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한국일보

판사의 질타 "약촌오거리 사건, 무고한 시민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

최나실 입력 2021. 01. 13. 21:00 수정 2021. 01. 15.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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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살인 누명 피해자에 16억 배상해야" 판결
"강압수사 경찰·진범 불기소 검사에 20% 책임"
10년 억울한 옥살이에도 정부는 책임 인정 안해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10년간 옥살이를 한 최모씨가 13일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승소했다. 최씨의 대리인인 박준영(오른쪽) 변호사와 진범을 찾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황상만 전 군산경찰서 강력반장이 선고 직후 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 수호는 못할지언정 위법한 수사로 무고한 시민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혔다. 이 사건과 같은 불법행위가 다시는 저질러져서는 안 된다는 경각심을 갖게 할 막중한 필요가 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5부 이성호 부장판사, 559호 법정

법원이 13일 이른바 ‘약촌오거리 살인사건’ 범인으로 몰려 1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피해자 최모(37)씨에 대한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면서 밝힌 대목이다. 선고 직후 최씨를 대리한 박준영 변호사는 "소송 과정에서 주장한 국가의 불법행위 대부분을 재판부에서 인정해 주신 것 같아 만족한다”며 “이번 판결이 보다 인권적 수사관행이 자리잡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5부(부장 이성호)는 이날 최씨와 가족들이 국가와 당시 수사책임자였던 경찰관·검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국가는 최씨에게 13억여원을 지급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최씨 어머니에게는 2억 5,000만원, 여동생에게 5,000만원을 지급하라고 밝혔다. 최씨와 가족에 대한 16억원 규모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것이다.

특히 전체 배상금 가운데 20%는 최씨를 강압 수사했던 이모 경찰반장, 진범을 불기소 처분한 김모 검사가 국가와 함께 공동부담하도록 했다. 이날 선고 공판에는 최씨와 가족들 대신, 박 변호사와 함께 최씨 누명을 밝히는 데 도움을 준 황상만 전 군산경찰서 강력반장이 자리했다.


강압수사로 '최초 목격자'를 '살인 용의자'로 조작

영화 '재심'의 한 장면. 이 영화는 2000년 8월 전북 익산시 약촌오거리에서 발생한 택시기사 살인사건에서 억울하게 살인범으로 몰려 10년을 감옥에서 보낸 청년 현우(강하늘)와 그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 준영(정우)이 진실을 찾기 위해 다시 재판을 여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최씨는 2000년 8월 10일 새벽 2시 우연히 살인사건을 목격하면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10대 초반부터 다방에서 배달 일을 해 왔던 최씨는 사건 당일 전북 익산시 약촌오거리 부근에서 오토바이를 몰고 가다가, 버스정류장 앞에 정차된 택시 안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택시기사 유모(사망·당시 42세)씨를 발견했다.

‘최초 목격자’인 최씨는 경찰에 “현장에서 남자 2명이 뛰어가는 모습을 봤다”고 증언했지만, 도리어 사건 발생 사흘 뒤 ‘유력 용의자’로 검거됐다. 불과 만 15세의 나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건 당시 최씨가 입었던 옷과 신발 등에선 혈흔조차 발견되지 않았으나 이모 반장 등 익산경찰서 경찰들은 최씨가 택시기사와 시비가 붙어 홧김에 살해한 것으로 사건을 몰아갔다.

경찰은 최씨로부터 허위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그를 여관에 불법구금한 상태에서 몰아세웠고, 사흘간 잠을 재우지 않으며 폭언과 폭행 등의 가혹행위를 했다. 최씨는 고문에 가까운 경찰의 압박에 못 이겨 결국 “내가 살해했다”고 거짓자백을 했고, 법원에서 징역 10년이 확정됐다.


