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중앙일보

[최현철의 시선] 잔혹동화 '가습기 살균제'

최현철 입력 2021. 01. 15. 00:34 수정 2021. 01. 15. 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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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가습기메이트에 무죄 판결
피해자 있는데 가해자 사라진 셈
전문가도 반발, 시즌2 시작될 듯
최현철 정책디렉터

먼 옛날, 한 식품업자가 천조국에서 수입한 신비한 물질을 가공해 붉은 가루를 만들었다. 물에 타 먹으면 시원하고 청량하다며 팔았다. 얼마 뒤 다른 업자가 아라사에서 수입한 물질로 비슷한 맛과 향을 내는 푸른 가루를 내놓았다. 그런데 이 물을 마신 사람들의 위에 구멍이 났고 일부는 죽었다. 원성이 자자해지자 나라에선 두 사람을 잡아들였다.

강직하고 엄격한 판관은 백성의 원성에 휘둘리지 않고 털끝만 한 의심도 남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를 위해 피해 사례와 같은 조건으로 만든 가룻물을 먹으면 똑같은 피해가 나와야 한다는 기준을 세웠다. 사람에게 먹일 수 없으니 쥐에게 먹여봤다.

푸른 가루의 경우, 쉽게 예상한 결과가 나왔다. 이 때문에 한참 전에 푸른 가루 업자는 6년의 옥살이가 확정됐다. 그런데 붉은 물은 달랐다. 식도나 혀에 이상이 생기긴 했는데 곧바로 위에 구멍이 나진 않았다. 좀 더 걸쭉하게 탄 물을 먹여보고, 주사로 직접 위에도 넣어 보니 그제야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실험에 참여한 학자들은 ‘붉은 가루도 위를 망가뜨리는 위험한 음식’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런데 판관은 “똑같은 조건이 아니네”라며 실험을 의심했다. 조사한 학자들을 불러 제대로 조사했느냐, 사람에서도 똑같은 결론이 나오냐고 다그쳤다. 증인들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흐렸다. 판관은 “이걸로는 처벌할 수 없다”며 붉은 가루 업자를 풀어줬다. 그는 억울함을 벗었다며 기뻐했다.

애경과 SK케미칼의 가습기 살균제(가습기메이트) 사건 재판은 2019년 2월 시작돼 10만 페이지 넘는 기록을 검토하고 60여 차례의 공판을 거쳤다. 재판은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고, 전문적인 내용으로 가득 찼지만, 얼개는 대략 앞의 ‘가루업자와 판관’ 이야기‘와 비슷하다. 지난 12일 재판부가 내린 판결의 요점은 동물 실험 결과 살균제 성분이 폐에 손상을 줬다고 볼 증거가 없고, 그런 결론을 내린 실험과 증언은 엄밀하지 않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형사소송의 대원칙을 지키겠다고 강조했다. 합리적인 의심이 전혀 없을 정도의 증명이 있어야만 유죄로 인정할 수 있다는 원칙이다. 짐작과 추론, 분위기와 여론으로 국민을 벌할 수 없다는 신념을 탓할 수는 없다. 규범을 지키고자 고뇌를 감수하겠다는 결단에 경의를 표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교훈적이어야 할 이야기는 안타깝게도 잔혹 동화가 됐다. 무엇보다 SK와 애경 제품을 쓰다 발생한 죽음이 의문사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번 판결은 국회가 사회적참사 진상규명법을 개정한 지 딱 한 달 만에 나왔다. 개정법은 진상규명위의 활동시한을 1년 반 연장했지만, 그 임무에서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진상규명 작업을 쏙 뺐다. 진상규명은 끝났다는 판단이었다. 재판부는 판결문을 읽다 말고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그러곤 “추가 연구가 나오면 (이 판결이) 역사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법과 판결이 묘하게 엇갈리면서 사실상 진상을 규명할 방법이 차단돼 버렸다. 법 개정에 항의하며 사참위 부위원장직을 사퇴한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은 “설마 했는데 변호사 쪽 논리를 100% 받아줄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잔혹 동화의 두 번째 징후는 전문가들의 판단이 너무 쉽고 거칠게 부정당한 것이다. 신고한 피해자만 6800여명, 이 중 1700여명이 숨진 가습기 살균제는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CMIT/MIT를 주원료로 쓴 제품군(SK케미칼·애경·이마트), PHMG/PGH 계열의 제품군(옥시·롯데마트·홈플러스)이다. PHMG는 동물실험에서 폐 손상 과정이 뚜렷하게 확인된 것에 비해 CMIT 쪽은 그렇지 않았다. PHMG 쪽 재판이 쉽게 끝난 이유다. 그래도 SK와 애경 제품만 쓰다 피해 본 사람은 분명히 존재했다. 정부는 끈질기게 여러 방법을 동원해 CMIT의 위해성을 따져본 끝에 폐 손상에 영향을 끼친다는 결론을 내렸다. (환경부 CMIT/MIT 독성 및 건강영향 종합보고서) 여러 실험을 주도한 교수·박사들이 법정에 나와 증언했다.

그런데 재판부는 이를 믿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검찰과 변호인의 질문에 대한 답이 달라졌다는 이유를 댔다. 일부 실험에 대해선 “결과를 예정하고 꿰맞춘 것”이라고 평가했다. 네 차례 증언대에 섰던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질병 연관성 판단을 동물실험에서 완벽히 재현되는 것으로 보고 다른 가능성에 눈을 감은 판결”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재판부가 자신들의 실험과 증언을 곡해했다며 곧 입장을 낼 예정이라고 한다. 잔혹 동화는 곧 시즌2로 이어질 것 같다.

최현철 정책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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