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상황'에도 꺼지지 않는 '존재'의 빛

한겨레 입력 2021. 1. 15. 05:06 수정 2021. 1. 15.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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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문학이 필요한 시간 ][책&생각] 정여울의 문학이 필요한 시간
(27) 신데렐라의 마법 넘어 월든의 모험으로
문학의 오랜 주제는 열악한 상황과 위대한 존재 사이의 줄다리기
상황 넘어 찬란한 존재의 아름다움 향한 위대한 투쟁이 문학의 힘
집안일에 열중하는 신데렐라(릴리 제임스). 영화 <신데렐라>의 한 장면.

‘여기선 아무도 날 모르겠지’ 하고 방심한 채 세수도 안 하고 머리도 감지 않은 채 집을 나선 어느 날, 누군가 “작가님, 정여울 작가님!” 하고 다급하게 부르는 바람에 대경실색한 적이 있다. 그런데 마스크를 쓴 그의 얼굴을 한참 쳐다봐도 도저히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작가님, 저예요. 며칠 전에 봤는데, 모르시겠어요?” “아, 마스크를 쓰셔서 못 알아봤어요.” 알고 보니 나와 매주 한 번씩 라디오 심야방송을 함께 하는 피디(PD)님이었다. 소중한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괴로웠는데, 생각해 보니 마스크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황’과 ‘사람’을 무의식적으로 연결시키는 익숙한 감각 때문이었다. 항상 심야방송 스튜디오 안에서만 그를 봤기에, 대낮에 야외에서는 그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만 고정적으로 만나는 사람이기에, 상황이 바뀌자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아무도 날 모를 거야’라는 생각으로 재빨리 그곳을 지나치고 있었기에 주의력은 더욱 약해져 있었다. 일할 때만 만나던 우리는 어디까지나 특정한 ‘상황’에서 서로를 인식하는 존재라는 것을 깜빡한 것이다.

‘상황’이 바뀌면 존재 자체를 못 알아보는 인간의 취약성은 전 인류의 머릿속에 각인된 오래된 동화 <신데렐라>에도 있다. 계모의 부당한 대우와 일상적인 모욕을 받아들이며 묵묵히 자신만의 허드렛일을 할 때, 신데렐라는 빛나 보이기는커녕 초라하고 힘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재투성이 소녀 신데렐라가 요정의 도움을 받아 아름다운 옷을 떨쳐입고 눈부신 모습으로 나타나자 계모와 두 딸마저 신데렐라를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 그렇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숙녀가 설마 그들이 매일 부엌데기로 부려먹으며 괴롭히는 신데렐라일 거라고는 미처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대연회에서 신데렐라와 멋진 춤을 춘 뒤 신데렐라에게 푹 빠진 왕자마저도 상황이 바뀌자 운명의 짝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신비의 여인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재투성이 신데렐라, 부엌데기 신데렐라인 ‘상황’ 속에서는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신데렐라에 포착된 인류의 약점

어린 시절 이 동화를 읽을 때는 ‘왕자가 참 몹쓸 남자일세!’ 하며 실망감에 치를 떨었다. 드레스 좀 떨쳐입었다고 얼씨구나 좋아하고, 재투성이 신데렐라는 못 알아보다니. 진짜 사랑이라면 상대가 고통받고 있을 때 가장 먼저 그 아픔을 알아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드레스 좀 못 입었다고 얼굴조차 못 알아보는 왕자의 얄팍한 마음이 과연 진짜 사랑일까. 하지만 ‘상황’을 벗어나서는 ‘존재’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일이 끝없이 반복되는 현실에 적응한 어른이 되고 나니, 신데렐라를 미처 알아보지 못한 왕자의 어리석음이 이해되었다. 그것은 왕자의 특별한 어리석음이 아니라 인류의 본질적인 약점이었던 것이다. 장 폴 사르트르는 우리가 어디까지나 ‘상황’ 속에서 거주하는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과 우리 자신을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본 <신데렐라>에는 있지만 어린이용으로 각색된 <신데렐라>에는 흔히 생략되는 장면이 있다. 아버지가 친딸 신데렐라의 가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장면이다. 왕자가 신데렐라가 떨어뜨린 황금구두 한 짝을 들고 다니며 구두의 주인을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신데렐라의 집에 당도했을 때, 신데렐라의 아버지는 말한다. “저 아이는 분명히 당신이 찾는 그 여인이 아닐 거요.” 부엌데기이자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는 딸에게 미안함을 느끼기는커녕 딸이 그렇게 훌륭한 신붓감일 리가 없다고 선언하는 아버지의 당당한 확신이 너무도 충격적이다. 볼품없는 신데렐라의 ‘상황’을 만든 것은 누구인가. 바로 아버지와 계모와 두 딸의 합작품이 아닌가. 계모의 악행을 전혀 막지 못하고 방조하거나 은닉한 아버지의 책임이 크다. 현대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이는 분명 아동학대다. 학대당하는 아이들의 곁에는 ‘학대하는 어른’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학대를 알면서도 방치하는 또 다른 어른’이 반드시 있다. 신데렐라는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착취당하고, 미움받고, 아무에게도 보호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여하튼 그런 상황에서 왕자는 신데렐라의 숨겨진 빛을 알아보는 것이 더 어려웠던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열악한 ‘상황’에 갇혀 있는 신데렐라의 숨겨진 빛을 이끌어줄 사람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요정뿐이라는 점이 가슴 아프다. 만약 신데렐라에게 요정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정녕 신데렐라는 자신을 구할 방법을 찾지 못했을까. 나는 신데렐라가 차라리 왕자와 결혼하지 않기를, 그 무시무시한 학대의 감옥인 집을 탈출하여 자신만의 운명을 개척하는 용감한 모험의 주인공이 되어주기를 꿈꾼다.

