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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1년 평양성 전투 (1)

임기환 입력 2021. 01. 07.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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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114] 660년 9월 초에 백제 원정을 마무리한 소정방이 의자왕을 비롯하여 대신 등 1만 수천 명을 포로로 삼아 귀환하였고, 11월 1일에 당 고종은 낙양궁 남문 측천문에서 의자왕을 꾸짖고 용서하는 등의 전승식을 거행하였다. 기세를 이어 내친김에 당 고종은 고구려마저 병합하려는 의욕이 넘쳤다. 그해 12월 15일에 고구려 원정을 공포하고 글필하력(契苾何力), 소정방, 유백영(劉伯英), 정명진 등으로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백제 원정에서 기벌포 상륙할 때 백제군의 항전 외에는 이렇다 할 변변한 전투 없이 싱겁게 끝나버렸기 때문에 당군의 전력 손실은 예상외로 적었다. 그래서 곧바로 고구려 원정군을 편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당은 백제 원정을 통해서 중요한 몇 가지 전략과 전술을 실험하였다. 무엇보다 13만명의 대군을 바닷길로 한반도 전투 지점에 상륙시킬 수 있는 해상 수송 능력을 확보한 점이 중요했다. 이는 요동을 거치지 않고 고구려 평양성을 직접 공격할 수 있는 새로운 전략을 구사할 수 있음을 뜻한다. 더욱 백제 위협이라는 후환을 던 신라군을 고구려 남부 전선에 투입하여 고구려 방위력을 분산시키고, 동시에 평양성 공격군이 필요한 군수물자 역시 신라의 지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장기전 혹은 겨울철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렇게 전략과 전술에서 당군의 선택지가 많아진 만큼 고구려 원정의 성공 가능성도 높아진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당군은 한반도 내에서 신라군과 연합하여 고구려 공격을 시도하기보다는 독자적으로 고구려 정벌군을 편성한 것이다. 이듬해 661년 1월에 하남(河南)·하북(河北)·회남(淮南) 등 67주에서 모집한 4만5000여 명을 평양도(平壤道), 대방도(帶方道) 군단으로 보내 병력을 보강하였다. 또 소사업(蕭嗣業)을 부여도행군총관(扶餘道行軍總管)으로 삼아 회흘(回紇) 등 여러 이민족 병사로 구성된 군단을 추가하였다.

그리고 4월에 당 고종은 아버지 태종을 본받아 직접 고구려 원정을 나서기 위해 35군이라는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 장수들의 임무를 재배치하였다. 전해인 660년 12월에는 글필하력(契苾何力)을 패강도행군대총관으로, 소정방(蘇定方)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유백영을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편성하였는데, 661년 4월에는 글필하력을 요동도행군총관으로, 소정방을 평양도행군총관으로 변경하고, 임아상 등 여러 장수들을 추가 편성하였던 것이다.

본래 각 군단 명칭에 부여하는 요동도, 평양도라는 이름은 실제적인 진격 경로와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에 그리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데, 이번의 경우는 달랐다. 8월부터 시작된 고구려 원정에서 실제로 글필하력은 요동과 압록강 일대에서 전투를 벌였고, 소정방은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였기 때문에 이들에게 주어진 행군총관의 명칭이 어느 정도 실제성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당 고종의 친정을 전제로 35군이라는 대규모 군대로 편성하였는데, 주위의 만류로 고종이 직접 출정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따라서 애초에 편성된 35군이라는 대규모 군대가 실제로 고구려 원정에 투입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다수의 행군총관들이 평양성 전투에 참여하였음이 기록상 확인되기 때문에 이때 원정군의 규모가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661년 당군의 고구려 원정은 무참한 패배로 끝났기 때문인지 관련 기록이 매우 소략하다. 이 소략한 기사로나마 최대한 당시의 전황을 복원해보자.

661년 4월 이후 편성된 당군의 공격로는 사료상으로 볼 때 크게 2길로 나뉜다. 8월에 평양도행군대총관인 소정방이 거느린 군대는 패강(浿江) 전투에서 고구려군을 깨뜨리고 마읍산(馬邑山)을 차지하여 군영을 만들고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당시 소정방이 거느린 군대의 진공로에 대해서는 어떤 기록도 없다. 다만 정황상으로 볼 때 백제 원정 때 출정한 산동반도에서 출발하여 해로로 대동강 입구로 들어와 평양성을 직공한 것으로 추정한다. 앞서 소정방을 요동도행군총관에서 평양도행군총관으로 변경한 이유도 소정방이 해로로 백제 원정을 지휘한 경험을 중시하였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고구려 장안성 칠성문

한편 요동도행군총관인 글필하력이 이끄는 당군은 9월에 압록강에 이르렀다. 이때 연개소문은 아들 남생(男生)에게 수만 정예군을 주어 압록강을 지키게 하였지만, 마침 압록강이 얼어서 도하한 당군의 공격으로 남생이 이끄는 고구려군 3만명이 몰살당하고 겨우 남생이 빠져나오는 패전을 당했다. 당시 남생은 28세로 전혀 전투 경험이 없었으니 당 태종에게 귀부한 이래 숱한 전쟁터를 겪은 백전노장 글필하력의 상대가 결코 될 수 없었다. 따라서 이 압록강 전투의 패배는 곧 연개소문 가문의 권력 독점이 초래하는 위기의 시작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소정방이 지휘하는 당군이 해로로 고구려 평양성을 직공한 것은 어느 정도 분명하다고 판단되는데, 글필하력 군대의 이동 경로는 불분명하다. 통상 글필하력 군은 육로로 압록강까지 진공한 것으로 보는데, 과연 대규모 당군이 요동의 고구려 영역 안을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통과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든다.