진범 재차 놓친 檢... 16년만에 재심으로 누명 벗어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의 진범을 체포했던 황상만(왼쪽) 전 군산경찰서 강력반장이 13일 선고 공판을 마친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스1

누명을 쓰고 복역 중이던 최씨에게 한 차례 누명을 벗을 기회가 찾아왔다. 2003년 군산경찰서에서 진범이 따로 있다는 첩보를 받고 재수사에 나섰던 것이다. 군산경찰서 소속 황상만 강력반장은 임모씨에게서 “사건 당일 친구 김씨(진범)가 피 묻은 칼을 들고 집으로 찾아와 범행을 저질렀다고 했고, 나는 흉기를 숨겨줬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진범 김씨에게 자백을 받아낸 군산경찰서는 김씨와 임씨를 강도살인·범인은닉 등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하려 했다. 그러나 검찰이 불구속 수사를 지휘했고, 두 사람은 ‘가족의 관심을 받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라며 자백한 진술을 번복했다. 사건을 담당했던 김모 검사는 2006년 김씨와 임씨를 최종 무혐의 처분했다.

2010년 봄, 9년 7개월만에 만기출소한 최씨는 재심사건 전문가로 알려진 박준영 변호사의 설득에 2013년 3월 법원 문을 두드렸다. 광주고법은 2016년 11월 재심에서 최씨의 무죄를 인정했다. 재판부는 최씨가 수사·재판 과정에서 했던 자백이 강압수사에 의한 허위진술일 가능성이 높다며 “이번 재판으로 새로운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검찰은 최씨에게 무죄가 선고되던 날 진범 김씨를 긴급체포했고, 김씨는 강도살인죄로 구속기소돼 2018년 3월 대법원에서 징역 15년을 확정받아 복역 중이다. 이 사건은 살인 누명을 벗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피해자와 변호사를 그린 영화 '재심'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박준영 변호사 "택시기사 유족에 죄송한 마음"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의 형사재심과 국가상대 손해배상소송을 맡은 박준영 변호사가 13일 선고 공판을 마친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뉴스1

재판부는 이날 국가 공권력의 불법행위를 인정하면서 당시 수사기관의 잘못을 강하게 질타했다. 이성호 부장판사는 “익산경찰서 경찰들은 객관적 증거가 없는데도, 사회적 약자로서 무고한 최씨에게 가혹행위를 해 오히려 부합되지 않는 증거들에 끼워 맞춰 허위자백을 하도록 유도했다”고 비판했다. 당시 수사를 지휘한 검사에 대해서도 “경찰이 사전 구속영장을 신청하지 못하도록 해 사건의 진상이 장기간 은폐됐고, 증거관계를 면밀히 파악하지 않은 채로 불기소처분을 했다”고 지적했다.

재심부터 이번 국가배상 소송까지 최씨를 대리한 박준영 변호사는 선고 직후 “이모 경찰반장은 여전히 ‘최씨가 진범이고, 형사보상금도 환수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한다”면서 “법원이 그와 같은 주장이 말이 안 된다는 걸 인정해서 (최씨도) 만족한 것 같다”고 밝혔다. 또 “형사 재심에서 무죄가 나왔을 때 경찰·검찰·법원 모두 사과했다. 하지만 이번 민사소송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책임을 인정할 수 없다고 나와 굉장히 아쉽고, 화도 나고 실망했다”고 말했다. 함께 선고를 지켜본 황 반장은 “이 사건의 의미는 한 개인에게 인권을 찾아주고, 무죄를 받아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지만, 대한민국에서 다신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박 변호사는 사건 피해자인 택시기사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안한 마음을 표하기도 했다. 박 변호사는 지난해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새벽 3시 교대를 앞두고 자식들과 부인을 부양하는 가장으로서 끝까지 최선을 다했던 40대 가장의 안타까운 죽음이었다”며 “약촌오거리 사건 얘기가 나올 때마다 아버지와 남편의 죽음을 떠올리게 될 유족에게 너무 가혹한 상황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죄송한 마음”이라고 밝힌 바 있다.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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