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경향신문]
새해, 여전히 코로나19로 시달리지만 어디선가 ‘희망’을 보고 싶었다. 대통령의 신년사를 읽었다. 글은 ‘바람’으로 가득했고, 희망은 좀처럼 보이질 않았다. 바람을 늘어놓는다고 희망이 생기지 않는다. 현실을 직시하고, 해야 할 것을 기억하고 실천할 때, 오늘은 어제와 다르고 내일은 오늘과 다를 것이다. 그 다름, 새로움에서 희망이 움튼다. 희망은 그렇게 온다. 현실과 동떨어진 바람은 희망이 아니라 근거 없는 ‘희망 사항’일 뿐이다.
신년사에 현실에 대한 대통령의 진솔한 반성이 없다. ‘사람이 먼저’라고, ‘노동 존중’이라 했다. 거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노동자가 ‘일하다 죽지 않게’ 하자는 법안을 껍데기만 남겨놓고 통과시켰다. 정부와 합작이다. 원래 국회에 제출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서 ‘기업’을 빼고 ‘중대재해처벌법’으로 이름을 바꿈으로써 정부·여당은 자기네 관심이 누구에게,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보여주었다. 그들에게는 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의 안전과 생명보다는 기업 경영과 경제가 훨씬 더 중요하다. 내용도 전체 사업장의 79.8%인 5인 미만 사업장은 적용 제외, 전체의 98.8%인 50인 미만 사업장은 3년 적용 유예로 변경하여 노동자 생명보호법이 유명무실해졌다. 그런데도 신년사는 “산업재해 예방”을 말한다. 그런다고 희망이 오지 않는다. 코로나19 난국에 부당 해고된 노동자들이 혹한의 날씨에도 서울역이며 여의도며 여기저기서 울부짖고 있다. 그런데도 신년사는 “최대한 고용을 유지”했다며 기업들을 추켜세운다. 그런다고 희망이 오지 않는다.
‘생태계 보전’과 ‘4대강 재자연화’를 말했다. 이전 정권의 대표적 환경 적폐인 ‘설악산오색케이블카사업’이 지난 연말 중앙행정심판위원회 결정으로 다시 살아났다. 2017년에 이어 두 번째다. 우리나라 유일의 원시림을 밀어내고 만든 가리왕산 알파인경기장은 올림픽 후 복원을 약속했지만, 아직 그대로다. 4대강의 16개 ‘보’도 그대로다. 금강과 영산강 보 처리방안은 국가물관리위원회에 올라갔지만 감감무소식이다. 현실이 이러니, 신년사의 “지역균형발전”은 ‘토건사업, 경기부양’으로 들린다. 지난해 국내외의 반대를 무릅쓰고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석탄화력발전소 건설에 투자를 결정하고 신년사는 “탄소중립을 향한 국제 사회의 의지”를 말한다. ‘2050 탄소중립’은 의미와 방향을 잃고 허공을 헤맨다. 희망도 길을 잃는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30년 전 ‘녹색평론’을 창간하며 발행인 고 김종철 선생이 던진 물음이다. 선생의 현실 진단은 어둡지만 솔직하다. “지금 상황은 인류사에서 유례가 없는 전면적인 위기”다. 선생의 제언은 무겁지만 단호하다. “손쉬운 처방이 없다는 사실” “부분적·임시적·외면적 수습책으로는 절대로 극복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선생의 처방은 소박하지만 근원적이다. “교만”을 “겸손”으로 바꾸어 죽음의 문화에서 “생명의 문화”를 다시 세워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희망이 있다.
진솔하고 겸손한 눈길로 바라보면, 세상이 우리 모두의 소중한 ‘집’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 눈길은 집 안의 약하고 아픈 존재에게 내미는 손길이 된다. 그 눈길과 손길이 모여 무너져가는 우리 집을 다시 세울 힘이 된다. 그때, 희망이 온다.
조현철 신부 녹색연합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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