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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현의 아제아제 바라아제] 한국 절들은 왜 산에 있을까?

입력 2021. 01. 13. 15:40 수정 2021. 01. 13.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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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주 부석사.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 2018년 유네스코는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을 인류가 지키고 보존해야 할 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그런데 등재 명칭 9글자에 '산사'와 '산지 승원'이라는 산과 관련된 표현이 두 번이나 등장한다. 한국사찰의 특징을 산사로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진짜 그럴까? 과연 국교가 불교였던 신라나 고려의 왕들은 고승을 찾아 산사로 갔을까? 그러다가 여차해서 정변이 일어나면 어떡하지?

붓다 당시 인도에 산사는 없었다. 오늘날도 밥을 해 먹는 건, 여간 많은 시간과 관련 노동을 필요로 하는 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1인 가구는 되도록 밖에서 음식을 해결하며, 먹는 횟수 자체를 줄인다. 붓다 역시 같은 생각을 했다. 해서 승려는 하루에 1끼만 먹고, 신도들의 보시를 통해 먹는 것을 해결하도록 제도화한다. 이는 출가한 승려가 시간의 낭비 없이 수행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신도에게 음식을 공급받기 위해 사찰은 마을과 멀어서는 안 된다. 때문에 율장의 '방사건도(房舍犍度)'에는 사찰의 위치를 '마을과 멀거나 가깝지 않은 곳'으로 규정하고 있다. 가까우면 소란스럽고, 멀면 음식 공급에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충남 예산 수덕사 ©게티이미지뱅크

동아시아 불교에서도 최고의 사찰은 모두 도시에 있었다. 신라를 대표하는 사찰인 황룡사는 진흥왕이 새롭게 왕궁을 건설하던 과정에서 황룡이 나타나자 사찰로 바꾼 곳이다. 왕궁지가 산에 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고려 시대에도 수도를 대표하는 사찰인 흥왕사(興王寺)나 영통사(靈通寺) 등은 모두 개경 안에 있었다. 그래야 국왕과 고승의 교류에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산사란 대체 무엇일까? 불교 시대에는 절이 너무나 많다 보니, 도시 사찰이 포화되어 산에까지 절이 들어서게 된다. 또 명상을 중시하는 선종에서는 도시보다 산에서 자급자족하는 방식을 택하곤 했다. 마치 중세 유럽의 가톨릭 수도원이나, 우리나라의 기도원 같은 곳을 생각하면 되겠다.

이런 포화상태에서 조선이 들어서자, 불교는 하루아침에 전 왕조의 이데올로기로 낙인찍히며 탄압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때 집중포화를 당한 곳은 단연 도심 사찰이다. 즉 유럽으로 말하면, 도시 성당은 파괴되고 산속의 수도원만 남은 셈이라고나 할까!

경북 영주 부석사 ©게티이미지뱅크

그럼 왜 산사는 살아남은 것일까? 여기에는 일차적으로 산사라는 특성상 파괴하러 가기도 어렵고, 또 굳이 없앨 필요도 없는 측면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선 정부 입장에서도 필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다 보니 물류 유통이나 역참 운영에 있어, 산 안에 중간 거점이 필요하다. 또 전쟁이 발발할 때, 산사는 진지와 같은 방어기지의 역할로 전용될 수 있다. 이것이 산사가 남게 되는 실질적인 이유이다.

불교 시대의 주류였던 도시 사찰이 사라지고 산사만 남자, 오늘날 불교는 산사가 정석인 것처럼 되어 버렸다.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건물로 우리는 흔히 부석사 무량수전과 수덕사 대웅전을 꼽고는 한다. 그러나 고려를 대표하는 최고 건축물은 당연히 수도인 개경에 있지 않았을까? 개경에서 볼 때, 부석사와 수덕사의 위치는 변방의 시골에 불과하다. 즉 진짜 대단했던 것이 아니라, 살아남았기 때문에 대단하게 인식된 것이라는 말이다. 때문에 한국 불교의 전통이 산사로 규정되는 것은, 고즈넉한 동시에 역사적인 비극을 내포한다고 하겠다.

중세까지 종교시설은 도시의 가장 한복판에 위치했다. 이는 유럽의 성당들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한국의 사찰은 도시의 흔적마저도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이는 건축에서, 나무를 재료로 하는 짜맞춤 방식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목조는 화재의 취약성도 크지만, 건물의 개변 역시 용이하다. 즉 화재로 인한 소실과 용도변경이 쉬웠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산사는 오늘날의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동시에 비주류의 미감인 셈이다. 마치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이 소실되자, 이궁인 창덕궁이 258년간 정궁의 역할을 수행한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 때문에 창덕궁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다. 이점 또한 산사와 매우 유사하다고 하겠다.

자현 스님ㆍ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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