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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땅에서 코로나 난리 뚫고 태어났으니 '하고 싶은 것' 다하라"

한겨레 입력 2021. 01. 14. 20:56 수정 2021. 01. 14.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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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합니다][축하합니다] 아들 하라에게 아빠가 주는 편지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지난 2020년 9월14일(현지시각) 태어난 황하라 아기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엄마·아빠의 이민생활 시름을 잊게 해주고 있다. 황상호씨 제공

계획 없던 미국 이민생활 와중에 ‘뜻밖' 임신 소식에 어안이 벙벙 코로나로 격리중 출생 순간 지켜봐 ‘뭐든 받아들이겠다’ 순응하기로

영어 이름 지으라고들 성화에도 너로 살기 바라 순한글 ‘하라’로 ​

하라야. ‘고마’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아라. 20대를 주저함으로 보낸 아빠의 바람이다. 랩하고 싶으면 랩을 하고, 마구 그림을 그리고 싶으면 그래피티를 해라. 남자라고 태권도 배우는 건 별로다. 차라리 발레를 배워라. 학교 밖 세상이 궁금하면 학교를 나와 여행을 가라. 중퇴야말로 쨍한 스펙 아니겠나. ‘얼굴책’(페이스북), ‘사과’(애플) 창업자 ‘아재’들처럼 말이다. 아빠가 지어준 이름처럼, 너로 살기 바란다.

그거 아니? 네가 태어나기 전, 주변에서 영어 이름을 지으라고 성화였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이곳에서 보낼 거니까 말이야. 하지만 나는 싫더라. 어색해져가는 내 경상도 사투리도 아쉬운데 너마저 색깔을 잃게 할 수는 없었다. 뿌리, 정체성이란 말은 너무 거창하고 그냥 너의 컬러를 지우고 싶지 않았다. 거 봐라. 미국 첫 여성 부통령이 된 인도계 해리스 연방 상원의원도 이름이 카말라(Kamala)잖니. 산스크리트어로 ‘연꽃’이란 뜻이란다.

황하라(가운데) 아기의 아빠 황상호(왼쪽)씨는 미국 로스엔젤레스민족학교에서, 엄마 우세린(오른쪽)씨는 로스엔젤레스 한인가정상담소에서 일하고 있다. 황상호씨 제공

이제, 출생의 비밀을 이야기할 때가 된 것 같다. 귀담아 듣거라. 너의 탄생은 ‘뜻밖 오브 뜻밖'이었다. 아빠가 인생의 밑그림에 조차 없던 미국으로 이직하면서 예정에 없던 결혼을 했고, 상명하복 한국 문화와 유리할 때만 이용하는 수평식 미국 문화가 뒤섞인 이민자 커뮤니티 때문에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질 때쯤, 네가 테스트기의 리트머스지 붉은 색 두 줄로 등장했다. 어안이 벙벙하더라. 스트레스의 임계점이 ‘팅’하고 넘으니 초탈해지더라. 그래 인정. 온나. 뭐든 받아들이겠다. 뭐든 싸워 이겨보겠다는 호승심이 아니다. 순응이었다.

히야. 그런데 재밌구나. 이제 세상이 난리더라. 인종차별 반대 시위로 매일 여기저기 집회가 열리고 일부 약탈꾼은 상점을 털었어. 새벽까지 핼리콥터가 아파트 상공을 날았지. 또 코로나 바이러스로 휴지 사재기에 가짜 뉴스, 온갖 음모론이 세상을 감염시켰지. 아빠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제재가 심해져 하라 보러 병원에도 거의 못 갔어. 엄마 외에는 출입이 금지됐거든. 네가 태어난 날도 병원 밖에서 대기하다가 출산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서야 병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때부터 아빠도 엄마와 병실에서 격리됐었다. 의료진도 모두 마스크를 쓴 채 진료를 했고. 네가 막 태어나기 직전, 아빠는 간호사에게 병실 밖에 잠시 나가 있겠다고 했어, 출산 장면을 직접 보면 트라우마에 걸릴 수 있다고 해서. 하지만, 못 나가게 하더라. 코로나 때문에 금지래. 하앟. 바로 그 순간 너의 ‘콘헤드’(머리)가 끈적한 혈액을 두른 채 미끄러져 나오더라. 인간의 탄생.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이 무심히 벌어지더라.

황상호씨가 지난 2020년 9월14일(현지시각) 미국 로스엔젤레스의 한 병원에서 갓 태어난 아들 하라의 탯줄을 직접 자르고 있다. 황상호씨 제공

처음에는 아빠가 육아에 재능이 있는 줄 알았어. 기저귀 갈아주고 분유만 줘도 잠 잘 자는 너를 보면서 말이야. 착각은 한 달쯤 지나자 판판이 깨졌지. 네가 새벽마다 깨어 생떼를 쓰는데 엄청 피곤하더라. “아오” 급기야 짜증이 외마디와 함께 치밀어 오르더라고. 그런데, 그 순간 탁! 깨달음이 오더라. 지금 내가 나를 공격하고 있구나. 아이를 소홀히 하는 일이 바로 나를 소홀히 하는 것이구나. 지금 아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돌보고 있는 거구나.

우리가 살고 있는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는 인구가 천만 명인데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하루 1만5천명이 넘는다. 아빠도 확진자와 접촉해 며칠 육아에서 면제되는 ‘자가격리 특혜’를 얻기도 했지만 말이야.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 시간이 감사하다. 성공해야 한다, 돈도 제법 벌어야 한다는 욕망의 열차를 멈출 수 있어서 말이야. 많은 것을 덤으로 얻은 것 같다.

태어난 지 넉 달이 넘어가는구나. 하라야. 넌 좀 잘생긴 것 같아. 어쩜 피부가 백설기처럼 그렇게 뽀얗니. 피부결도 포시라워. 웃는 모습도 나를 닮아 ‘월매나 좋아’. 아빠가 왕년에 웃음이 천진난만하다며, 청춘 드라마 주인공 같다는 이야기를 꽤 들었거든. 그래, 알았다. 그만할게. 사회적 격리가 길어지니 이렇게 헛소리를 글로 쓴다.

각설하고, 엄마가 캠핑 유튜브를 만들 거래. 이름하여 ‘캠핑 베이비’. 하라가 ‘뷰’를 좀 끌 것 같다고 하면서. 너희 엄마 무섭다. 아빠가 침대에 누워 지나가는 말로 “여기 여행 가면 재밌겠다” 말하면, 엄마는 바로 숙소를 예약하는 사람이란다. 추진력 갑이다. 각오해라. 하라야, 일단 엄마 아빠가 하고 싶은 것 먼저 하고. 너 하고 싶은 것 해라.

로스엔젤레스/아빠 황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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