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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워싱턴 의사당 앞 태극기

정영오 입력 2021. 01. 13. 18:00 수정 2021. 01. 13.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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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부대 비난은 그들을 강하게 할 뿐 
그들 상처 난 자존감을 치유하지 않으면
 '한국판 트럼프'의 등장을 막지 못할 것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6일(현지시간) 워싱턴시 미의회 의사당 난입시위 현장 생중계화면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든 시위자 모습이 잡혔다. / 미NBC 화면 갈무리

“여러분들이 지옥처럼 싸우지 않으면, 조국은 사라진다. 나약한 자들을 몰아내자. 힘을 보여줄 순간이다.” 지난 6일 미국 워싱턴시 의사당 남쪽 엘립스 공원에서 열린 대선 불복 집회에 참석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렇게 외쳤다. 연설에 고무된 시위대는 의사당을 향해 행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오랫동안 몹시도 부당한 대우를 받아온 위대한 애국자들”이라고 치켜세웠고, 이들은 성조기를 흔들고 ‘USA!’를 외치며 의사당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런데 이를 중계하던 미국 TV 방송에 성조기와 태극기를 나란히 들고 있는 사람이 포착됐다. 지구 반대편 시위대와 종종 서울 도심을 점거하는 ‘태극기 부대’가 만나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이날 시위대의 의사당 난입 이후 다수 미 공화당 정치인과 트럼프 지지자들마저 이들에게 비판을 쏟아냈다. 우리 사회에서도 시위 현장에 등장한 태극기를 두고 평소 태극기 부대 시위에 등장하던 성조기와 이스라엘 국기를 거론하며 ‘나라 망신’ ‘부끄럽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여론의 질타에 미국 ‘성조기 부대’와 한국의 ‘태극기 부대’는 위축됐을까. 오히려 정반대다. 성조기 부대는 16일부터 조 바이든 차기 대통령 취임식이 있는 20일까지 전국에서 무장 시위를 계획하는 등 더 강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 이들은 비판과 비난이 강해질수록 더 빠르게 성장한다.

이제는 이들에 대한 현상적 비판보다 이들이 분노하고 결집하는 이유를 진지하게 이해해야 할 때이다. 영국 옥스퍼드대 폴 콜리어 교수는 최근 국내에서 출판된 ‘자본주의의 미래–새로운 불안에 맞서다’에서 그 이유를 그들의 상처받은 자존감에서 찾는다. 1990년대부터 본격화한 세계화 물결 속에 많은 나라 정치인들은 자유무역의 효율성을 앞세워 국제 경쟁력을 잃은 자국 산업의 도태를 당연하게 여기고, 그로 인해 실직한 사람들에게 실업수당을 주면 정부가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생각했다.

자유시장 경제를 신봉한 정치인ㆍ관료들은 인간에게는 경제적 욕구만큼 자존감이 중요하다는 점을 간과한다. 자존감은 집단 소속감과 동료들과의 상호 인정을 통해 형성된다. 자존감의 주요 원천인 안정적 직장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점점 더 인종이나 국가에 대한 소속감이 커지게 된다. 게다가 정보통신(IT) 같은 분야에서 부를 일군 신흥 엘리트들(속칭 미국 리무진 리버럴ㆍ한국 강남좌파)이 전통적으로 약자 편에 섰던 진보ㆍ자유주의 정당의 주도권을 차지하면서, 자신들을 대변해주는 정당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마음 둘 곳을 상실한 이들은 결국 소수파 종교나 극단적 애국 이념집단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반면 세계화 혜택을 입은 엘리트들은 활동 무대가 국제화하면서 빠르게 국가에 대한 소속감은 옅어지고, 자신의 능력으로 획득했다고 생각하는 출신학교나 직장을 중시한다. 이런 추세가 ‘능력주의’를 강화해 ‘세계화 희생자’의 곤경을 사회 구조적 원인보다는 개인 능력과 의지 문제로 치부하는 풍토가 자리 잡으며, 이들의 상처를 점점 깊게 만든다.

어쩌면 이들이 조국과 국기에 집착하는 모습에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들이 중요시하는 국가가 먼저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일방적이고 일시적 시혜가 아니라, 공공 분야에서 이들에게 국가에 대한 의무를 부여하고 이를 통해 소속감과 자존감을 되찾을 일자리를 찾아 제공해야 한다.

지금 미국 워싱턴시에 선포된 ‘비상사태’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태극기 부대 집회마다 백만이 넘는 인파가 모인다. 태극기 부대는 미국보다 1년 앞서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난입했다. 이를 비난만 하며 방치한다면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한국형 트럼프 대통령’의 출현을 지켜보게 될지 모른다.

정영오 논설위원 young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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