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집 보이기도 전에 온다" 대책없이 폐지한 낙태죄 혼란

최연수 2021. 1. 12.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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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는 폐지됐지만 입법 공백
산부인과서 환자 되돌려보내기도
임신중절수술 상담하는 오픈 카카오톡방 생겨나
31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처벌의 시대는 끝났다!' 낙태죄 없는 2021년 맞이 기자회견에서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관계자들이 발언하고 있다. 뉴스1

“새해 첫 출근 날부터 인공임신중절 문의가 몰렸어요. 임신 초기라 아기집도 안 보이는 2000년생이 찾아와서 다음 주에 다시 오라고 돌려보냈는데…정부에서 기준이라도 세워줘야 저희가 대응을 하죠.”
서울 은평구의 한 산부인과 전문의 A씨(35)의 말이다. 낙태죄가 사라진 이후의 산부인과는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이 산부인과는 인공임신중절을 하지 않았던 병원인데, 낙태죄가 폐지된 12일 동안 환자 4명이 찾아왔다고 한다. A씨는 “낙태죄가 폐지됐다는 소식에 환자는 늘었지만, 병원 내규가 아직 없어 인공임신중절은 하고 있지 않다고 돌려보냈다”고 말했다.

현재 낙태죄는 처벌법 자체가 없는 상태다.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조항(형법 269조 1항 약물 등에 의한 자기낙태죄, 270조 1항 의사낙태죄)에 헌법불합치 결정(2019년 4월)을 내리고 대체 입법을 촉구(2020년 12월 31일까지) 했는데, 국회는 개정법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산부인과는 원칙적으로 인공임신중절이 가능한 주 수차 등이 정해져야 수술을 결정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지만, 낙태 의료시장은 요동치고 있다. 기자가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 서울ㆍ경기권의 산부인과 6곳에 비용을 문의한 결과, 비용은 70만원~220만원까지 다양했다. 임신 7주 이후엔 한 주가 지날 때마다 추가금 10만원이 붙는다는 산부인과도 있었다. 인공임신중절 수술이 가능한 임신 주수차도 병원마다 달랐다.

임신중절 수술과 관련된 한 오픈 카톡방도 성황이다. 20ㆍ30대 80여 명이 정보를 교환하는 한 카톡방에선 익명의 참가자들이 “수술 후 생리대를 가져가야 하나” “남자친구 대신 동성 친구를 데려가도 되냐”라는 질문을 올렸다. 임신중절 수술이 가능한 병원을 추천해달라는 문의에는 “병원명을 밝히면 불법이라 1대1 오픈 카톡을 열어주면 추천리스트를 보내주겠다”는 대화도 오갔다.


의료거부로 고소당할까 염려도

지난해 10월 19일 오전 서울 중구 코리아나호텔에서 열린 '낙태법 개정 관련 산부인과 단체 기자회견'에서 김재연 대한산부인과의사회장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의사협회 등은 병원 현장의 혼란을 막기 위해 자체 지침을 만들었다. 지난해 말 대한산부인과의학회 등은 ’선별적 낙태 거부안’을 통해 10주 미만의 산모에게만 중절 수술을 시행한다고 밝혔다. 10~22주의 경우는 충분한 숙려의 기간 갖겠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법무부는 임신 14주 내에선 조건 없이 낙태를 허용하고, 15~24주 이내엔 조건부 허용하는 법안을 마련했었다. 그러나, 협회의 지침은 권고사항일 뿐이다.

일부 의사들은 중절수술을 거부했을 때 진료거부로 처벌받을 수 있다는 걱정도 하고 있다. 한 산부인과 의사는 “환자를 돌려보낼 때 복지부에 진료거부로 신고할까봐 두려웠다”고 했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임신중절 수술을 하지 않는 의사들의 선택에 대한 고려도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유산유도제(미프진) 등 임신중절 약물에 대한 문의도 늘고 있다. 국내에서 유통되려면 약사법에 따라 식품의약안전처로부터 품목 허가를 받아야 하지만 현재까지 수입 허가신청을 한 제약회사는 없다. 당분간 약물로 낙태하려는 여성들은 현재처럼 암암리에 해외 직구 등을 통해 미프진 등을 구매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정부는 임신중절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확대와 정보제공 체제 구축 등을 검토 중이다.

낙태죄 입법 공백을 경험한 캐나다의 경우, 1980년대 낙태죄 위헌 결정 이후 30년 가까이 입법공백기를 겪기도 했다. 현재는 여성과 의사가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결정하면 정부와 민간기금이 비용을 지원하는 시스템을 갖췄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장미혜 선임연구위원은 “입법이 늦어지는 이유는 여성의 건강권과 태아의 생명권 사이의 합의를 조율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며 “사회적인 논의를 충분히 거친 이후에 임신중절 여성들을 위한 지원과 정보체제 마련, 그리고 미혼모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 등을 구축해야한다”고 말했다.
최연수 기자 choi.yeonsu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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