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경향신문]
‘운전자가 당황한 나머지 브레이크가 아닌 가속페달을 밟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자동차 급발진 사고에 대한 거의 굳어진 공식이다. 자동차는 부품 약 3만개의 복잡한 제품이다. 가느다란 전선 가닥 하나가 끊어지거나 합선이 돼도 사고를 일으킬 수 있다. 솔직히 제조사조차 그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하물며 이를 소비자에게 입증하라는 건 무리다.
최근 이런 점을 반영한 전향적인 판결들이 조금씩 보인다. 서울중앙지법이 지난해 11월 BMW 급발진 사건 항소심에서 제조사가 유가족들에게 4000만원씩 배상하도록 한 것이 대표적이다. 재판부는 과속 범칙금 전력이 없는 60대 운전자가 시속 200㎞ 넘게 질주한 정황을 그 증거로 인정했다.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급발진이 아니란 근거를 BMW가 제시하라’고 재판부가 요구했다는 점이다. 입증책임이 논란이 되는 또 다른 분야가 의료사고다. 심각한 의료사고에서조차 입증책임을 피해자에게 요구하는 바람에 의료기관이 면책받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의사가 잘못 시술했다는 사실을 환자 측이 입증하기가 좀 어려운가.
지난 12일 가습기살균제 사건으로 기소된 SK케미칼과 애경산업 전 임원들이 1심 법원에서 무죄를 받으면서 입증책임이 다시 거론되고 있다. 가습기살균제로 피해를 입었다는 점을 소비자 측이 입증하지 못했다는 판결이 지나치게 소비자에게 가혹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반대로 ‘살균제로 피해가 발생한 게 아니다’라는 증거를 제조사가 제시하도록 해야 사회정의에 부합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법무부는 지난해 9월 피해자의 입증책임을 줄여주는 집단소송법 제정안을 냈다. 제정안에 따르면 피해자는 밝힐 수 있는 데까지만 개략적인 피해를 주장하면 된다. 반면 제조사는 구체적으로 증명해야 하고, 정당한 이유가 없으면 피해자 주장을 진실로 인정할 수 있게 했다. 날로 복잡해지는 정보기술(IT) 기기나 전문적 의약품·의료기, 화학제품 등이 늘어나는 현대사회에서 소비자의 방어권은 강화되는 쪽으로 가는 게 맞다. 가습기살균제 사건처럼 피해자가 광범위할 경우엔 더욱 말할 것도 없다. “아픈 내 몸이 증거”라는 피해자의 절규만으로 입증책임이 완성되는 세상이 속히 오면 좋겠다.
전병역 논설위원 junb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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