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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이 빼어나면 넘보는 자가 많다

한겨레 입력 2021. 01. 13. 07:56 수정 2021. 01. 13.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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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원철스님의 소엽산방]한양 제1경 장의사 절터에는 당간지주만 남았네

세검정 장의사 당간지주 인근 현통사 앞 계곡

새해가 오면 통과의례라는 것을 치룬다. 그런데 한 해가 바뀌는데도 아무런 통과절차도 없이 새해를 맞이했다. 종로 보신각의 제야 종소리도 울리지 않았고 지역명소에서 열리던 해넘이 해맞이 행사도 없었다. 그냥 시계와 달력만 한 해가 바뀌었노라고 숫자로 표시해 줄 뿐이다. 감염병 창궐로 인하여 송구영신의 통과의례조차 생략해야 하는 시절인 까닭이다.

이동 조차 여의치 않는지라 도반과 함께 동네 안에서 첫 순례답사로 새해 통과의례를 치루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장의사(서울 종로구 신영동) 옛터에 있는 당간지주(보물235호)를 찾은 것이다. 공공건물 앞에 있는 국기 혹은 단체기 게양대처럼 절 입구에 사찰임을 알리는 깃발을 달았던 간단한 구조물이다. 깃대는 없어지고 돌 기둥 두 개가 마주보는 지지대만 남았다. 소품이지만 사찰의 흥망성쇠와 함께 그 자리를 꿋꿋하게 1500년 동안 지켰다. 디자인이 단순할수록 견고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당간지주가 다시금 증명해 준다.

세검정 초등학교 교문은 굳게 잠겨 있다. 담장을 따라 한 바퀴 돌았지만 후문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 시작 할 때부터 닫았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군사시설처럼 단단히 봉쇄해 놓고는 인기척조차 없다. 할 수 없이 담장의 빈 틈새를 이용하여 당간지주를 멀리서 봐야 했다. 맹추위 속에서도 운동장 한 켠에 당당하게 서 있다.

사찰자리가 학교부지로 바뀐 것이 일제강점기 시대 이후라고 하니 벌써 백년의 세월이 흘렀다. 당간지주는 학교 운동장에서 새해맞이를 100번 반복한 것이다. 조선시대 임진난 병자란 이후에는 군영(軍營)이었다. 한양을 수비하고 북한산성을 관할하는 총융청(摠戎廳)이 설치되었다. 삼각산과 인왕산이 만나는 험준한 지형에 계곡이 좁고 굴곡이 심해 도성방어를 위한 군사요충지로 적격이기 때문이다. 그 역사가 또 삼백여년이다. 당간지주는 군부대 안에서 300번 새해맞이를 거듭했다. 군영을 새로 만들었다는 의미로 동네이름 신영동(新營洞)은 오늘까지 그 흔적을 남겼다.

사실 절을 처음 지을 때도 군사적 목적과 무관하지 않았다. 장의사(藏義寺 莊義寺)는 659년 신라 태종무열왕 때 창건했다. 백제와 신라가 한강지역을 두고 각축전을 벌일 무렵이다.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했지만 답신이 없었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근심하고 있을 때 황산벌에서 전사한 장춘(長春)과 파랑(罷郞)이 꿈에 나타나 당군의 원병이 파견된 사실을 미리 알려 주었다. 감사의 뜻과 함께 이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장의사를 창건했다고《삼국사기》는 기록했다. 출발부터 다분히 군사적이다. 따라서 당간지주는 군영이 낯선 것도 아닐 것이다.

공식적으로 폐사가 된 것은 연산군(재위1494~1506) 때다. 조선초까지 많은 스님네들이 머물 수 있는 규모를 유지했다. 하지만 궁궐과 가깝고 경치가 좋은 곳인지라 임금까지 탐을 냈다. 1504년에 "절을 비우라"는 어명이 떨어졌다. 이궁(離宮 별장 용도의 궁궐)이 설치되고 연회를 베풀면서 결국 왕의 놀이터가 되었다. 탕춘대(蕩春臺 봄을 즐긴다는 의미)는 황금색 건물에 청기와를 올린 화려한 누각이다. 졸지에 천년절집은 아름다운 꽃과 수려한 나무들로 꾸며지면서 흥청망청한 ‘비밀의 정원’으로 바뀌었고 더불어 당간지주는 정원을 장식하는 석조 조경물 노릇을 해야 했다. “오래 살다보니 별꼴을 다 보는구나” 하고 장탄식을 하며 새해맞이를 했던 세월일 것이다.

