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내 정서의 살점을 꼬집는 코르차크의 '아이들' / 이병곤

한겨레 2021. 1. 13.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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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이병곤 ㅣ 제천간디학교 교장

“어린이를 알려고 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알려고 애쓰세요. 어린이는 다만 희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지금, 여기 이미 존재합니다.”

안다. 그리고 받아들인다. 아이는 내 눈앞에 실존하고 있는 생명체다. “쌤, 그건 당연히 학교가 해줘야죠.” 지금, 여기 존재하는 아이의 날카로운 말 한마디에 교사는 가슴을 베인다. 현장에서 만나는 아이들 하나하나는 추상적 언명 대상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구체적 현실이다. 하루는 믿음을 주었다가 며칠 뒤 언제 그랬냐는 듯 그것을 철회하는 모습을 보여주던 아이는 어쩔 것인지. 애써서 보여준 배려를 한 아이가 ‘가부장적 온정주의’로 해석할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나는 그 아이들의 어떤 면을 알지 하며, 나 자신의 어떤 특성을 몰랐던 걸까? 알기 힘든데 알아보라 말했던 위 발언의 당사자는 자신이 감당해야 했던 어려움을 무엇으로 돌파했을까? 그게 참 궁금하다.

“아이의 영혼도 어른만큼이나 복잡합니다. 생각하기 싫어하는 사람들만 다양성을 싫어합니다. 이미 아이 안에 있던 것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원래 없었는데 새롭게 생겨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좋다. 어른과 아이의 영혼 모두 복잡하다는 사실은 대안학교 현장 교사들이라면 온몸으로 이해한다. 그럼에도 어른과 아이가 학교에서 선생과 학생으로 만날 때는 제도, 문화, 관습, 지식 세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가운데 대등한 정서적 평등을 유지하기가 무척 어렵다. 학교는 시간과 공간을 함께 쓰는 장소다. 그곳에 깃든 이들의 욕망, 실수, 변심, 일탈, 무심, 원칙주의 등 다양한 심리적 층위들이 발산되고 중첩된 공간이 바로 학교다. 나는 생각하기 좋아하고, 다양성을 존중한다. 하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까지만 그렇다. 아이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재능과 성장 욕구가 뿜어져 나오길 기대한다. 하지만 내가, 혹은 학교가 지원하고, 도와줄 수 있는 수준까지만 그렇다. 딱 여기까지다. 그런데 위 발언의 당사자는 그 한계점을 망설임 없는 행동으로 간단히 초월해버린다.

“아이가 눈과 입에 웃음을 띨 때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해.’ 아이는 숨을 죽이고, 유심히 바라보고, 기다리며, 관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른들은 유리한 패를 쥐고 어린이와 카드놀이를 합니다.”

찔린다. ‘유리한 패’를 잡고 있는 사람이 어른인 것, 선생인 것이 맞으니까. 아이들이 무엇인가로 인해 행복한 모습을 보일 때뿐만이 아니라 엉뚱한 행동, 기발한 제안, 갑작스러운 성장을 바라볼 때 교사로서 커다란 기쁨을 누린다. 단, 내가 그 유리한 패를 여전히 잡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면서 그 보람을 맛보고 싶을 뿐이다. 교육이란 어쩌면 그런 유형의 카드놀이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그 놀이에서 어른들과 ‘함께 놀아주는 척’하면서 우리가 모르는 진짜 성장은 이미 다른 곳에서 수행하고 있을지 모른다. 위 발언의 당사자는 일찍부터 그 사실을 간파했으리라.

감정과 정서는 한정된 자원이다. 돌봄과 교육 노동 분야에서 그런 특징이 두드러진다. 어느 한 사건, 한 사람과의 관계가 심하게 비틀어지면 모든 아이에게 골고루 분배해야 할 정서 자원을 대부분 소진해버리고 만다. 그러다 문득 상대적으로 적게 사랑받은 자기 반 아이들 얼굴이 눈에 밟힌다. 교사는 이중으로 도덕적 책임을 느끼면서 무력감과 자책에 시달린다. 한 학년도를 마무리한 지금,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내 감정에 살집이 있어서 누군가 그것을 세게 꼬집는다 해도 아무런 통증을 못 느낄 상태로 방학을 맞았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다시 그의 책을 집어 든 이유다.

“감정이라면 아이가 어른보다 더 강하게 느낍니다. 아직 억제하는 것을 익히지 않았기 때문이죠. 지성이라면 적어도 어른들과 동등합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새로운 경험을 추구하기 때문이지요.”

그는 의사이자 작가였고, 폴란드 전쟁 역사의 최대 피해자인 가난한 아이들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유태인 고아원 원장으로서 아이들의 미소, 눈물, 홍조를 관찰하는 교사가 된다. 어린이는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의 인간임을 온몸으로 증명한다. 독일 나치스는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1942년 8월. 200명의 아이들 손을 잡고 기차에 오른다. 트레블린카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학살될 때까지 아이들 곁을 지킨다. 위 발언들의 당사자인 그의 이름은 야누시 코르차크(1878~1942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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