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한국일보

[삶과 문화] 고단한 하루가 그렇게 지나갔다

입력 2021. 01. 15.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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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녘 찬바람을 맞으며 사무실 맞은편 재래시장으로 갔다.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가 시행되는 상황에도 이곳은 사람들로 활기가 넘쳤다.

그렇게 고단한 날 심신을 북돋워 주는 건 단 하나, 이런 밥상이다.

그렇게 쉽지 않은 하루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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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저물녘 찬바람을 맞으며 사무실 맞은편 재래시장으로 갔다. 미각은 참으로 얄궂은 요물이다. 속상한 일이 생겨 낮 동안 마음고생을 세게 했더니 두부와 대파를 숭숭 썰어 넣고 끓인 얼큰한 오징어 찌개가 몹시 먹고 싶어졌다.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가 시행되는 상황에도 이곳은 사람들로 활기가 넘쳤다. 심란할 때 습관처럼 이곳을 찾는 또 다른 이유다. 오늘 내가 여기서 살 품목은 세 가지였다. 맨 먼저 방앗간으로 향했다. 아직 온기가 도는 떡볶이용 가래떡 한 팩을 산 뒤 거기서 10m쯤 떨어진 해산물 가게로 방향을 틀어 물오징어 세 마리를 골랐다. 값을 치르기 무섭게 두부 가게로 달려갔다. 너무 무르지도 딱딱하지도 않은 이 집의 두부가 나는 참 좋았다. 다만 이 가게는 늘 사람들로 붐비고 한 판씩 만들어 내는 두부가 일찌감치 동나 버리는 바람에 허탕 치고 발길을 돌린 날이 부지기수다.

©게티이미지뱅크

다행히 먹을 운은 따르는 날이었다. 진열대 위 두부판에서 설설 김이 오르고 있었다. 두 모 값인 6,000원을 현금으로 건네고는 눈을 홉뜨며 주인아저씨를 보았다. 그이가 슬쩍 이쪽을 살필 때도 눈알의 힘을 풀지 않았다. 이유가 있었다. 이 시장에 드나들기 시작한 초기, 선량하기 그지없는 안주인의 미소에 이끌려 여기 두부를 처음 맛보았다. 짭짤하고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었다. 안주인은 열 개를 모아오면 두 부 한 모를 공짜로 증정하는 쿠폰까지 챙겨 주며 나를 두 배로 감동케 했다. 그런데 바깥주인이 가게를 지키는 사이에 산 두부 봉지에 쿠폰이 빠져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아챘다. 고의일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시인 김수영은 '저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는' 스스로를 두고 '나는 왜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라고 자책했다. 하지만 사람 사이란 게 사소한 일에 감정 상하고 영영 돌아서는 법이다. 그곳의 두부 맛을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다음날 바깥주인이 가게를 지키는 시간에 맞춰 찾아갔다. 그이가 무심한 듯 또다시 쿠폰 빠진 두부 봉지를 건넸을 때 의심은 근거 없는 확신으로 굳어지고, 나는 상냥하지만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쿠폰, 쿠폰을 꼭 챙겨 주세요." 그날 이후 양자 간 눈치싸움이 일 년 넘게 계속되는 중이었다. 그이가 보란 듯이 쿠폰 두 장을 흔들더니 두부가 담긴 봉투에 넣었고 나는 그제야 생긋 웃으며 돌아섰다.

배추와 양파, 파프리카를 왕창 넣은 궁중떡볶이를 들기름에 볶고, 오징어 찌개를 칼칼하게 끓여 저녁상을 차렸다. 내가 존경하는 어느 선생님은 마음 쓰이는 문제가 생길 때 가만히 물러나 6개월, 3년, 10년 뒤의 시점으로 지금 상황을 관조한다고 했다. 그것만으로 거의 모든 문제의 해답이 나온다고. 다만 그런 객관화조차 버거운 날이 있다. 그렇게 고단한 날 심신을 북돋워 주는 건 단 하나, 이런 밥상이다. 푸짐한 저녁을 먹고 나자 온종일 단단하게 가시 돋쳤던 심신이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설거지를 끝내고 돌아서는데 이빨 빠진 찻잔에 모아둔 두부집 쿠폰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가을 이후 모아두기만 한 쿠폰이 서른두 장이었다. 이걸 내밀어도 미안하지 않을 날이 오기는 할까? 그때가 되면 아저씨 눈앞에 찻잔째 들이밀어야지. 바보 같은 웃음이 실실 나왔다. 그렇게 쉽지 않은 하루가 지나갔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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