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가 '통일' 외치며 아메리카-유라시아를 횡단한 이유

원동업 입력 2021. 1. 14.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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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평화마라토너 강명구씨의 이야기

[원동업 기자]

▲ 평화마라토너 강명구가 달린 거리.  매일 40킬로미터를 뛰면 400일이 걸린다.
ⓒ 강명구
 
생각해 보면 이건 미친 짓이다. 매일 42.195킬로미터씩을 뛰어 400여 일을 지속한다는 건. 그건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그런데 트랙도 아니고, 일정한 코스도 아니고, 열여섯 개 나라를 지나 매일 새로운 길을 달려야 한다면? 언어와 정치 체제마저 달라진다면? 뿐만 아니다. 거기엔 산맥도 있고 사막도 있고, 게릴라와 반군도 있을 수 있다. 더구나 400여 일이니, 북반구의 겨울을 겪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끝내 그 일을 해냈다. 누군가는 그를 '신이 된 사람'이라 불렀다. 그나저나 왜 그는 길에 나섰을까? 달리는 동안 무엇을 봤을까? 어떤 사람일까? 궁금한 것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물론 그의 글은 글로벌웹진 <뉴스로>를 통해 볼 수 있다. (그는 뉴스로의 칼럼니스트다. 글 쓰는 마라토너). '통일마라토너 강명구'에 대한 기사도 여럿이었다. 그럼에도 그를 꼭 직접 보고 싶었다. 마침 그는 한국에 있었다. 지난 10일 그를 만났다. 인터뷰는 그가 나고 자란 곳, 왕십리서 진행됐다. 

"별볼일 없던 50년, 나를 찾고 싶어 미대륙 횡단"

- 미국에서 오래 사셨다가 다시 한국에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른이 되던 해 미국으로 갔어요. 나는 문학을 하고 싶었어요. 근데 천재의 재능 없이는 밥먹고 살기 힘드니까. 서른 살까지 날라리로, 백수로 지낸 거예요. 여기서 별볼일 없으니까 미국에 간 거지. 옛날엔 미국하면 천국인 줄 알았으니까.

가보니까 남의 나라서 사는 게 쉽지 않았어요. 겨우 일으켰던 사업도 잘 안 되고, 40대를 넘어가니까 몸도 신호가 오고… 달리기는 거의 오십 대에, 건강을 찾자고 시작했어요."

- 미대륙 횡단 마라톤을 하게 된 계기는요?
"난 사람 삶이 70~80인 줄 알았어요. 근데 그건 평균이잖아요. 장수하면 구십도 넘겠고, 담배 끊고 운동 열심히 하면 백 살까지도 사는 거고. 전반기 50년은 지질하게 살았는데, 또 50년이 주어졌으니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다. 나만의 삶이란 게 뭔지 깊이 생각해 보자. 그래서 미대륙 횡단에 도전했어요.

적당히 하다 힘들면 돌아오자 그랬죠. 휴대전화만 있으면, 쓰러져도 앰블런스를 부를 수 있잖아요. 숙식 장비를 유모차에 넣고 혼자 뛸 생각이었어요. 무도움으로 뛰는 건 아시아인 최초라는 거예요. 그냥 뛰면 허전하잖아요. 유모차 앞에 '남북평화통일'을 적어 넣었죠. 날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도 통일마라토너 나는 알아보죠."

- 미국도 동에서 서로 가는 횡단 루트가 있습니까?
"서부 개척시대 흔적이 남은 길이 루트 66번 도로예요. 동서횡단 첫 길. 시카코에서 LA까지. 구도는 없어지고 고속도로만 남은 곳도 있고. 난 지도 펴놓고 LA와 뉴욕의 중간중간 대도시들을 연결했어요. 다섯 구간으로 나누어서 로키산맥 꼭대기에 플래그 스탭 찍고 산타모니카 해변까지 가자 했죠."

- 25년간 뉴욕서 살다, 처음 미대륙을 횡단하셨죠. 두 개의 미국은 어떻게 다르던가요?
"흔히 미국을 멜팅팟(melting pot 용광로)이라고 하는데, 오만한 말이예요. 뉴욕은 세계 인종 전시장이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사는 동네가 달라요. 처음 LA 한인타운을 벗어나니까 몇 킬로쯤 길게 홈리스촌이 있어요. 섬찟한 느낌이 날 만큼 마리화나와 술병 깨진 것들이 보였어요. 대륙 중간 사막엔 철조망 안에 인디언들이 갇혀 살아요. 동부까지 오니까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서 흑인폭동이 있었어요. 전쟁터에 들어온 거 같았어요. 아, 미국이 진짜 선진국일까 했죠."
 
▲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그를 돕고 함께 걷고 지지해 주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1) 이란의 여고생들 2) 체코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3) 체코의 사골마을 축제에서 4)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들과 행진
ⓒ 강명구 제공
 
이웃 건너듯 국경 넘는 유럽처럼, 남북한도 그랬으면

- 2년 뒤, 유라시아대륙 횡단 마라톤을 하게 되죠?
"미대륙 횡단 마치고, 유엔본부 앞서 인터뷰를 했어요. <뉴스로> 로창현 기자가 다음 계획이 뭐냐고 자꾸 물어요. 그런 게 없는데… 퍼뜩 생각난 게 '더 큰 데로 가자. 할아버지 살던 평양'에 가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시작된 거예요."

