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청와대까지..너무나 다른 대통령의 길, 노동자의 길 [은유의 책편지]

은유 작가 입력 2021. 1. 15. 10:49 수정 2021. 1. 15.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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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우리가 옳다!
이용덕 지음
숨쉬는책공장 | 292쪽 | 1만6000원

“90년대 초반 즈음 어느 노조에 강의를 갔다. 앞 시간 강사가 노무현이었다. 노조에서 활동보고 자료집을 주었다. 우연히 회계 보고를 보게 됐는데 그날 강사료까지 미리 집행한 내역이 나와 있었다. 노무현 50만원, 김진숙 10만원. 평소 노조에서 강의를 요청하면 강사료를 묻지 않고 갔다. 그때 처음으로 강사료를 문의했다. 강의 내용이 차이가 났는가? 아니랬다. 그렇다면 변호사와 (해고)노동자라는 직업에 따른 차등 지급이 아닌가. 노조 간부에게 말했다. 노동자도 노동자를 대접하지 않는데 누가 대접하겠습니까? 그날 강사료는 받지 않았다.”

김 지도님이 인터뷰 때 들려주신 일화가 생각납니다. 두 분이 부산에서 노동운동을 같이했다는 사실이 같은 사업장에서 강의한 얘기를 듣자 실감이 났습니다. 마지막 말씀이 여운이 큽니다. ‘노동자도 노동자를 대접하지 않는데 누가 대접하겠는가.’ 곱씹을수록 서러운 말, 시린 말입니다. 그건 노동자로 살아왔고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의 심장 박동이 느껴지는 뜨거운 말이기도 했습니다.

김 지도님의 발언은 행동으로 선명해졌지요. 김 지도님은 지난 35년간 삼화고무, 부산지하철 매표소 비정규직, 쌍용차, KTX 승무원, 영남대병원 등 해고된 노동자들이 싸우는 현장에 늦지 않게 달려갔습니다. 한진중공업 400명 정리해고를 철회하라며 309일을 크레인에서 싸웠고요. 사측에서 쓰고 버린 ‘인력’을 ‘노동자’로 대접했습니다. 2018년도에 유방암이 발병하고서야 어쩔 수 없이 ‘투쟁 방학’에 들어가셨죠. 회한에 찬 목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듯합니다. “내가 암투병하느라 톨게이트 노동자 싸움이랑 문중원 열사의 싸움을 같이 못한 게 마음에 걸려요.”

아마 김 지도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 책을 굳이 보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가 옳다!> ‘세상을 뒤흔든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7개월’을 기록한 르포입니다. 2019년 요금수납원 1500명이 집단해고에 맞서 서울영업소 캐노피 고공 농성, 한국도로공사 김천 본사 점거 농성에 들어간 굉장한 싸움이었죠. 저자인 이용덕 활동가는 서문에서 투쟁의 의미를 짚어줍니다.

“그동안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으나 이 사회를 힘 있게 지탱했던 요금수납원의 존재는 여성, 비정규직, 장애인 노동자가 겪어야 하는 고통스러운 현실과 함께 세상에 알려졌다.”

대체로 우린 노동자이면서 노동자를 보지 못하고 사는데 그중에 고속도로 요금수납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농성장에서도 새벽 5시에 일어납니다. 부지런합니다. “누구의 아내로, 며느리로, 엄마로서 살았는데 이제는 나로 한번 살아봐야 하지 않겠어요.” 말합니다. 의욕적입니다. 정규직을 날로 먹으려 한다는 비난에도 떳떳하고 조리있게 응수합니다.

“매일 아침 정문 앞에서 선전전을 진행했습니다. 10월 중순 어느 날, 출근하는 한 정규직 직원이 조복자 조합원에게 귓속말로 ‘시험보고 들어와’라고 얘기를 합니다. 조복자 조합원은 다시 그 정규직 직원에게 귓속말로 얘기합니다. ‘그럼 너희는 수납원일 할 수 있어?’ 저는 그 얘기를 전해 듣고 스스로 뉘우치게 되더군요. 노동은 평등하구나. 공부 잘하고 시험 잘 봐 정규직 되는 분들도 대단하지요. 하지만 남들이 하기 싫은 일들, 꺼리는 일들을 하는 것도 대단한 거란 걸 새삼 느끼게 되더군요.”(김승화 조합원)

저는 이 책을 읽고 노동자가 노동자를 대접하기 위해선 노동자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잘 듣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요. 김 지도님이 하신 말씀들, 스물여섯살에 해고돼 눈앞이 캄캄했고 그 절망과 고통을 알기에 ‘해고는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라던 말뜻도 이제야 조금 알 듯합니다. 톨게이트 노동자들도 말하거든요. “혼자라면 결코 상상도 못했을 싸움을 당신이 있기에 한다”고요.

김 지도님, 지난여름 인터뷰 이후 복직 소식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복직이 아니라 복직투쟁 뉴스만 들려오네요. 암이 재발되어 수술하셨다는 소식에 철렁하고, 아픈 몸으로 걷기 투쟁에 나선다기에 또 울컥했습니다.

‘부산에서 청와대까지’, 너무 아득한 길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미 도착한 사람들이 둘이나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노동인권 변호사의 이름으로 부산에서 청와대까지 직행 열차를 타고 가셨죠. 김 지도님은 최후의 해고자 신분으로 굽이굽이 걸어갑니다. 세 사람이 택한 행로가 같고 선한 의지도 일치합니다. ‘사람 사는 세상’ ‘노동 존중 사회’를 만들자! 그런데 가는 풍경도, 동행하는 이들의 계급도 다릅니다. 어디서부터 비롯된 차이일까요.

왠지 속상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저는 희망뚜벅이 8일 차에 갔습니다. 저만치 앞장서는 김 지도님과 그 뒤를 잇는 “해고는 살인이다” 몸자보를 걸친 이들의 행렬을 뒤에서 바라보며 걸었습니다. 직접 현장에 다녀오니 ‘우리가 옳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정년이 지난 해고노동자 김 지도님이 ‘포기하지 않음의 윤리’로 437㎞ 여정에 임하는 것이 자랑스럽고, 그 길이 이 사회가 간단히 삭제해버리는 노동자들의 존재를 드러내는 너른 자리가 되어준다는 사실도 벅찼습니다. 김 지도님! 가다 못 가면 쉬었다 오세요. 2월7일 청와대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은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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