드레스를 떨쳐입은 눈부신 신데렐라의 모습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다. 영화 <신데렐라>의 한 장면.

달빛 비추는 물 버리면 달빛도 사라져

돌이켜보면 상황의 열악함과 존재의 위대함 사이의 끝없는 줄다리기, 그것은 문학의 오랜 주제였다. 아름다운 존재들은 파란만장한 희비극 속에서도 끝내 빛을 발한다. 돈키호테는 영웅적 모험을 한답시고 풍차를 괴물로 오해하여 말을 타고 거대한 풍차와 한판 승부를 벌임으로써 ‘투쟁이 없는 평화로운 현실’을 ‘오직 투쟁밖에는 살길이 없는 위대한 영웅의 현실’로 뒤바꾼다. 돈키호테는 자기 자신도 건사하지 못하면서, 고통받는 타인을 구하는 모험에는 반드시 제일 먼저 앞장서다가 걸핏하면 다치고, 넘어지고, 망신당한다. 하지만 상황이 열악해질수록 돈키호테의 턱없는 순수는 더욱 빛이 난다. <변신>에서 벌레로 변해버린 일 중독 영업사원 그레고르는 자신을 오래오래 착취해온 아버지가 던진 사과로 등짝을 얻어맞고 죽어가지만, 나에게는 그레고르가 한때 음악을 사랑했던 영원히 눈부신 청년으로 기억된다. 가혹한 상황을 뛰어넘어 존재의 찬란한 빛을 이끌어내는 사람, 그런 사람이 영원히 기억되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이다.

때로는 이토록 힘겹게 불리한 상황을 뛰어넘지 않아도, 존재와 상황이 행복하게 어우러지는 기적 같은 순간도 있다. 얼마 전 이규보의 한시 ‘영정중월’(詠井中月)을 읽다가 ‘상황’과 ‘존재’를 항상 분리해서 생각하는 나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달빛이 너무 탐나 물을 길으러 갔다가 달도 함께 담았네/ 돌아와서야 응당 깨달았네/ 물을 비우면 달빛도 사라진다는 것을.” 그날 그 탐스러운 달빛에 투영된 물빛의 아름다움은 ‘달빛과 물이 함께 있는 상황’ 속에서만 찬란하게 빛날 수 있었던 것이다. 달빛이 비추는 물을 비워버리면 달빛도 사라지듯이, 상황을 떠나서는 그 어떤 존재도 홀로 독립할 수는 없음을 나는 자꾸 잊는다. 이규보는 상황과 존재가 완벽한 일치를 이루는 순간을 아름답게 포착한 것이다. 그 상황에서 그 존재를 떼어낼 수 없고, 그 존재를 그 상황에서 분리시킬 수도 없다. 오직 그날 밤 그 달빛 그 물빛의 유일무이한 아름다움 속에서 잉태된 시어의 아름다움은 수백 년의 시간적 간극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고스란히 감동의 물결을 전해준다.

소로의 ‘야생사과’가 빛을 잃는 순간

신데렐라는 상황에 일희일비하고, 이규보의 달빛이 상황과 조화를 이룬다면,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존재의 아름다움을 본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야생사과’라는 멋진 에세이를 쓰면서, 들판에 굴러다니는 울퉁불퉁한 사과 한 알에서 위대한 세계의 탄생을 보았다. 길에서 주운 울퉁불퉁한 사과의 향기를 맡으며 소로는 인류의 역사를 찬찬히 되짚어 본다. 돈을 주고 사지 않아도 되는 사과, 훔치지 않아도 야생의 들판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사과에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사과가 상품이 되어 시장에 팔려 나가는 순간, 천상의 맛과 향으로 존재의 빛을 뿜어내는 사과의 아우라는 사라져버린다. 가난했던 소로에게 지천에 널려 있는 야생사과는 늘 반갑고 고마운 식량이었으며 동시에 ‘무엇이든 상품으로 만들어 파는 인간의 본성’을 비판적으로 사유하게 만드는 영감의 뮤즈였다. 왜 인간은 이렇게 자연이 무료로 선물하는 그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여 사고파는가. 왜 우리는 자연이 이토록 커다란 사랑으로 선물하는 향기로운 열매가 지닌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가.

소로는 농부의 손을 떠나가 시장에 내다 파는 ‘상품으로서의 사과’가 자신이 산책길마다 매번 주머니에 수북이 담아 오는 ‘야생사과’와 너무도 다른 존재임을 알아본다. 야생사과의 진정한 가치는 오직 그 향기와 빛깔을 비롯한 존재 자체의 아름다움을 올올이 느낄 수 있는 영혼을 통해서만 말을 건다. 그저 돈으로 매길 수 있는 가치에만 연연하면서, 자연이 창조해내는 모든 생물들이 뿜어내는 매 순간의 위대함을 포착하지 못하는 현대인들. 우리는 상황의 마법에 걸려 존재의 가치를 끝내 발견하지 못하는 오랜 습관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켜야 하지 않을까. 그 어떤 상황에서도 존재의 빛을 잃지 않는 사람, 온 세상의 강물을 다 퍼부어도 결코 꺼지지 않는 존재의 빛을 간직한 사람. 그런 위대한 사람들의 향기로운 투쟁을 나는 매일매일 문학의 공간에서 발견한다. 불리한 상황을 뛰어넘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란하게 빛나는 존재의 위대함을 끌어내는 것, 그것이 바로 문학의 힘이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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