, 영어 학습, 종교, 영화, 꽃, 중국, 군사 문제, 동물 등 16가지 주제에 대한 뉴스레터를 이메일로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구독을 원하시면 <여기>를 클릭하시거나, 조선닷컴으로 접속해주세요.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