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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합치는 실존의 모험이자 타자와 만나는 길"

고명섭 입력 2021. 01. 15. 05:06 수정 2021. 01. 15.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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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중국 사상 아우른 철학자 프랑수아 줄리앙 철학 저서 '탈합치'
기존 질서에 적응하는 삶에서 벗어난 실존과 정치의 새 규범 제시
프랑스 철학자 프랑수아 줄리앙. 위키피디아 코먼스

탈합치: 예술과 실존의 근원프랑수아 줄리앙 지음, 이근세 옮김/교유서가·1만5000원

프랑스 철학자 프랑수아 줄리앙(70)은 남다른 이력의 소유자다. 파리고등사범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을 연구한 줄리앙은 교수자격을 얻은 뒤, 돌연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대학과 상하이대학에서 중국학을 연구했다. 40여 년에 걸친 중국사상 연구는 줄리앙의 사유에 독특한 입각점을 마련해 주었다. 서양 바깥에서 서양을 볼 수 있는 눈을 키워줌과 동시에 동서 사유를 아우르는 시야를 열어준 것인데, 이런 전망 안에서 산출된 40여 종의 책 가운데 10여 종이 국내에도 번역돼 있다. 2017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탈합치>(De-coincidence)는 줄리앙의 철학적 사유가 응집된 저작이다.

‘탈합치’란 인간 삶의 근본적 작동방식을 ‘합치(coincidence)에서 이탈함(de)’으로 이해하는, 지은이가 창안한 개념이다. 이 탈합치의 단적인 사례를 이 책은 예술의 역사에서 찾는다. 입체파 창시자 파블로 피카소(1881~1973)를 보자.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에서 이 화가의 회화를 초기부터 관람하던 지은이는 <바르셀로네타 해변>(1896)이라는 작품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 그림이 앞의 진부한 초기작들과는 사뭇 다른 형식을 보여준 것인데, 미완성인 듯 캔버스의 가장자리 바탕이 색칠 없이 그대로 노출된 작품이었다. 그림이 캔버스와 합치하지 않고 어긋나 있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 그림의 어긋남에서 기존의 회화 체제를 해체하기 시작하는 첫 일탈을 목격한다. 이 회화가 벌려놓은 작은 틈으로부터, ‘재현’이라는 종래의 회화 관념을 깨부수는 새로운 화법이 자라났다. 20세기 회화에 혁명을 일으킨 이 어긋남을 지은이는 ‘탈합치’라고 명명한다.

20세기 회화 혁명가 파블로 피카소의 <바르셀로네타 해변>(1886).

이런 탈합치는 인간 실존에서도 발견된다. ‘실존하다’(exister)라는 말의 라틴어 어원은 ‘엑스-시스테레’(ex-sistere)인데, 이 말을 곧이곧대로 옮기면 ‘바깥에 서다’라는 뜻이다. 실존한다는 것은 바깥에 서는 것이다. 무엇의 바깥에 서는 것인가? ‘기존의 세계에 대한 적응’의 바깥에 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존한다는 것은 탈합치일 수밖에 없다. “탈합치는 자신과 자신의 일치, 자신에 대한 자기 적응에 균열을 냄으로써 ‘자아’의 마비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집을 떠나는 것은 바깥에 서기, 곧 실존하기를 가로막는 기존의 자기 적응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 대해 탈합치를 실행하는 것이야말로 관성대로 살지 않고 진정으로 실존하는 삶을 사는 길이다. “우리가 환경, 집단, 군집에 퍼져 있는 암묵적인 합의의 결속에서 풀려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존의 요청을 포기하는 셈이다.” 낡은 것과 결별하는 창조적인 삶을 살려면 탈합치의 실존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은이는 인간 실존의 이런 조건을 기독교 성서의 창세기 신화를 끌어들여 설명하기도 한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는 ‘합치하는’ 삶을 살았다. 최초의 남녀는 자신들의 존재에 의문을 품지 않았고 에덴동산이라는 완벽한 적응의 세계와 분리되지도 않았다. 그들은 모험하고 실존할 ‘바깥’을 볼 수 없었다. 사과를 먹고 난 뒤에야 인류의 조상은 처음으로 의식의 길에 접어들었고 자신들이 벌거벗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아담과 이브는 낙원에서 추방당함으로써 비로소 실존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신의 질서에서 이탈함으로써 그 균열 속에서 자유가 드러났다. 이 자유의 결과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규정하게 됐으며 역사의 주체로 일어섰다. 지은이는 더 나아가 기독교의 신도 ‘탈합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신 곧 성부는 자기 자신과 합치하는 존재다. 그 성부가 자기에게서 벗어나 아들(성자)로 탈합치함으로써 성령으로서 자기 자신을 활성화한다. 다시 말해 신은 자기 합치에서 이탈함으로써 자기 자신과 긴장 관계를 이루고 스스로 신으로서 활동한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첫 구절은 ‘태초에 탈합치가 있었다’라는 문장으로 다시 쓰여야 한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이런 탈합치가 작동하는 또 다른 중요한 사례는 사고의 영역에서 발견된다. 지은이는 ‘정신’과 ‘의식’을 분리해 대립시킨다. 여기서 정신은 외부 사물을 파악하는 사고 능력을 가리키고, 의식은 그 정신의 활동을 자각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정신은 사물에 주의를 집중하고 사물을 정확히 인식해 ‘합치’에 이르려고 한다. 반면에 의식은 그런 정신의 작용에서 벗어나 그 작용을 거리를 두고 살핌으로써 ‘자각’에 이르려고 한다. 우리 정신은 사물을 인식하는 데 골몰해 있기 때문에 의식의 반수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서양 전통 철학은 이 정신을 해명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지은이가 보기에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이 정신의 합치 상태에서 벗어나는 의식의 각성이다. 그런 의식의 각성을 촉구하는 것이 말하자면 선불교다. 지은이는 선불교의 유명한 ‘구지 선사의 손가락’ 일화를 소개한다. 구지 선사는 누가 찾아와 무엇을 묻든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구지 선사가 없을 때 선사의 어린 시자가 질문을 받고 똑같이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이 사실을 안 선사는 시자의 손가락을 잘라버렸다. 없어진 손가락을 다시 세우려고 하는 순간, 시자는 “홀연히 깨달았다.” 코드화한 행위를 반복하던 시자가 합치 상태를 깨고 의식의 각성에 이른 것이다.

지은이는 이 의식의 탈합치야말로 기존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창안하게 하는 힘이라고 말한다. 탈합치는 목적도 종결도 없는 탈결속의 운동이며, 자아를 열어놓는 끝없는 실존의 모험이다. 이렇게 자신을 열어놓을 때 우리는 타자와 참답게 만날 수 있다. 주체는 타자를 통해서 실존의 계기인 ‘바깥’을 경험할 수 있고 바깥에 설 수 있다. 타자를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탈합치는 윤리적 삶의 조건이다. 그렇다면 탈합치는 정치와 만날 수 없는가? 이 책의 ‘옮긴이 해제’는 지은이가 2020년 ‘탈합치 연합’이라는 조직을 꾸렸으며 일종의 선언문인 ‘탈합치의 정치’를 내놨음을 알려주면서, 그 내용을 상세히 정리해 보여준다. 요약하자면, 정치 영역에서 탈합치는 기존 질서에 고착된 ‘이데올로기적 합치 상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과 역사의 가능성을 열고 ‘공통된 것’을 만들어가는 실천을 가리킨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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