- 준비를 좀 하셨습니까?
"난 평범한 마라토너요. 나보다 잘 달리는 사람들은 무지무지 많아요. 난 이게 상상력의 승리라고 봐요. 어릴 적에 난 선생님 말 대신 창밖 내다보면서 상상했단 말이죠. 멀리 미지의 나라를 가는 그런 상상들. 나는 뭔가 좀 사회부적응자였어요. 그래도 뭔가 쓰임이 있겠지 생각했지만…"

- 실례지만, 좀 미친 짓 아닙니까?
"(웃음) 내가 10킬로씩은 매일 뛰었어요. 근데 일 안 하고 뛰면 무조건 20킬로미터는 뛸 거예요. 천천히, 물 마시면서 간식 먹으면서 뛰면 30킬로도 무조건 가능하겠죠. 근데 눈에 뜨이려면 풀코스 정도는 뛰어야겠다 한 거지. 한번 해보고 못하면 돌아오지 뭐! 그랬어요."

- 어려움이 아주 없지는 않으셨죠?
"미국은 단일 언어권인데, 유라시아는 나라마다 체제도 언어도 달라요. 분쟁 지역도 넘어야 하고, 뙤약볕은 괜찮은데 겨울 저체온증을 견디긴 어려워요. 솔직히 자신이 없었어요. 

그러다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책 <나는 걷는다>를 봤어요. 은퇴 후 이스탄불서 중국 시안까지 8000킬로미터를 걸어서 간 거예요. 봄부터 가을까지, 3년에 나눠 걸었어요. 읽어보니까 죽을 고비 넘겼단 이야긴 없어요. 가능하다 싶었어요. 문제점이 해결된 거잖아요. 나머지 구간은 유럽하고 중국이니까. 거긴 괜찮죠."

-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시작하셨더군요. 이준 열사 때문입니까?
"북한산 둘레길을 가다보면 이준 열사 묘역이 있어요. 거기 쓰여져 있어요. '인간이 하고 하는 일은 하고 또 하여야 한다, 살고 죽는 것이 다 나에게 있다'고. 거기서 시작하고 싶었어요. 바다에서 이준 열사 기념관까지 한 2~3킬로미터 정도 되죠. 어쨌든 이스탄불 가니까 겨울이에요. 그쪽부터는 4000~5000미터 산이 즐비해요. '지금 가면 얼어 죽는다' 그래요. 근데 방법을 찾았어요. 흑해랑 카스피해를 따라 가면 지중해성 기후라 겨울에도 온화해요. 그래서 고비를 넘겼어요"

- 그 이후의 여정, 중앙아시아는 어땠습니까? 
"그곳이 대개 소련연방서 독립한 곳이에요. 사회주의 국가. 북한보다 더 독재국가도 있어요. 투르크메니스탄 갔는데, 호텔에 경찰이 들이닥쳤어요. '짐 싸서 나가라'는 거예요. 패싱 비자를 받았다는 거죠. 다음 도시가 3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곳인데. 노숙도 하고… 어렵게 어렵게 그곳을 벗어났어요.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은 교포들, 우리 기업인들도 있어 도움을 많이 받았죠."

- 실제로 많은 분들이 도와 주셨죠?
"그럼요. 난 비행기표랑 세 달 견딜 돈만 갖고 갔어요. 터키쯤 오니까 후원회가 구성됐어요. 송영길 의원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는데, 부인께서 차량 구입에 보태라며 돈을 지원을 해주셨어요. 자원봉사자들이 번갈아 차량도 운전해 주고. 어떤 파리 교포는 새벽에 기차 타고 와서 2000유로를 놓고 가시고.

체코서는 대사관서 초대도 해주셔서 처음 외교 무대도 섰어요. 트레이닝복 입고 연회장에 간 거죠. 송인엽 교수가 코이카에 오래 계신 분이라 비자 일을 도와주셨고. 여인철 교수, 이장희 교수님… 그런 분들이 없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는 최근 뇌졸중 치료를 받았다. 지금도 발음이나 걸음이 완전하지는 않다. 하지만 기꺼이 왕십리까지 방문해 주었다. 미국서 늦은 나이에 만난 아내를 보러 이주 간의 격리도 기꺼이 겪으며 태국에도 간다.

지난해 9월엔 코로나19 와중에도 한라산서 판문점에 이르는 통일기원 종주도 진행했다. 강정서 광화문까지 사드배치 철회를 위한 평화마라톤이나, 이전에 네팔과 베트남 등에서 진오스님과 진행했던 마라톤의 마음 그대로다. 그는 북쪽 땅에는 끝내 발을 딛지 못했다.   
 
▲ 통일 마라토너 강명구.  그는 자신의 작은 발자국이 통일과 평화를 이루는 거대한 나비효과를 불러오기를 상상한다.
ⓒ 원동업
 
"네델란드서 독일 넘어가는 데, 초소 하나가 없는 거예요. 그냥 우리가 경기도서 충청도 넘어가듯 안내판 한 장만 달랑 있어요. 우리도 어서 그렇게 돼야죠. 인간이 가장 번성한 종이 되는데, 개와의 협력이 결정적이었다고 그래요. 이렇게도 협력을 하는데…." 

(그의 상상은 정말이지….) 그러나 그의 상상이 정말 그에게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이루어지기를, 나는 빌고 또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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