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주간경향

클림비 보고서 [오늘을 생각한다]

입력 2021. 01. 13. 08:42

기사 도구 모음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글자 크기 조절 레이어
[주간경향]
지난 2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에서 양천 입양아동 학대사망 사건을 보도한 지 3일 만에 국회에는 10건이 넘는 관련 법안이 발의됐다. 하루이틀 만에 뚝딱 만든 법안답게 처벌 강화, 가해자 신상공개 등이 골자다. 여야는 한목소리로 관련 법안의 조속한 처리를 약속했고, 임시국회 마지막 날인 8일 대부분 처리될 예정이다. 방송 일주일 만에 벌어진 일이다. 이런 졸속 대책으로 지옥 같은 세상이 과연 변할까?

지난해 6월 천안에서 한 아동이 체구보다 작은 여행가방 안에 7시간 이상 감금, 구타당한 끝에 사망했다. 앞선 5월 5일 피해아동은 머리가 찢어진 채 보호자와 함께 병원에 갔고, 온몸의 멍 자국을 의심한 병원 측에서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지속적인 학대에 대한 자백까지 받았지만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말만 믿고 피해아동을 구조하지 않았다. 지난해 9월, 1심 재판부가 계모에게 살인죄 등 혐의로 징역 22년을 선고했지만 10월 13일 양천 사건이 또 벌어진 것이다. 천안 사건 가해자에게 22년 대신 종신형을 선고했다면? 가해자 신상을 공개했다면 양천 사건을 막을 수 있었을까? 대책이 이렇게 쉽고 단순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2019년 9월 인천, 계부가 5세 아동을 목검으로 100여차례 구타해 사망. 계부에게 살인 등 혐의로 징역 25년이 선고됐다. 2016년 2월 평택 아동학대 암매장사건도 친부와 계모에게 각각 징역 17년, 27년이 선고됐다. 7세 아동을 100일 동안 화장실에 감금하고, 뼈가 부러질 만큼 때리고, 락스를 뿌려 전신화상을 입힌 채 방치하는 자들이 과연 신상 공개에 연연할까?

2000년 영국에서 9세 아동 빅토리아 클림비가 지속된 학대로 사망하자 정부는 조사단을 꾸리고 장장 2년간 380만파운드(약 56억)를 들여 432쪽 분량의 ‘클림비 보고서’를 작성했다. 2003년 1월, 약 270명의 증언을 바탕으로 클림비의 삶과 죽음을 낱낱이 밝히고 재발 방지를 위한 108개의 정책제언을 담은 보고서가 발간됐다. 재무부 장관이 〈모든 아동은 중요하다(Every Child Matters)〉라는 녹서(綠書)를 의회에 제출하고, 2004년 영국의회는 아동법을 전부개정(Children Act 2004)한다. ▲양육자 지원 ▲조기 개입 및 효과적인 보호 ▲지방·중앙정부의 책임 및 통합 ▲아동보호 종사자의 역량 강화 등 아동보호 체계를 완전히 바꿨다.

지금 정치권이 내놓는 모든 대책은 쇼에 불과하다. 법안 몇개 통과시킨 다음엔 뭘 할 것인가? 학대 의심 시 즉각 분리하면 살릴 수 있나? 한국에서 아무도 이 문제에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2018년 영국은 14년 만에 아동보호 체계를 대대적으로 개편했고, 여기에 ‘심각한 아동학대 사건 진상조사(Serious Case Reviews)’를 의무화하는 내용이 담겼다. 지금 국회가 할 일은 특별법으로 양천 사건에 대한 독립적인 법정 진상조사단을 꾸리는 것이다. 살인죄를 적용해도, 경찰서장을 줄줄이 파면해도 죽음은 반복될 것이다. 우리 모두 인정해야 한다. 지름길은 없다는 것을.

장하나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 주간경향 표지이야기 더보기▶ 주간경향 특집 더보기

〈경향신문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 경향신문 & 경향닷컴(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포토&TV

    이 시각 추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