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인권의식은 얄팍하고, 수습능력은 참담하다

임민혁 정치부 차장 2021. 1. 8. 03:07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전단法 청문회' 저지 총력전
日 위안부 결의 반대 로비 연상
국제사회 반발 전혀 예상 못 해
인권전문 외교장관은 뭘했나
2007년 톰 랜토스 당시 미 하원 외교위원장이 위안부결의안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는 모습.

톰 랜토스는 우리에게 낯선 이름이 아니다. 2007년 미 의회가 일본 정부에 위안부 문제 사과와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처음으로 통과시킬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당시 랜토스 하원 외교위원장이었다. 위안부 문제가 ‘한·일 간 특수한 과거사’라며 결의안을 무산시키려는 일본의 집요한 로비에 그는 ‘인류 보편적 여성 인권 문제’라는 원칙으로 맞섰다. 로비에 흔들리는 의원들에게는 ‘공개적으로 입장을 묻겠다’고 압박해 이탈을 막았다. 그의 부인 아네트 여사도 피해 할머니들 편지를 받아 의회에 전달하며 여론 조성에 힘을 보탰다. 나치 홀로코스트 생존자라는 경험이 랜토스를 인권 투사의 길로 이끌었다. 그의 헌신과 업적을 기려 미 의회는 랜토스 의원이 타계한 2008년 ‘톰 랜토스 인권위원회’를 발족했다.

랜토스 이름이 다시 소환됐다. 랜토스 위원회가 한국 정부의 ‘대북전단살포 금지법’이 인권,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청문회를 예고하면서다. 이 위원회는 지난 12년간 북한 4차례 포함, 주로 중남미·동남아·아프리카 국가의 인권 침해를 추궁하는 청문회를 144차례 열었다. OECD 국가 중 대상이 된 것은 멕시코 정도다. 그런데 미국의 핵심 민주주의 동맹이자, 세계 13위 경제 대국, 인권변호사 출신이 대통령인 한국 정부가 반(反)인권 행태로 이 위원회의 심문대에 오르게 됐다. 지금 한국은 과거 일본처럼 ‘(남북) 관계의 특수성’ 논리로 청문회 저지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기막힌 역사의 반전이다.

인권, 표현의 자유가 ‘인류 보편의 가치’임은 국제사회의 대원칙이다. ‘민주화’ ‘진보’를 표방하는 현 집권 세력이 이를 모를 리 없다. 이들에게 제3세계에서 벌어지는 인권 탄압, 표현 자유 억압 논란에 대한 입장을 물으면 분명 이 교과서적 답변으로 비판할 것이다. ‘내정간섭’ ‘나라별 특수성’ 등이 인권 후진국의 옹색한 변명이라는 것도 이들이 가장 잘 안다.

하지만 이 정권 사람들은 ‘북한’ 앞에만 서면 완전히 다른 사고 회로를 돌린다. 모든 문제를 북한 입장에서 살피고 이해하려 한다. 인권 탄압, 3대 세습, 핵 개발도 두둔하다 보니 전단 막는 것쯤은 대수도 아닐 것이다. ‘평화를 위한다’는 자기 확신, 또는 최면 때문에 망설임도 없다. “일부 단체의 전시형 살포는 규제할 수 있지만 전단 발송 자체를 불법화하면 안 된다”는 합리적 지적에도 ‘가짜 뉴스’ ‘반평화’ 딱지를 붙인다. 북과 다시 평화 쇼만 할 수 있다면 비판 여론을 잠재우고 표도 얻을 수 있다는 계산도 섰을 것이다. “삐라 해결했으니 북이 보답할 차례”라는 대통령 외교안보 멘토의 말에 그 속내가 드러나 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지난해 12월 CNN 인터뷰 모습. 강 장관은 대북전단금지법에 대한 우려에 대해 “표현의 자유는 중요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여기까지는 지향점의 영역이다. 그 후폭풍을 최소화하는 건 능력의 문제다. 그런데 정부·여당은 전단금지법이 미국은 물론 전세계 자유민주 진영의 반발을 불러올 것이라고는 아예 예측하지 못한 듯싶다. 그러니 국제사회 우려를 불식하기 위한 사전 노력도 전무했다. 뒤늦게 난리를 치니 해결은 못 하고 오히려 문제를 더 키운다. ‘동맹국에 대한 예의 아니다’ ‘미국이 인권 훈계할 상황이냐’며 짜증을 부리고, 해외 인사들의 우호적 발언이라는 것을 억지로 끌어모으려다 당사자에게 오역(誤譯) 항의를 받았다. 국제 인권 무대에서 경력을 쌓은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이 과정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전략을 세워 움직이는 게 아니라 덜컥 저질러 놓고 수습에 나서는 것은 아마추어의 모습이다. 수습도 제대로 못 하면 3류다. 대북전단법을 둘러싼 논란은 한국 정부의 인권에 대한 박약한 인식과 외교 무능의 민낯을 동시에 만천하에 드러냈다. 최악의 외교 참사로 기록될 만하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