세검정초등학교 내에 있는 장의사 당간지주

조선이 개국하면서 종이 만드는 장인들이 사찰에서 동거했다. 삼각산 여러 골짜기의 시냇물이 모이는 자리인지라 항상 수량이 풍부하여 한지 제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초기에 설치했던 조지소(造紙所)는 이내 조지서(造紙署)로 확장되었다. 조정에서 필요로 하는 종이 생산을 전담했다. 조선왕조신록 등 ‘기록문화의 대국’답게 사찰기능보다는 종이 만드는 역할을 더욱 요구했다. 종이장인들 가운데 포함된 스님들의 숫자도 만만찮았다. 한지를 뜨고 먹물로 인쇄하고 노끈으로 책을 묶던 광경은 사찰만 있던 시절에도 늘 하던 일이였다. 그런 익숙함 속에서 당간지주는 새해맞이를 했을 것이다. 사찰과 조지서가 공존해도 문제가 없을 만큼 면적은 드넓었다.

물이 많다는 것은 경치가 뛰어나다는 뜻이다. “성 밖에 놀만한 곳으로 장의사 앞 시내가 가장 아름답다....물이 맑고 돌은 희어 신선세계와 같아 놀려 오는 선비들이 끊어지지 않았다”(성현《용재총화》)고 했다. 조선 9대왕 성종의 형이며 시인으로 중국까지 이름을 떨친 월산대군(1455~1489)의 주변에는 많은 문인들이 몰려 들었다. 어느 날 머리를 맞대고서 한양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 열 개를 골랐다. 그리고 10수의 시를 짓고는 ‘한도십영(漢都十詠)’이라는 큰제목을 달았다.

제1경은 ‘장의심승(藏義尋僧 장의사로 스님을 찾아가다)’이다. 해질 무렵 장의사로 돌아오는 스님들의 모습을 제1경으로 꼽았던 것이다. 동시에 선비들이 장의사를 찾는 일도 그 속에 포함시켰다. 전공이 다른 이를 만나야 사물을 보는 관점도 바뀌고 각도를 달리해야 배울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인사치례로 오가는 통과의례가 아니라 학문을 논하고 ‘도(道)’를 묻는 자리였던 것이다. 강희맹(1424~1483)은 글을 읽으려 갔고, 서거정(1420~1488)은 새벽 종소리에 깨달음을 기대했으며, 이승소(李承召1422~1484)는 ‘문수삼삼(文殊三三 《벽암록》35칙 참고)’ 화두를 질문할 만큼 명상 수행자로써 전문가에 버금가는 면모를 과시했다. 이러한 모습 자체가 제일가는 풍광인 것이다. 명산의 명인은 그 자체로 빛나기 마련이다. 사람이 꽃보다 더 아름다운 법이기 때문이다.

“내가 예전에 스님을 한번 찾아가서, 밤 깊은 달빛 아래에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었네. 새벽 종소리에 깊은 깨달음을 바랬으나...(我昔尋僧一歸去 夜蘭明月共軟語 晩鍾一聲發深省 서거정)”

“한가한 틈을 타서 성문을 나와 스님을 찾아가서, 전삼삼 후삼삼 화두를 물어봤네.(乘閑出郭尋僧去 試問前三後三語 이승소)”

“흰 머리카락으로 와서 보니 내가 예전에 왔던 곳, 젊어서 글을 읽었던 광산이 여기 아닌가?(白首歸來訪吾會 知是匡山讀書處 강희맹)”

도화살이라고 했던가? 모두가 좋아하는 매력을 가진 사람을 흔히 ‘도화살이 있다’고 말한다. 도화살은 사람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터도 도화살이 있다. 세검정 초등학교에서 만인이 좋아하는 터가 이런 곳일거라는 생각을 했다. 학교 축대에 벽화처럼 붙여놓은 사찰 궁궐별장 군부대 종이공장 학교 등 옛터를 알려주는 여러가지 표식들이 그것을 말해준다. 시작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킨 당간지주는 이제 마스크를 벗어도 된다는 통과의례를 마친 어린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릴 날만 기다리고 있을 터이다.

글 원철 스님(불교사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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