전회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당은 655~659년 사이에 4차례나 고구려 요동 지역을 공격한 바 있으며, 주요 전투 지점인 귀단수와 신성, 적봉진, 횡산 등은 대체로 신성(新城) 일대 및 신성의 방어권역으로 비정할 수 있겠다. 이때에는 당군의 침공에 대응하는 고구려 방어 체계가 작동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661년 당군 공격에 고구려의 요동 방어망이 무력해져서 글필하력 군대가 거침없이 압록강까지 진공하였다는 점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혹 글필하력 군이 오직 압록강 도하를 목표로 빠른 속도로 행군하면서 경로상에 있는 고구려 성 다수를 그냥 지나쳤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전회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645년 당 태종의 침공 때에 요동성-백암성 루트가 당군에 의해 무너진 이후 이 경로의 방어망이 제대로 복구되지 않아서 이 루트를 이용하였을 개연성도 약간은 상정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압록강까지 진공 자체는 혹 가능할 수 있다고 해도 회군할 때에도 아무런 공격도 받지 않을 수 있을까? 즉 글필하력 군은 압록강 전투 이후 곧 본국으로 소환되었는데, 귀환할 때의 상황에서 어떤 전투도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글필하력 군이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육로로 압록강까지 진공했다가 또 무사히 되돌아갈 수 있는 경로는 과연 어디일까?

일단 요하를 건너 요동반도를 통과하는 육상 경로는 앞에서 언급한 이유로 상정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가능한 경로는 바닷길로 요동반도 남단의 어느 지점에 상륙한 뒤에 육로로 압록강 방면으로 진공한 것으로 가정할 수 있겠다. 글필하력 군의 진공로와 관련해서는 648년 4월에 당군의 선봉이 고구려 역산(易山)을 공격하고, 6월에 설만철이 3만명의 본대를 이끌고 압록강 하구의 박작성(泊灼城)을 공격했을 때의 경로 및 상황과 유사하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아마도 글필하력 군의 주요 임무는 압록강 일대를 장악하여 요동 방면으로부터 고구려 지원군을 차단하여 평양성을 고립시키려는 작전으로 추정된다.

한편 당은 6월에 당에서 숙위하던 김인문을 신라에 보내어 문무왕에게 출병을 요구하였다. 이때 무열왕이 병으로 사망하고 문무왕이 즉위한 직후였다. 하지만 문무왕은 당의 요구에 따라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당시 신라 원정군에는 장군 24명이 편성되었는데, 장군 1인당 1500명을 거느릴 경우 이때 동원된 총병력은 3만6000명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8월에 문무왕은 대장군 김유신 등과 더불어 부대를 거느리고 출정하여 남천주(지금의 이천)에 이르렀으며, 웅진도독인 당의 장수 유인궤도 군대를 거느리고 남천주에서 신라군과 합류하였다. 그런데 웅산성(甕山城·대전시 계족산성)에 웅거하고 있는 백제 부흥군으로 인해 신라군의 진격이 어려워졌다. 10월 27일에 이들을 진압했지만, 신라군의 진격은 상당히 지체되고 있었다.

이렇게 남쪽에서 진격하는 신라 군대가 제때에 평양성 공격에 합류하지 못함으로써 당군의 고구려 원정 전략은 틀어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당군의 전략은 백제 원정 때와 마찬가지로 속전속결의 전략이었던 듯하다. 과거 645년 당 태종의 침공 때에도 드러났듯이 요동의 고구려 성을 모두 무력화시키는 전략을 쓸 경우에는 쉽사리 평양성까지 진격하기 어렵다는 점을 깨달은 당은 육로와 해로 양쪽에서 평양으로 직공하고, 남쪽에서는 신라군의 출병을 요청하였다.

즉 압록강 일대를 장악하고 남하하는 글필하력의 군대 및 해로로 평양으로 직공하는 소정방의 군대, 그리고 남방전선에서 북상하는 신라군이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평양성을 동시에 공격하려는 전략이었다. 당시 당 고종이 직접 출정하려 하였을 때 이를 만류한 데에는 황제가 친정할 경우에는 이러한 속전속결의 전략을 구사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백제 원정에서 승리를 거둔 당군은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백제전에서 시도한 바 있는 수도 평양성을 직공하는 속전속결 전략을 구사한 듯하다.

그런데 당군의 이 전략은 곧 어긋나기 시작했다. 9월에 압록강에 도착한 계필하력의 군대는 압록강을 방어하던 남생의 군대를 격파하는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당 고종의 명으로 되돌아갔다. 서부 몽골 일대에 있던 철륵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글필하력은 본래 철륵의 한 무리인 계필부(契苾部) 출신으로 632년에 당나라로 귀순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를 소환하여 안무대사(安撫大使)를 맡겨 철륵의 반란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북상하던 신라군 역시 백제부흥군 때문에 10월에 들어서도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글필하력 당군이 회군하고 신라군의 진공이 중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양성을 포위하고 있던 소정방의 당군은 돌아가지 않고 진영을 구축하고 단독으로 전투를 수행하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너무 쉽게 백제를 굴복시킨 기억에 사로잡혀서일까? 어쨌든 유례가 없는 당군의 처참한 패배가 이제 시작되었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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